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59편 / 저주와 탄원의 차이

전봉석 2021. 7. 16. 09:51

210718 주일

 

시편 59편

저주와 탄원의 차이

 

 

시 59:15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시 59: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59: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들어가는 말

 

저주와 탄원은 한끝차이다. 내가 하느냐, 주께 맡기느냐의 문제다. 칼빈은 시편을 <영혼의 해부도>라고 하였다. 우리 속에는 다들 엄청난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저마다 생각하는 것들을 끄집어내고 드러내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마 서로가 흉악스러워서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 시편 59편은 탄원 시다. 전 주에 나누었던 58편은 저주 시였다. 109편과 137편을 한데 놓아 저주 시라 한다. 탄원과 저주는 ‘누구에게 구하느냐’의 문제다. 스스로 자신에게 구하면 저주가 되고, 주께 아뢰면 탄원이 된다. 가령 시편 109편을 보자. 다윗은 자신을 괴롭히는 악인들에 대하여,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6).” 또는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아뢴다(7, 9).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그 내용은 끔찍하다.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10).” 이걸 말로다 옮기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다. 아예,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13).” 하는 내용 앞에서는 공연히 낯이 뜨거워진다. 그런데 과연 우리 속엔 내심 이와 같은 마음들이 없을까?

 

어떻게 이런 내용을 성경에 수록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하다가도 솔직히 우리 안에도 그와 다를 바 없는 마음들이 곳곳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자신들은 안다. 누구를 향해, 죽여 버리고 싶은 미움의 마음에서부터, 반드시 보복을 다지는 마음과 그것 때문에도 악착같이 사는 경우도 많다. 가난이 한이 돼서 재벌이 된 이도 있고, 누구보다 못할까봐 기를 쓰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소위 ‘막장 드라마’라 하는 TV 내용들을 보며 다들 욕을 하면서도 대리만족을 느낀다. 차마 현실에서 못하는 보복을 감행하고, 기어이 잔인하게 복수하는 장면에서는 통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는 더 잔인하게, 더 말도 안 되게(실은 상상만으로도 시원한) 응징하는 것이 잘 팔린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성경에서 보면 괜히 머쓱한 마음이 든다. 그러면서도 실은 우리 안에 그와 다를 바 없는 억울함과 분함, 원망과 노여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럼 이를 어찌 해결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하다. 실제로 자신이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다. 보복을 하든, 저주를 하든 받은 대로 갚아주는 것이다. 이를 실행으로 옮겨서 실제 범법자가 되는 경우들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서 참는다. 참다 참다 자신의 속이 문드러져 화병이 나는 한이 있어도, 어쩌겠나? 그렇다고 정말로 복수를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대부분 그러고 산다. 그래서 평소 순하던 사람이 화가 나면 무섭다는 게 그게 다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해서다. 한데 이 둘은 동일하게 저주가 된다. 자신이 직접 범죄를 저지르든지, 이를 눌러 참아서 감정으로 쌓아두고 살든지, 그것으로 사람이 악해지고 주를 멀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둘은 동일하게 저주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오늘 본문에서는 이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만이 저주가 아닌 탄원이 된다는 원리를 가르쳐준다. 저주와 탄원은 그처럼 한 끝 차이다. 내가 알아서 하느냐, 주께 내어놓느냐, 실제 이를 주께 아뢰고 맡기는 일은 우리 의지로는 어렵다. 해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처럼 주 앞에 나아와 주께 아뢸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우리야말로 주께 못할 말이 어디 있겠나?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노여움이 실은 찬송이 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인생을 살면서 어찌 분을 내지 않을 수 있겠나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본문 이해

 

본 시편 59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10여 년의 도피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죽이려고 자객들을 보냈을 때 쓴 시이다(삼상 19:8-17). 본문을 잠깐 분해하면, 1-5절은 자신의 무고함을 주께 알린다. 6-10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실상을 아뢴다. 11-13절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보응을 구한다. 마지막 14-17절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며 구원의 노래로 찬송한다. 여기서 우리의 노여움이 어떻게 찬송이 되는지를 알게 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분명한 증거를 마주할 수 있다. 실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주의가 아니라, 뿌리 깊은 감정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이 뿌리 내린 감정들은 사사건건 은혜를 훼방하고 기도를 방해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가 확신해야 할 열 가지 능력>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다.

 

첫째, 기도는 믿는 자의 최대 능력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시 59:1).”

 

다윗은 고난을 통해 기도를 연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곧 기도는 훈련으로 연단된다. 묵상(meditaion)의 어원은 리허설(rehearsal)이다. 이는 공연을 앞두고 실제처럼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아직 본 공연이 시작된 게 아니다. 나이 들고 병들어 곧 죽음을 맞이하면 모든 게 끝난 것 같지만 이제 드디어 우리의 영생은 시작된다. 이를 간간히 맛보아 아는 리허설을 하는 것이 묵상이다. 그렇게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롬 12:12-13).” 써야 한다. 이는 우리가 들어가 누릴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다. 기도가 안 된다느니, 별로 할 말이 없다느니 하는 사람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내가 속으로 저주를 도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둘째, 우리의 의로운 생활이 기도의 능력을 더한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시 59:2).”

 

기도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해야 할뿐 아니라 기도의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이는 경건의 훈련으로 무엇보다 선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믿는 자로서 안 믿는 자와의 구별은 의식의 문제가 아닌 실천의 문제다. 의식적으로라도 의로운 생활을 추구할 때,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기도의 능력은 쌓인다. 가령 누구에게 악한 감정을 지닌 채는 기도가 안 된다. 노여움을 주께 내어놓으면 기도가 되고, 노여움을 그대로 품고 살면 저주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이를 알면 우리는 더욱 하나님과 화목하려 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어찌 화목할 수 있을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지난 날 자신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이 어찌 행하셨는지를, 서로 고백하여야 한다. 곧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5-16).” 그렇게 우리의 기도는 능력이 배가 된다.

 

셋째, 부당함에는 맞서야 믿음의 능력이 강해진다.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시 59:3).”

 

참는 게 무조건 능사는 아니다. 불의에 맞서 분을 낼 줄 알아야 한다. 아닌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늘 고약한 원수는 가족 중에 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저를 뭐라 하냐하면 애물단지라 한다. ‘애물’은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이다. 여기에 부사 ‘단지’를 덧붙여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에 집중하는 것을 일컫는다. 너무 사랑하다보니, 저를 위해서는 하나님도 버리고 교회도 멀리하는 것이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우리는 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어야 한다. 그것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넷째, 교회 안에서의 불의는 불신자와 다를 게 없다.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시 59:5).”

 

교회를 나름의 속셈으로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추구하려는 순수한 마음에서부터 사업을 좀 더 확장하려고, 또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쯤으로 말이다. 이는 모두 장사치 같은 속셈이다. 꿍꿍이가 있어 예수 앞에 모여들었던 군중들과 같다. 이를 엄히 꾸짖으시며,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 21:13-14).” 우리 안에 불의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교회를 다니는 경우는 없는가?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 앞에 서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을 부정하는 죄는 반드시 정죄함을 받는다.

“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시 59:7).”

 

대놓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시시비비를 가릴 게 없다. 저들은 그저 그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8-32).” 거론의 여지가 없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여섯째, 악한 입술은 영혼을 죽이는 칼이 된다.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시 59:8).”

 

흔히 호언장담을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심지어 이를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맹세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 옳다 여기는 한 교회 안에서도 그런 신자는 ‘신경증적인 완벽주의자’가 된다. 자신이 옳다. 저들에게 성경은 별로 와 닿지가 않는다. 남의 간증도 공감이 안 된다. 다만 자신이 아는 길로만 간다. 그럴 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20).”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스스로 자기 입을 막아야 한다.

 

일곱째,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는 성도는 비웃음거리가 된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시 59:9-10).”

 

우리는 저마다 사연이 있다. 다들 자기 이야기를 가졌다. 서로 기도를 부탁하려면 그 사연을 말해야 한다. 이를 말할 줄 모르면 기도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 누구의 중보기도가 귀한 줄을 모른다. 자신이 해야 하는 도고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른다. 어리석은 우리를 지혜가 부른다. 말씀이 부른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0-22).” 미련함은 맷돌에 넣고 돌려도 깨지지 않는다.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그래서 미련한 자는 결국 맞아야 말을 듣는다.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26:3).” 이는 하나님을 나타낼 줄 모르는 자의 결국이다.

 

여덟째, 하나님의 심판은 주의 자녀들을 위해 유보상태이다.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시 59:11).”

 

종말론을 운운하며 세상 끝 날을 말하곤 하는데 주님의 재림은 더딘 것이 아니라, 먼저는 주의 자녀들을 돌이키게 하려 하심이고 또한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나게 하시기까지 참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명망을 위한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아홉째, 죄인들의 죄는 자신들의 입의 말로 사로잡힐 것이다.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셀라)(시 59:12-13).”

 

세 치 혀가 늘 문제다. 이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롬 3:13).” 어찌 감당이 어렵다. 이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그러므로 세상의 말에 너무 연연해할 게 아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열 번째, 우리의 구원은 주의 자녀를 향하신 인자하심으로 증명된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 59:16).”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가 없다. 경건한 자는 이를 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이와 같은 찬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려면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 우리는 우리 죄를 자복한다. 그럴 때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고 이를 간증하게 된다.

 

나오는 말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오늘 시편에서 우리는 저주와 탄원-기도가 아주 밀접하게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명심하자. 기도는 우리의 능력이다. 이를 위해 의로운 생활을 추구하고, 부당함에 맞서며, 특히 교회 안의 불의를 물리친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과 어떤 일도 도모하지 않으며, 우리 입에 파수꾼을 세운다. 주의 심판이 다가온다. 이에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는 찬송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