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27 주일
시편 57편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57: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들어가는 말
누구나 자기 인생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못마땅해들 한다. 그러니 ‘~하였더라면’ 하는 식으로 가정문에 아쉬움을 달랜다.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건강한 몸을 가졌더라면, 부모가 좀 어떠했더라면 하는 식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가정문을 가지고 산다. 그러다 뜬금없게도 ‘다음 세상에서’는 하는 식으로 ‘~으로 태어날 거야!’ 하고 단정하며 스스로의 이야기를 확장한다. 이는 모두 오늘 자신의 이야기가 못마땅한 것이다.
성경은 일러 아주 오래 전, 이 땅이 생기기도 전에,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쓰였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우리의 이야기가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곧 자기 이야기에 불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기를 싫어한다는 소리다.
결국 우리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원저자의 의도를 알고 믿는 것이다. 저를 믿고 사랑하면 나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원저자의 의도를 기뻐하고 경외하면 누구라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얼마나 소중했는지, 어떤 의도였는지, 더는 가정문 따위로 자신의 인생을 흔들어대지 않는다.
오늘 본문도 다윗의 비탄 시이다. 비탄이란 ‘슬픔에 젖어 탄식하는 일’이다. 믿는 사람이라고 슬픔이 없고 탄식이 없겠나? 인생은 죄로 인해 한탄과 후회뿐이다. 믿는 자라고 슬픔과 고통이 왜 따르지 않겠나? 한데 오늘도 다윗의 이야기에서 저의 슬픔이 저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고, 저의 위기가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는 저의 확신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길 바라며.
시적배경
시편 57편도 다윗의 비탄 시다.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며 지은 10편의 시 가운데 하나다. 앞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것이 아둘람 동굴(삼상 22:1-2)에서인지, 사해 가까이 위치한 엔게디 동굴(23:29-24:22)에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데 더 극한 위기에 처했던 엔게디 동굴에서의 시편이 아닐까 추론할 수는 있다. 시의 구성은 다윗의 특성대로 하나님께 호소하고(1-2절), 그것으로 소망을 회복하고(3-6절), 이에 확신함하며 주를 찬양하는(7-11절) 전형적인 고유의 시적 운율을 따르고 있다.
본문이해
첫째,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절).”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힘들 때 주를 찾는다. 아플 때 손이 가듯 어려움이 닥쳐야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래서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곧 우리의 환난은 값진 것이 된다. 그리하여 소망을 주께 더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신다(사 63:9). 이와 같은 은혜는 우리가 이룬 게 아니다. 어떤 노력이나 열심에 따른 결과도 아니다. 오롯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둘째,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할 줄 아는 사람이 복되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9-11).” 이는 모세의 시편이다.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사람들의 사는 방식에 따라가지 않는다. 곧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남들 다 그러고 사는데, 하는 말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다. 다들 그래도 나는 아니다. 남들 다 그러고 산다 해도 우리는 아니다. 사람을 보면 그리스도인은 넘어진다. 우리는 남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주의 날개 그들 아래로 숨을 줄 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이루신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2).”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저마다 기구하고 처절한 삶의 이야기를 가졌다 해도 우리의 회상은 저들과 다르다.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65:9).” 이와 같은 고백이 자신의 이야기로 쓰인다면 이보다 복된 삶은 없다. 곧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우리 이야기를 좋아하신다. 그렇게까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넷째,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로 우리의 구원은 보장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시 57:3).” 마치 우리가 열심히 벌고 쌓고 능력껏 살아야 성공하는 삶인 줄 아는데, 이는 성경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리의 성공적인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곧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106:4-5).” 그러니까 우리의 자랑은 주의 유산이다. 주가 물려주시는 유산이 무언가? 말씀이다. 성경으로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우리 생의 키워드는 오직 하나다.
다섯째, 찬양은 인생의 절망과 좌절을 푸는 열쇠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시 57:4).” 믿는 사람이라고 슬픔이 없겠나? 오히려 안 믿는 자들보다 더 힘들 때가 많다. 그러나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우리는 죽은 줄 알았는데 산 자들이다. 전에는 우리도 진노의 자식들이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 극복은 찬양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다.
여섯째, 하나님은 고난 받는 우리에게 통쾌한 승리로 보답하신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시 57:5-6).” 당장의 이런저런 일로 희비가 엇갈리곤 한다. 하지만 모두 일시적이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시 44:5).” 우리에게는 남모를 확신이 있다.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가 이기는 싸움이다.
일곱째, 확고한 믿음은 환난 중에도 노래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7).” 확정되었다는 것은 고정되었다는 것이다. 고정되었다는 것은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자들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 곧 우리 마음의 확정은 단순한 결의가 아니다. 결연한 자세나 의지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는 하나님이 포기할 수 없는 확정이다.
여덟째, 우리는 근심의 잠을 자는 사람들을 깨워야 한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8).” 우리의 사명은 함께 하게 하시는 이들을 일깨우는 사람들이다. 저들과 같이 아파하고 같이 슬퍼하되 같이 낙심하거나 같이 좌절하지는 않는다. 물론 내 코가 석 자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로 살아가는 사람들 같다. 그러나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우리가 주께 속량을 받았다는 것은 내게 두시는 한 영혼으로 아파할 줄 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아홉째, 우리의 믿음이 남은 이야기를 공동으로 써나간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9).” 실제 우리의 시작은 우리가 아는 그 이전부터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아버지를 거처 아담과 하나님의 창조 역사 이전의 이야기에까지 다다라야 한다. 이를 우리는 성경으로 마주한다. 그럴 때 이제 이 땅에서의 남은 이야기는 우리도 하나님과 공동저자로 같이 써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참여를 기뻐하신다. 이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이 땅에서의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다. 두고 가야 할 것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다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이를 알면 알수록 자신의 남은 이야기에 소홀할 수 없다. 죽음으로 결말이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인 이야기다.
열 번째,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인자와 진리의 은택을 입었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0-11).” 우리 이야기의 주제는 하나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곧 오늘도 이 땅에 하루 더 우리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이를 전하여 모두에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면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실 것이다.
나오는 말
손명희는 태어나면서 의사의 부주의로 소뇌를 손상하였다. 저가 아이를 받을 때 뇌를 집어서 당기는 데 뇌의 손상이 가해진 것이다. 그로인해 태어나면서부터 제 몸을 가눌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이 일로 부친은 술로 인생을 보냈고, 모친은 병약한 몸으로 인해 전신마비인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저는 일어나 앉지도 못했고 제대로 된 보살핌도 받지 못하며 자랐다. 저는 자신을 그리 만든 의사와 무능한 부모와 무책임한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열여섯 살 되던 해에 극심한 절망 가운데서 극단적인 생각을 하다 ‘특이한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이 자신을 특별하게 사랑하셨다는 확신이 그의 마음에 들어온 것인데, 이는 말씀으로였다. 저가 펼쳐 읽은 내용 가운데,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하는 예수님의 기도에서였다. 이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5).” 손명희는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 하시는 말씀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뒤틀린 몸을 흔들거리며 왼손에 몽당연필를 쥐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손수 써내려갔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앞서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썼다고, 그와 같은 원저자를 원망하고 불평하던 마음이 주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하는 오늘 다윗이 자신이 쓰는 인생 이야기처럼 우리도 우리의 인생 이야기에 공동저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역시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동역자가 되고 공동저술을 하는 자기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곧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7-9).” 하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남은 인생의 이야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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