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선포할지어다

전봉석 2021. 6. 28. 05:20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골 2:8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시 96:3

 

 

내가 나로 사는 일에 대하여 ‘아픈 기억과 화해하는 일은 필요하다.’ 엎질러진 물과 같이 어떤 기억은 난감할 따름인데, 우리의 고약한 죄성은 이를 기름진 토양으로 삼아 수치심과 서러움과 미움과 용서하지 못함과 원망하는 마음을 배양한다. 이는 어릴 때만 그런 게 아니었다. 환갑이 다 된 이가 대여섯 살 때 겪은 서러움을 우려먹고 사는 것을 본다. 곧 낼모레 칠순인 이가 학창시절에 당했던 억울함으로 무장하고 사는 경우도 본다. 그래서 누구는 예의범절을 종교처럼 위한다. 누구에게는 돈이 늘 우선이다.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힘은 돈에 있다고 여기고, 스스로의 교양은 겉으로 가꾼 예의범절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건너와 말할 때 무슨 말끝마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또 하고 하면서, 저의 기억에는 그만큼 골이 깊이 팬 것이다. 나는 저의 입을 막을 수 없어 듣고 또 들으며 비명처럼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육신에 얽힌 사연을 저버릴 수는 없다. 가족 중에 누가 자살을 한 경우 남은 가족을 우리는 ‘자살생존자’라 부른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 기억의 상처는 우리 스스로 해쳐낼 수 없는 문제이다. 이에 나는 말하기보다 글쓰기를 권하고 글쓰기는 무던한 사랑을 알게 한다. 여기에 하나를 더해 무엇을 쓰느냐의 문제에서 성경을 토대로 할 때,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 수 있다. 글쓰기는 무던한 사랑이라면 묵상은 이를 돌보는 손길이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사탄도 부지런해진다. 공교롭게도 이런저런 마음을 섞어버린다. 그러지 못할 것 같은 환경을 만들고 마음에 부담을 뿌린다.

 

상처 난 기억은 그렇게 애지중지 모셔둠으로 곪아간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어 주께 아뢸 때, 하여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그것으로 하나님은 무얼 하실까? 나에게는 ‘묵상으로 글쓰기’가 나의 영혼을 다스린다. 그렇게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 나 같은 게 어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2).” 마치 아무런 티도 없이, 요란한 꽹과리도 아니고,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지도 않으면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3-4).” 이를 증명하는 근거로 오늘의 나는 쓰임을 받는다.

 

누구로 지칭하는 내 곁의 사람들을 두시고 저들의 이런저런 사연이 결국은 나의 ‘따귀 맞은 영혼’을 위로하게 하신다. ‘상처 난 기억’을 싸매시고 치료하신다. 돌아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때에도 내 곁에는 항상 주가 보내신 이들이 있었다.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다(사 63:8-9). 이를 단적으로 연관지어보면, 어릴 때 만난 누구와의 오랜 시간 동안 ‘편지쓰기’는 나의 마음을 위로하였고, 앞서 아버지의 엉뚱한 실험이라 할 수 있는 ‘설교쓰기’는 나에게 영적인 유익이 되었다. 그때는 주일 날 설교를 받아쓰게 하고 이를 서로 나누어서 주일학교 교재로 쓰고 각 구역예배에서 활용하게도 하셨던 것 같다.

 

지난 일들이 우연처럼 그러다 말 줄 알았는데, 나에게 글쓰기란 부지런한 사랑이 되었고 무던한 기다림이 되었으며 언제든, 무슨 말이든 풀어낼 수 있는 속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도 새벽을 깨운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7-8).” 어제 같이 말씀을 나누면서 나에게 이 두 구절의 말씀은 남다른 은혜가 되었다. 언제부터 드는 확신은, 하나님은 나의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신다. 나는 잠들기 전에 무엇을 쓸까, 어떤 말을 소재로 있었던 일을 다룰까? 생각한다. 전날에 읽은 책이나 누구의 이야기나 어떤 어려움이나 서러움도 모두 쓸거리가 되어, 이처럼 주 앞에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묵상하는 논거가 된다. 그러니까 어느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 섰을 때 성도와 성도들이 모여앉아 무슨 말을 주고받을까?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어떤 말로 그에 따른 자신의 경험을 찬양하게 될까?

 

칠순이 다 된 옆 사무실 노인은 무슨 말 끝에는 언제나 서러웠던 자신의 암울한 어린 시절 이야기로 귀결된다. 부모에게 버림당하고 조모 손에 자라며 간신히 기술학교를 나온 그는 그에 따른 향수가 있다. 벌써 몇 년째 동창회 회장직을 놓지 않는다. 저이 말로는 그렇게들 자신을 원한다고 하는데 듣다보면 자신이 즐기는 일이다. 어울려 색소폰도 배우고 지루박이나 탱고도 추면서, 이건 목사님한테만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하고 멋쩍어하시며 어느 중년의 여인과 합을 이뤄 춤을 추는 동영상도 여러 장 보여준 적이 있다. 기억의 상처는 화두다.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는 것처럼 무슨 말만 하면 그때 그 일을 떠올린다. 이는 그만큼 아물지 않았다는 증표다. 나는 생각하기를 개인의 삶에서 기억의 치유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를 회상하고 되새기며 그것으로 삶의 원동력을 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한데 문제는 같이 어울려 누구와 연합하려 할 때 이는 걸림이 된다. 툭, 하고 자존심을 건드리고 앗, 또 수치심을 느낀다. 남은 모르고 자신만 아는 불쾌함이다.

 

하나님의 능력, 말씀은 결코 제한을 받지 않지만 상처 받은 기억으로 인해 굴절되고 와전되어 제멋대로 성경을 받아들이는 신자들도 많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서로의 응대와 고백이 절실한 까닭은 주를 더욱 가까이 하는 데 있어 쌓아둔 감정은 벽이 된다. 길은 이어지지 못하고 벽을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회피하고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듯이 자신의 일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방심하게 된다. 조금은 어려운 진술이지만 나는 ‘아픈 아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할 때 어떤 벽을 느끼는데, 단지 아이의 지능이 떨어지고 어휘력이 부족하며 병적인 요소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남없이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가령 새로 사업장을 꾸몄는데 사업체가 들지 않는다. 전에 동생이 와서 이와 관련된 경험을 말해주며 이런저런 조언을 할 때 그 말을 듣는 저들의 태도는 희한하였다. ‘다 그래요!’ 또는 ‘다 알아요!’ 하는 식이어서, 동생은 돌아서서 나와 잠깐 차를 한 잔 하면서 ‘뭐라 할 말이 없네?’ 하고는 텁텁한 입맛을 가셨다. 그런 식이다. 친구가 코로나 정국을 운운하며 교회를 안 나간 지 꽤 됐다. 손위처남도 확진자 수가 줄지 않으면서 지난 해 12월부터 월에 한 번 오던 예배도 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어머니 모시고 추억의 오장동 냉면을 먹으러 가고, 답답해하시니까 어디 나들이를 모시고는 한다. 친구 또한 그러면서 업무용(?) 골프는 치는 접대를 위해 저들과 식사자리는 마다하지 않는다. 저마다 앞뒤가 다르고 나름의 논리는 자신들만의 판단에 의존한다. 뭐라 하면 ‘다 그래!’ 하는 식이어서 뭐라 더 권할 말이 없다. ‘다음에 할 게!’ 하는데 뭐라 하겠나? 이상하게 예배만, 주를 바라는 일에만,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일에만 느긋한 것이라, 이사야 선지자가 진술한 우려가 이런 게 아닐까?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사 63:10-11).” 우리가 성령으로 근심하게 하는 것은 주의 뜻으로 접근하려 하지 않는 모든 것에서다. 오늘 나에게 두시는 육신의 질병에서부터 이런저런 생활의 분주함이나 여러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대하여도, 그것으로 얼굴을 붉힐 줄은 알면서 어찌 주의 이름을 부를 생각은 못하는지… 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는 다윗의 진술을 나는 사랑한다(시 57:7-8). 어느 굴에 숨어 당장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어찌 저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붙들 수 있었을까? 왜 우리는 저보다 평안하면서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를 바라지 못하는 것일까? 그 원인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정리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물론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의 이런저런 모양의 삶이 어찌 부럽지 않겠으며 상대적으로 서럽지가 않겠나만, 우리의 사명은 하나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데는 오직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시 96:3).” 그러해야 하는데 그저 개인적인 삶으로 괜찮다, 다들 그러고 산다 하면 스스로 안위하는 일이었으니.

 

아,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5-7).” 오늘 우리의 이 진귀한 사명을 거역할 수 없다. 외면하는 동안의 고단한 삶에 대하여는 오롯이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할밖에.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의 가르침도 그러하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4, 6-7).”

 

부디 우리의 남은 날들이 주를 바람으로,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시 96:1).” 곧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