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3:18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 143:8
우리는 우리의 약함으로 산다. 주를 바람은 약한 데서 나온다. 주 없이 살 수 없는 처지가 복이다. 이로 서러워 때론 눈물짓지만 그리하여 주를 바란다. 공교롭게도 우리의 약함 그 부족함으로 온전함을 잃지 않는다. 가령 질투가 없이 어찌 사랑을 하겠으며, 허기지지 않는 마음으로 어찌 누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 부정한 것으로 선을 이루신다. 누구를 사랑하는 일이 자신의 약함으로 가능하다는 데 놀란다. 누가 주를 바라는 마음이 주 없이 살 수 없는 고달픈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데 기이할 따름이다. 시기하는 마음은 엄연히 부정적이나,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의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라(잠 3:31).” 이로써 자신의 실체도 아는 일이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4:4).”
이를 알아 주 앞에 엎드려 주를 바람이여,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아니면 살 수가 없는 허기짐을 가지고,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 143:8).” 말씀 앞에 가만히 엎드려서 내 앞에 두신 생의 참 소원을 응시한다.
그러할 때 주는 그 사랑하심으로 나를 일깨우신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겔 16:60).” 먼저는 주의 언약이고 다음은 용서이면 그 다음에야 기억함으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일이다.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62-63).” 이 모든 것들이 질투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이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 2:23).”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까지 우리의 약함이 우리로 온전한 길로 인도하심이었다. 각자의 어려운 처지와 그 사정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선뜻 말할 수 없는 그러한 심정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이었으니,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 62:1, 8).
누구에게 글쓰기를 설명할 때 우리의 보고, 듣고, 느낌이 곧 모든 글의 글감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주의 재림의 때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날을 고대하는 심령이 귀한 것이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글을 마무리하며 이를 강조하고 있었다. 곧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에이, 설마’ 하는 때에 주의 날이 임할 것이다. 그럴 때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하고 묻는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1-12).” 이는 곧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일이겠으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 그것으로 주 앞에 내 마음을 토로한다. 시시로 주를 의지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이 나의 연약함으로였다. 강한 데서 온전하여짐이 아니라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었다.
어떤 불안으로 또는 서러움으로 주를 바라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 놀라운 진리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곧 내가 두려워할 줄 아는 나의 두려움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바랄 수 있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이러한 나로 말미암아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는 거였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 147:11).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순간, 어떤 서러움이나 모자람을 두고 주께 감사한다. 누구를 생각하다 울컥, 치미는 어떤 감정을 슬퍼하는가 하였는데 저가 천국에서 오늘도 주와 함께 나를 응원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다 웃음 짓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오늘 나에게 두신 이 모든 상황을, 그 존재의 뿌리를 찬양하는 일이었다. 이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내 곁에 두신 누구, 어느 한 영혼으로 꽉 찬 마음은 그때마다 주를 바라게 하시려는 것이었으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5-16).
우리에게 두신 이와 같은 사명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강함에서가 아니라 약한 데서였고, 나의 약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다 비로소 저를 돌아보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이에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곧 나의 약하고 사소하고 부족함으로 주의 권능을 바라는 일이었다. 주는 충분히 우리를 도우시는 이시니,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그러므로 시편은 저가 누구이신가를 알게 한다. 저는 나의 왕이시다.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47:7-8).” 나를 위해 싸우시는 용사이시다. “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18:14-15).” 오늘의 이런저런 사태가 외치는 듯하다. 마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주둔하며 텔레반을 몰아낼 것처럼 하더니… 그러는 동안 수천 명의 자국 군인이 죽었고, 수천조 원을 쏟아 붓고도 부랴부랴 철수를 하는 실정을 본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호언장담한들 우리의 기초는 주가 우리의 산성이 되심이었으니,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31:2).” 참 지혜는 약한 데서 저의 소리치는 데 주목하는 일이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잠 1:20-22).
일련의 사태와 여러 정황이 우리의 이야기의 소재다.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의 사소함보다 더 큰 외침은 없었다. 이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23).” 지혜는 외쳐 오늘도 무던히 참고 또 기다리시는 주를 보게 한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도 그게 요점이 아닐까?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런 것을, 그저 하루 더 미루며 어찌 더 악착 같이 살아보겠다고 제 힘을 의지하는 꼴이었으니.
오후께 혼자 집에 있으면서 나는 나의 약함으로 주를 바라였다. 누가 그런 나를 두고 눈물로 기도하고 주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그의 기도의 값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새삼 감격스러워하면서. 주가 나의 요새이시고 피난처이신 것을 안도하였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아등바등, 내가 어찌 해보려는 모든 조바심을 멈춘다. 걱정과 염려로 주의 이름을 되뇐다. 곧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11).”
참 희한한 일 하나, 두려움을 없이 하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바라고 주의 사랑을 구하는 마음도 줄어든다. 스스로 회피하고 은폐하고 괜찮은 척, 하는 동안에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 수가 없다. 차라리 그 두려움에 마음을 맡길 때 하나님의 선하심은 선명하여진다. 결국 세상을 두려워하는 일은 자신의 뜻이 좌절되었다는 것인데, 비로소 그와 같은 좌절로 인하여 주의 선하심을 바라게도 된다. 이와 같은 역설은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정세에서도 또는 우리 사회의 반목과 나름의 주장으로 굽힐 줄 모르는 저마다의 아집을 지켜보면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으로 자기 이야기를 쓴다.’ 오늘을 산다는 것은 주께서 쓰신 나의 이야기에 참여하고 동역하고 주의 뜻에 합심하는 것이었다. 일심으로, 오직 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그럴 수 있는 힘과 용기와 다시 일어서는 하루가 되었으니,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시 143:10-11).
오늘도 이와 같이 시편의 기도가 나의 것이 되게 하심은, 나의 약한 데서 온전하게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그 말씀이 아니겠나?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하여 “…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그러므로 오직 주께만 의뢰하고,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18).” 아멘.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5-6, 8,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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