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58편 / 의인에게 갚음이 있다

전봉석 2021. 7. 2. 08:18

210704 주일

 

시편 58편

의인에게 갚음이 있다

 

 

들어가는 말

어떤 원통함이나 서러운 기억은 평생 간다. 그것으로 살며 생을 저주하기도 한다. 욥은 극한 고통에서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욥 24:20).” 하고 자신을 두고 말하였다. 그렇게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23:2).”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3).”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 주를 바란다.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24:23).” 하는 놀라운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오늘 시편은 다윗의 저주 시다. 저의 저주 시로는 58편과 109편과 137편이 있다. 생이 얼마나 고달픈지,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우리의 탄식은 정당하다. 그것으로 “나는 기도할 뿐이라(109:4).” 역시, 믿음으로 이를 감내한다. 그리고 주께 아뢰기를,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14-15).” 하며 주께 토로한다. 곧 하나님이 기억하심이다. 우리는 다만, 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37:1).” 주의 나라를 생각하며 운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 원통할 따름이다. 이를 못 이겨 어느 훗날 과거를 폭로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다 지난 일인데…’ 하고 넘길 수만은 없다. 슬픔은 사무쳐 우리의 기질이 되고 성향이 된다. 자신의 생을 지배하고 남의 생을 억압한다.

 

실제 우리의 기억을 관장하는 뇌는 놀라울 따름이다. 뇌는 심장과 폐와 더불어 우리의 신체기관 중에 가장 복잡하다. 그리고 뇌는 다른 장기와 달리 대체가 불가능하다. 뇌는 총 130억 개 이상의 신경세포로 구성되었고, 각기 신경세포 하나하나마다 5천개의 또 다른 신경들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것은 5만개의 신경세포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는 은하계의 별들보다 많은 숫자다. 우리의 모든 신체기관은 뇌에 정보를 저장한다. 뇌는 이를 수집하여 몸을 가눈다. 가령 통증을 느끼는 감각만도 4백만 개라고 한다. 만지고, 누르고, 주무르며 느끼는데 사용되는 세포가 50만개이고, 온도를 감지하는 것도 20만개의 기관이 소요된다. 여기에 눈, 코, 혀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욱 상상을 초월한다. 고작 1.4킬로그램 무게의 뇌에 우리의 기억이 어떻게 저장되었다가 방어하거나 확대 재생산하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본문 이해

오늘 시편 58편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저주 시(58, 109, 137) 가운데 하나다. 비탄 시와 유사한 형식을 가진다. 불의와 고난에 대한 탄식으로 하나님의 보응을 간구하는 것이다. 저주 시는 특히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고 축복과 심판을 시행하시는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선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바란다. 오늘 우리는 시편에서 여섯 가지의 신앙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이 땅에서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이다.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1).”

 

일련의 사회 사건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위정자들을 보면 일반인의 상식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저들이 생각하는 공정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다른 것 같다. 이를 성경은 엄히 지적한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시 82:2).” 물론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우리 헌법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허울 좋은 말뿐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세상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되었다. 그로 인하여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하여도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에게 관심이 있으시다. 결국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사 46:1).” 벨은 바벨론의 ‘주’다. 저들의 신 느보는 학문의 신이다. 결국 저들이 중히 여기는 것과 그 권세는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과 같을 뿐이다. 이 모든 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신다.

 

둘째, 우리는 악한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2).”

 

하면 저들의 부당함을 두고 우리의 행함을 돌아보아야 한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저들도 저들 때에 두시는 것은 우리를 위하심이다. 스스로 삼가 우리 마음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시는 것은 괜한 억울함과 분함으로 마음이 쓸려 다니지 말아야 한다. 누구도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기억은 마음을 건드리고 마음은 감정을 충동해 불시에 욱, 하고 화를 발한다. 그 중심에는 악이 있다. 악한 마음은 기억이 폭력이 된다.

 

셋째, 우리 기억의 본성은 악함으로 성령이 다스리셔야 한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3).”

 

성경은 누누이 우리의 악함을 지적하신다. 사람은 나기 전부터 악하였다. 내재된 기억은 아담에까지 닿아 하나님을 거역하는 본능을 물려주었다. 우리에게 내장된 죄의 기억은 자신을 숨기고, 그때마다 안 그런 척, 누구보다는 나은 척, 자신을 괜찮은 줄 안다. 그러다 누가 건드리면 졸지에 원수가 된다. 하여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그저 자연스러웠던 기억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 평안을 잠시 맛보았던 인류는 아담뿐이다. 우리는 실제 괜찮은 게 뭔지 모른다. 그래서 서로의 관심과 친밀함을 부담으로 여긴다. 하나님의 사랑을 책무로 받는다. 의무적인 자아만 있고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만족함은 알지 못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도 자신의 자신됨을 비관하였다. 우리는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두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그러니 길은 하나다. 이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성령뿐이시다. 우리가 아는 심리학은 해답과 오류를 동시에 지녔고, 성공과 실패를 반반식 제시할 뿐이다. 해결책이 아닌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나의 악은 성령이 다스리셔야 한다.

 

넷째,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기 속에 악을 배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4-5).”

 

뱀은 사탄을 상징한다. 악은 사탄의 결과다. 어떤 통제도 받지 않는다. 기독교는 수련과 연마로 ‘해탈’을 이루고 그 어떤 깨우침으로 ‘득도’를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굳이 따지면 해탈과 득도는 불교용어다. 해탈은 모든 번뇌와 얽매임에서 풀려나 더는 미혹의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고, 득도는 그 미혹의 세계를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성경은 단언하시길,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렘 6:10).” 즉 말씀을 듣지 않으면 답이 없다. 들음으로 믿음도 주신다. 이에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11).” 곧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이를 본다. 다들,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슥 7:11-12).” 다들 그러고 살아도 우리는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인다.

 

다섯째,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는 유혹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6-8).”

 

그럼에도 스스로 자기 힘을 의지하면, 이는 ‘젊은 사자의 어금니’와 같이 드세다. 도무지 꺾을 수가 없다. 이에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실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실 것이다. 곧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기 힘을 의지하려 하는 헛된 수고를 당장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 같이 허망할 따름이다. 이는 ‘햇빛을 보지 못함 같’은 것이어서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7).” 하나님이 치리하시고 다스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잠 25:6-7).” 곧 지혜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고로 자기 힘을 의지하려는 유혹을 이겨낸다.

 

여섯째, 우리 삶의 속박과 결박은 죄의 특성이다.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9).”

 

결국 오늘의 문제는 어제의 결과다. 우리가 선택한 일이다. 마치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달구고 생나무도 불붙은 나무도 강한 바람에 휩쓸려 갈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기를 쓰고 수고하고 애쓴들, 우리 삶의 속박을 스스로 풀 수 없다. 자기 기억을 당해낼 수 없다.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면 결국 자신이 묶인다. 보복 운전이니 억울함을 호소하며 벌이는 소송이니 하는 것으로 평생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오죽하니 그럴까만,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그렇게 인생은 지고 삶은 무너진다. 부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 땅에서의 원통함을 풀려하는 것도 헛되다. 이에 오늘 다윗은,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0-11).” 쫓기고 숨고 도망다니면서 저는 이미 저들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훗날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르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나오는 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오늘이라는 이 한 날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무엇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부당한 권력도 하나님이 세우신다. 바로도 바로의 때에 바로로 쓰시기 위해 세우셨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는 드러나는 것이다. 반드시 주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계명으로나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다. 자기 수고와 노력으로 애써 이룰 수 있는 구원은 없다. 은혜밖에는 믿음이 없고 믿음이 아니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이를 알면,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하는 말씀으로도 우리는 충만하다. ‘이미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는 말씀이 우리 영혼을 붙드시기를 기도하며.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