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전봉석 2021. 6. 26. 05:29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편 94:11

 

 

일체의 비결, 슬픔과 기쁨을 다룰 줄 아는 기술은 성경으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저마다 사정이 있고 나름의 입장이 다른 것이지만 우리의 행동범위는 사고범위를 넘지 못하고 우리의 사고는 말씀으로 그 기준을 삼아야 한다. 곧 모든 게 성경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의미가 없음으로 허무할 따름이어서,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시 94:11).” 하는 시편의 정의에 함구한다. 그럴 때면 주가 나를 붙드시는데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 하는 고백을 실제의 삶으로 가지고 있으면 복이 있다.

 

그렇게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17).” 나도 그러하다. 우리는 모두 그러하여서 눈앞의 상황을 판단하는 일에 성경으로 우선해야 한다. 그럴 때 성경은 언제나 수평적인관계를 경계한다. 사람의 정, 그 사람들의 방식, 저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칫 무너지고 허물어지기 일쑤다. 진리로 시작하고 진리 가운데 거할 수 있는 일이 우리 믿는 자들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는 가시적인 게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곧 우리의 수평적인관계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로 자주 성경과 어긋나기 일쑤다. 왜냐하면 다들 그러고 사는데 나만, 우리만 유별을 떠는 게 아닌가, 하는 스스로의 모순된 생각이 나를 쥐고 흔든다.

 

그러니 일체의 비결을 배운다 함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종종 나의 어쩔 수 없음이 그 어떤 복됨보다 귀하다는 생각을 한다. 고로 성경의 진리는 이생의 진리다.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가 다르고 성경이 가리키는 세계, 그 이야기가 다른 게 아니다. 성경의 진리는 오늘 우리의 진리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사는 일이다.

 

그러려고 그러셨겠거니, 대학병원의 장례식장이 빈 곳이 없어 어쩌다 오게 된 곳이 나와는 지척이라, 저녁께 아내와 딸애를 만나 같이 조문을 다녀왔다. 상주의 자리가 허전하였고 사람들은 왁자하였다. 영정사진 속의 노인은 온화하였고 산 자들의 눈은 충혈 되었다. 아이는 불안해하다 잠들었으며 오늘 아침이 발인이라, 아무래도 아침 일찍 글방으로 보내야 한다기에 그러라고 하였다. 저마다의 슬픔은 홀가분해보였다. 나는 누구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누구와는 눈인사만 건네고 돌아왔다. 어찌 다녀왔는지, 자리에 눕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산 자들은 살아서 또한 살아가는 일에 전념을 다할 뿐이었다. 그간의 일이 어떠했든지 우리에게는 남은 생을 살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다만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애 5:1).” 주께 맡김이란 내가 나의 일로 씨름하지 않는 것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시 30:4).” 이것이 남겨진 자의 지침이다.

 

혹시나 하고 기도와 말씀을 준비해갔으나 저들의 황망함은 이를 받을 겨를이 없었다. 본인들 다니는 교회에서도 다녀갔다고 하여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부수적인 모습에 회의를 갖는다. 가령 즐비하게 세워두는 조화와 그 앞에 치렁치렁 누가 보낸 것인지의 명패가 그렇다. 하루 이틀이면 모조리 쓰레기가 될 것을, 또한 사람들의 건네는 말과 말 사이의 진정성에 대하여도… 다들 그러는 것이라 하면서 답습하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의 애도가 보다 성경적이었으면 하는 것인데. 잠깐 앉아서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 치웠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사는 데 지칠 정도로의 치열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여러모로 마음만 어려운 날이었다. 이럴까, 하면 저게 마음에 걸리고 저절까, 하면 이게 마음에 걸릴 때 그래서 우리의 기준은 성경이어야 한다. 말씀이 아니면 표준이 없고 표준을 잃으면 그때마다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기준은 변함이 없다. 좌우 정렬은 때때로 멀거나 가까울 수는 있겠으나 그때에도 기준은 엄연하여서 어떠하든지 중심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다루시는 방식이다. 할 때에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6).” 흔들림이 없는 삶은 첫째,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둘째,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 그리고 하나 더,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3).”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것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래서 서로에게 관용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5).” 이것으로 기뻐하는 일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좋다고 서로 부화뇌동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주 안에서’다. 그럴 때 아무 염려도 우리를 흔들지 못한다. 이를 우리는 하나님께 아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언제든지 흔들리고 넘어지기 쉬운 우리들로 하여금 주가 지키신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가만히 말씀을 되뇌며 나의 날들을 돌아보는 일은 귀하다. 내가 이 시간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은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8).”

 

솔직히 나는 말씀으로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혹시나 하고 혼자 본문을 생각하고 어떤 기도내용을 마음에 담아갔다가 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다만 누구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오는 것으로 나름은 큰 걸음을 했다. 몇 번을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약을 먹고 혹시나 하는 두려움으로, 이 지긋지긋한 나의 현실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더는 아닌 것으로, 말씀을 의지하며 말씀으로 붙들려 산다는 일은 이처럼 실질적이고 전투적이기까지 하다. 내 스스로 하고 말고의 것이 아니다. 산다는 일은 때로 죽는 일보다 잔인하다. 그러므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이에 배움은 엄청난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으로 예수께서도 순종을 배우셨다. 다윗의 고된 날들이 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세워갔다. 모세의 발걸음을 무거웠으나 돌아보면 주의 품에 안긴 아이와 같은 삶이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이를 앎으로 아는 만큼 감사가 나온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이 내 것이 된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 그러하기를 바람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어찌 나의 의지로이겠는가?

 

생각했던 것보다 새로 드는 사무실이 없어 주인의 표정이 밝지 않고 덩달아 나는 마음을 졸인다. 새로 깨끗하게 단장한 곳에 우리 교회만 덩그러니 들어앉아 있으려니 공연히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을 이렇게 자신하고 저렇게 장담하다가는 졸지에 ‘따귀 맞은 영혼’으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내가 주께 바라는 것은 저들로 주를 알게 하심이라. 다들 쩔쩔매며 사느라 여념이 없는 가운데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빌 4:18).” 오히려 서로를 위해 비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 주가 더하시는 날의 풍성함이란!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20).” 나는 저의 축복에 아멘, 한다. 삶은 곧 배우고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으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 한 문장의 명제가 나는 이제 복되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그러했던 나를 인정함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하는 오늘의 말씀에 나의 관심과 감정이입과 저를 위한 기도를 멈출 수가 없다. 할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23).” 저들은 누구였던가?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 1:21).” 이는 곧 나 자신이었으며 아직도 거기에 있는 너를 향하여,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22).” 오늘을 사는 이유와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8-9).”

 

주를 바라고 주의 뜻 가운데 사는 일이란,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17).” 이를 앎으로, 나의 허무함을 아시므로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11).” 오직 주를 바람이었으니,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 곧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