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25 주일
시편 60편
믿음으로 걸어가는 길
들어가는 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요셉은 자신의 과거를 용서했다. 지난날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고 억울하기까지 하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남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저의 영혼을 놓고 애통해한다. 물론 어떤 이야기에서 막힌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아무리 기도하고 주의 뜻을 알려 해도 점점 더 인생은 꼬여가듯 악화일로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그런 가운데서 어찌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뢰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우린 결국 지나간 날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고 회복해야 한다. 이생에서는 과거로밖에는 주의 은혜를 알 길이 없다.
펄벅은 여성 최초로 <대지>를 통해 노벨문학상을 탔다. 생후 3개월에 펄은 선교사인 아버지 압살룸 시던스트라이커를 좇아 중국으로 갔다. 그녀는 중국에서 성장하고 남북전쟁의 잔해가 아직 가시지 않은 웨스트 버지니아로 돌아왔다. 농부인 로싱 벅과 결혼하여 딸 캐롤를 날았다. 한데 저 아이는 자폐아였고, 남편의 무관심과 딸애의 정신질환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훗날 저는 딸애를 생각하며 쓴 <자라지 않는 아이>에서 고백하기를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살았는데 자폐 딸 캐롤의 영향으로 ‘사람의 존엄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사랑하지 못하면 남의 이야기를 사랑하지 못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는 주의 말씀은 결국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 하시는 데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이야기를 사랑함으로 어느 훗날 우리는 주의 나라에서 주와 얼굴을 마주하고 섰을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생에 사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난날의 이야기로만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의 이야기, 이해할 수 없는 형들의 소행과 억울함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형들을 용서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우린 과거와 미래에 ‘낀 시간’을 산다. 과거의 은혜로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미래로 나아간다. 우리 인생은 이생으로 끝이 아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애가다. 슬픔의 노래다. 그러나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주를 찬송하게 한다. 욥도 다니엘도 다윗도 모세도 아브라함도… 저들은 자신들의 지난날을 딛고, 그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의 증거가 된다.
본문이해
오늘 시는 다윗이 민족에 대한 애가의 시다. 슬픔의 노래다. 다윗이 아람군과 에돔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지은 시이다(삼하 8장, 18장). 본 시편 60편, 1-5절은 에돔의 공격으로 하나님의 선민이 처한 국가적 위기를 하나님께 호소한다. 6-8절은 민족의 승리와 구원의 근거를 자신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강조함으로 상기한다. 이어서 9-11절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곧 승리를 보장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12절에서는 그리하여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결연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출병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과 같은 우리 인생 여정을 <일곱 가지의 결연한 자세>로 승리할 수 있음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인생의 성공 여부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달렸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시 60:1).”
앞서도 말했듯이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가 생각했던 인생이 아닐 때가 더 많다. 종종 하나님은 고장 난 내비게이션처럼 엉뚱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 같다. 펄벅의 이야기와 달리, 한 여인이 있었다. 저이는 어릴 때부터 신앙이 좋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전신마비였다. 의료사고냐 천성적인 기형이냐를 놓고 법적공방을 벌였지만 무의미한 일이었다. 저이는 주께 아뢰고 또 기도했다. 부디 아이만 정상으로 자랄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도 걸 수 있었다. 몇 년을 한결같이 새벽예배를 나가고 눈물로 아뢰어도 아이는 여전히 전신마비였다. 저이는 결국 교회를 떠났다. 하나님을 버렸다. 둘째로 태어난 아이는 언니의 몫까지 다하느라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기까지 헛돈다. C. S. 루이스는 <헤아려본 슬픔>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뜻을 바꾸기 위함이다.'
둘째, 무너진 삶의 회복은 회개뿐이다.
결국 오늘 1절의 요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흩으시겠나? 왜 분노하시겠나? 저기 먼 옛날, 사람은 에덴에서 쫓겨나고 홍수로 모든 인류가 멸망을 당하고도 다시 모여 하나님과 맞섰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3-4).” 곧 우리 안의 죄성은 하나님과 맞선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9).” 여기에 답이 있다. 우리의 회복은 회개뿐이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셋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평안을 얻지 못한다.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시 60:2-3).”
목사가 되고 나는 자주 누구의 사연을 듣는 게 일이다. 저마다 멀쩡한 속은 없다. 마음은 곯았고 영혼은 상한 심령이다. 이를 덮어두고 겉으로만 쉬쉬하고 살고 있으니 그 안에 평안이 없다. 스스로의 포도주로 위안을 삼을까?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신 28:67).” 사는 게 다들 즐겁지가 않다. 애써 즐거움을 찾지만 잠시뿐, 곧 다시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사 57:20).” 결국은 자신의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에 대한, 어떤 일에 대한, 흔히 억하심정이라 하여 도대체 무슨 마음인지 알지 못하는 마음 속의 마음으로 신음하며 산다. 이에 회개는 용서를 낳고 용서는 주의 사랑을 확신함으로 평안을 얻는다.
넷째, 승리하는 삶은 주를 경외함으로만 가능하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시 60:4-5).”
예전의 나와 화해해야 한다. 주를 경외함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의 자유함에 대하여,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곧 우리 개인의 지나침이 자기 의다. 지나치게 의로우려 하는 사람이나 지나치게 악하려고 하는 사람이 똑같다. 지나치다함은 주를 인정하지 못한 자기 선택의 결정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주를 인정할 때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의 고백은 달라진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9-11).”
다섯째, 우리의 지난날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하심이다.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시 60:6).”
기도의 성장과정은 자신의 요구를 구하다 남의 사정을 아뢰는 중보기도로 나아간다. 다른 사람의 일로 기도하는 중보는 어느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고기도로 성숙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우리의 요구를 구하다 이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미하는 도고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전히 기복적인 기도에 머무는 신자는 자신도 모르게 지난날에 머문다. 가난이 억울해서, 못 배운 게 억울해서, 악착 같이 열심히 산 지나침을 성경은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
여섯째, 하나님의 침묵은 사람의 구원이 헛됨을 알게 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시 60:10-11).”
구하고, 찾고, 두드려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시는 기도는 어째서일까?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또는 발람의 기도처럼 들어주셨다 해서 그게 과연 복일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결론은 성령이었다. 우리의 구함은 최종적으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구하여야 한다. 아니면?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이에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어떻게 얼마나 기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구하느냐의 문제다.
일곱째, 지난날의 은혜를 묵상하는 것이 전진하는 데 유익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 60:12).”
돌아보아 자신의 지난날 동안에 아무런 감동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그 영혼은 황폐하다. 은혜가 큰 사람은 자신의 죄로 무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죄를 더할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우리는 우리 죄성의 끔찍함을 잘 안다. 나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하물며 내가 누구를 비판하겠나? 그런데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 자신의 죄인됨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죄를 멀리한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기까지 하셨다! 이에 지난날을 묵상하는 일은 우리로 전진하게 한다.
나오는 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거기서 내게 임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겔 3:22).”
톨스토이의 물음처럼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37:1).” 아무리 지난날 나의 이야기는 슬프고 아픔뿐이라 해도, 앞날은 막막하고 절망적이라 해도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우리는 주의 권능으로 산다. 때론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시달린다 해도, 아이러니하지만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우리의 노여움이 주를 찬송하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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