[묵상글]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전봉석 2021. 6. 24. 05:20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4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시편 92:5

 

 

대책 없는 날들을 산다. 이런가싶으면 저렇고 저런가싶으면 이러하니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속을 헤맨다. 들어보면 저마다 사연이 구구하여 실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보다 넘쳐나는 이야기를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아는 나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기억에 의존하고 누가 해주는 말에 의해 각색된다. 가령 나의 부모의 이야기와 그 세대의 여러 상황은 전해진 말로 이해한다. 사진이나 어떤 문서가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덧붙여진 이야기는 전해들은 말이 전부이다. 그럴 때 우리 안의 자동회로는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편집하거나 감추어져서 원래의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 된다. 듣다보면 저마다 말 못할 사연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알려도 되겠다, 하는 정도의 이야기만 드러내거나 기억하고 사는 것이다.

 

그럴 때 감추고 외면하고 사는 자기 이야기의 무게만큼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흘려듣거나 듣고 마는 것이 전부여서 ‘내 안에는 너’가 크지 않다. 그런데 그것은 이상한 습성이 되어 자리를 잡는데 실제 자신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적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굳이 알아볼 겨를이 없이 살아가느라 바쁜 것이다. 그러니 듣다보면 서로의 막힌 담은 ‘숨겨진 이야기’로 인해 청맹과니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일침을 가한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로 주가 기뻐하시는 삶이란 하나님이 우리 이야기를 어찌 다루시고 이어가고 계셨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일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시 92:5).”

 

그러자니 우리의 마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숨기고 숨고 감추고 거짓으로 꾸며 남을 탓하고 전가하는 습성들이 있어서 주의 생각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주의 마음을 품으라하심은 주와 같이 살고자함인데, 나를 알되 나의 이야기가 전부일 수 없는 것으로 내 곁에 두시는 너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하신다. 이를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시 92:6).”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깨달을 수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알지 못하는 신’에게 빌고 또 바라는 데 능숙하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은 또한 분명해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우리는 저들로 알게 해야 한다. 이야기가 꼬여버린 사람들의 얽히고설킨 마음을 풀어줘야 한다. 들어줘야 하고, 들은 것을 저들 대신 주께 아뢰어주어야 한다. 그리 못하는 것은 두려워서다. 행여 일을 망칠까봐,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봐, 괜한 일에 끼어들어 성가신 일에 말려들까봐, 내 일도 아닌데 괜히 나섰다가 그 짐을 대신 져야 할까봐… 우리의 염려는 앞서고 두려움은 가려는 길을 막아선다. 그럴 때 우리의 방법은 하나뿐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를 붙들고 마다하지 않을 때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 92:15).”

 

그럴 때면 내 코가 석 자라. 내 앞가림도 못하고 사는 주제인데… 하는 의외의 그럴싸한 변명이 내 안에 똬리를 튼다. 정신과에서 이런저런 상황을 살피더니 공황장애 약을 첨가하였다. 앞서 누가 전화번호를 바꾸고는 겸사겸사 안부전화를 주었고, 어디냐는 저의 물음에 병원에 왔다는 말과 그것이 정신과라는 소리에 저는 거침없이 몰아세웠다. 목사가 다른 데도 아니고 정신과를 들락거리면 되겠어? 자기 정신도 하나 간수 못하면서 남의 정신을 어찌 돌본다고 그래? 원래 저의 말투나 말의 진행이 위트 있고 직설적이라, 그러게 말입니다! 하고는 괜한 말로 이어지지 않도록 수긍하였다. 나야말로 나 같은 사람이 누굴 돕고 위하고자 한다고… 하는 마음에 자주 시달리고는 하니까, 나는 저의 장난스런 직설화법에 마음이 상하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시는 말씀 앞에서 주춤거리고 어기적거리며 주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알게 모르게 우리 주위에는 나 같은 것에게까지 도움을 구하는 신호가 들어온다! 친구는 전에 가르치던 아이가 장성하여 연락을 하였는데 반가움보다는 부담스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당장 자기 일도 힘에 겨워 조카 일에도 슬그머니 거리를 두고 있는 터에 남의 일까지… 하나님은 대책 없이 일을 자꾸 벌이시는 것 같다. 그러니 다윗은 주를 바라였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2).” 결국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마다하다 하나님이 안기시면 감당해야 한다. 그럴 때 나의 감당은 내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아니다. 주가 대신 지신 십자가다. 나는 그저 그 뒤를 따를 뿐이다.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65:9).” 그 하나님은 그저 도우실 수 있는 정도만 도우시는 게 아니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결국 나의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 보다 포괄적인 구성으로 되어 있다. 그저 밋밋하게 아무런 플롯도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에는 독자가 없다.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리고 독자는 책장을 덮어버린다. 작가는 의도적으로라도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위기를 더한다. 이는 이야기를 밀도 있게 다루며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고 담고자 하는 주제가 뚜렷하게 전달되기를 의도하는 것이다. 어제 오후 나의 몇 단락의 이야기는 그렇게 구성되었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호소하려 정신과로 갔고 대기 시간이 길어 밖을 나와 서성거릴 때 뜬금없이 누구의 전화가 들어왔고, 저의 직설적인 말들로 나는 다소 의기소침하기도 했으며, 정신과의 담당의는 다른 약물을 대체해보자며 이를 첨가했고, 나는 돌아와 설교원고를 마저 작성하다 누구와 통화를 하게 되면서,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저의 말에 이런저런 격려와 위로를 더해야 했다.

 

문단과 문단이 나뉘고 각 문단에는 소주제가 있는데 이는 모두 대주제를 드러내는 데 하나가 된다. 이야기의 구성은 이야기 속에 있을 때는 알 길이 없다.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생길지, 나의 상태가 어떨지, 어떤 일로 씨름하게 될지 나는 알지 못하면서도 확신하는 것은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4-5).” 나는 주의 백성이라는 것, 주의 자녀이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곧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이야기가 극적으로 주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 소용되게 하려 하심을. 내 곁에 두시는 남의 이야기가 실은 주의 이야기로 하나 되게 하려 하심을.

 

그렇게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나의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믿음으로 안다. 앎으로 맡는다. 누구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무슨 재주로 저의 이야기를 바꾸어놓을 수 있겠나? 주가 하심을, 주께서 하실 것을 알고 또 믿음으로 다만 나는 오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 정도에서 미루지 않는다. 이는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이것으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그러므로 이 모든 여정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

 

구원이 무슨 공짜 밥처럼 뚝딱 차려지고 마는 게 아닌 것을, 이를 위하여 주께서 사람이 되어 나를 위해 죽어주시기까지 한 것을. 이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3-14).” 오늘도 말씀은 나를 이끄시고 돌아보신다. 그 이유는 하나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15-16).” 주 앞에서 나의 자랑은 내가 잘나고, 잘 먹고 살다 왔다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 내 곁에 두시는 남의 이야기가 실은 내 이야기가 되게 하시고 내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삼고자 하심이다. 이에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30).”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와 같은 말씀이 오늘도 나의 영혼을 붙드신다. 그것으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간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시 92:5).” 이를 묵상하면 알면 알수록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가지고 주가 다루시는 놀라우신 주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12-13).” 주의 선하심을 안다. 나의 저자가 어떠하신가를 안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