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2 주일
시편 62편 ②
마음을 토하라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 62: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62: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시 62: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들어가는 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지난 번 말씀에 이어 시편 62편을 한 번 더 다루게 되는 것은, 우리는 누가 뭐래도 감정의 지배를 받고 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오늘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먼저 언급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감정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행함으로다. 이때의 행함은 너무 포괄적이다. 자기만족으로 행할 수도 있다. 이에 베드로는 ‘믿음에 덕을’ 하고 제한한다. 덕은 ‘남을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의 인격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남을 위하는 것으로 선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어서 ‘덕에 지식을’ 더한다. 여기서의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과 비례한다. 이 두려움은 경외심이다. 곧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곧 우리가 안다, 지식을 더한다 할 때, 지혜자는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잠 5:2).”고 하였다. 근신이란 세상과 경계를 두는 일이다. 안 믿는 자들의 충동에 섞이지 않는다. 곧 우리 안의 탐심, 탐욕은 섞여 있는 무리들로 인함이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은 세상과 같이 정죄함, 멸망을 당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데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안에는 여전히 ‘섞여 사는 잡족’과 같은 속성이 있다. 가령 어느 아동상담가의 상담료가 고액으로 저가 입고 있는 옷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아내와도 그 일로 잠시 말을 나눈 적이 있다. 아내는 유튜브를 뒤져 내로라하는 어느 여성의 성상담 강의를 자주 듣는다. 누구는 주식에 투자하는 곳에 유료로 가입하여 수십, 수백만 원씩을 내고 정보를 듣는다. 누구는 부동산 시장이나 건축 관련의 프로를 기꺼이 엄청난 값을 지불하면서 저의 충고를 듣고 어디에 투자를 한다.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지적하려는 게 아니다. 단, 분명한 사실은 저들의 충고? 충동이 우리로 탐욕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우리의 지식은 올곧고 바라야 한다.
이어서 베드로는 ‘지식에 절제를’ 놓았다. 우린 그저 저들의 강의, 강연을 참고할 뿐이라고 하지만 스스로의 절제는 비통할 따름이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은 게 사람의 본심이다. 저들이 애굽을 돌아보며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자평한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 11:5).” 과연 그랬을까? 추억은 왜곡되고 기억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옛날을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결코 오늘에 감사하지 못한다.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6).”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신세한탄인가?
이에 베드로는 ‘절제에 인내를’ 덧붙였다. 스스로 알아서 듣고 참고만 한다지만 기어이 마음이 가면 몸도 가게 돼 있다. 탐심이나 탐욕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마음의 일이지만 곧 행동으로 나타나게 돼 있다. 도둑질할 생각만 하는 사람은 기회가 생기면 도둑질하게 돼 있다. 음란한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은 틈만 생기면 음행을 저지르게 돼 있다. 우리의 절제는 마음의 일로 인내라고 하는 실천이 ‘자신을 쳐 복종시키지 않으면’ 조만간 실행으로 옮겨지게 돼 있다.
하여 ‘인내에 경건을’을 같이 해야 한다. 경건은 삶에서다. 막연한 생각으로가 아니다. 부대끼고, 다투고, 씨름하며 자신을 훈련하는 일이다. 생각만으로 성경 묵상이 되는 게 아니다. 마음만으로 기도가 나오지도 않는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하는 결심만으로 좋은 성적을 거둘 리 없다. 그래서 ‘경건에 형제 우애를’ 하고 실제의 사례를 붙였다. 형제란 함께 하는 내 곁의 사람들이다. 먼저는 자기 식구이고 나아가 이웃이며 인류다. 우애란 서로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위한다는 것은 돌아보고, 챙기고, 마음 쓰는 것을 행하는 일이다. 이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였다. 우애에 사랑이 포함된 의미다. 그런데 ‘사랑을 더하라’고 더하였다. 그렇다면 우애에 따른 정이나 사랑 그 외의 사랑이다. 무얼까?
짐작하는 대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열거한 것처럼 구체적이고 세부적이다. 실은 그 사랑은 잔인하다. 지혜자는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 21:1).” 곧 사랑은 무서운 것이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이를 바로 이해할 수 있겠나? 주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이는 사랑이시다.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게 하느니 차라리 일찍 죽이실 수 있는 사랑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자식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데 존중을 운운하며 놓아두겠나? 양잿물을 마시겠다는데 저의 선택을 존중하겠나?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지옥같이 잔인하시다.’
본문 이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가령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네 명의 여인을 생각해보자. 모합 여인 룻은 그렇다 치고, 라합은 당대의 유명한 기생집의 기녀였다. 다말은 자식을 얻기 위해 창녀로 변장하며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한 여자다. 우리의 도덕적인 판단과 기준으로 어찌 이를 용납할 수 있을까? 우리의 감정은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다. 자신의 기준에 모자라면 가차 없이 비난하고 정죄한다. 이는 어쩌면 우리 안의 ‘바리새인’ 같은 속성 때문이다. 죄로 변질된 감정은 스스로를 옳다 여기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무시한다. 가령 전두환이 회개하면 천국갈 수 있을까? 김정은, 김여정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어느 연쇄 살인자가 감옥에서 회개하고 주를 영접한 뒤 목사가 되었다면?
노예들을 실어 나르던 무역선의 선장이었던 존 뉴턴(1725-1807)이 후에 회심하고 목사가 되어 고백한 기도문이 새찬송가 305장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우리는 지난 주일에 시편 62편을 가지고 여덟 가지의 우리 감정-심리상태로 다윗의 마음을 경험했다. 이는 곧 우리가 배우고 다스려야 할 감정이기도 하다. 앞서 나누었던 여덟 가지의 감정을 관리하는 방법을 잠깐 더 살펴보고 오늘은 두 가지 감정을 더해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1. 사고중지: 위기의 순간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사고중지’는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다윗의 현재 상황은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나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심경이다. 아무래도 별의 별 생각이 다 들 것이다. 나 때문이다, 하는 자격지심에서부터 이미 죽은 큰 아들 암논을 탓하며 누구를 저주하는 전가에 이르기까지, 그 심정은 가히 상상이 간다. 이때,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무안할 정도로 제지하셨다. 저는 바로 직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놀라운 고백을 하여 그와 같은 고백 위에 주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놀라운 칭찬을 받았더랬다. 한데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하고 나섰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저의 말과 생각을 중지시키셨다.
다윗은 자신에게 이는 오만가지 생각을 멈추게 한다. 그만!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즉 ‘사고중지’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하는 말씀에 주목하는 것이다.
2. 자아 충족적 예언: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자아 충족적 예언’이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기대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함으로 스스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다. 말에 힘이 무서운 것은 생각 속에 있을 땐 몰랐던 숱한 감정이 말을 하는 동시에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우리가 주께 ‘서원’을 한다는 의미도 믿음의 결단, 신앙적인 결의로써는 긍정적이다. 가령 요셉은 자신이 꾸었던 꿈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두고 그 숱한 역경을 견디었다. 우리에겐 우연이 없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하는 오늘 시편의 고백은 자신을 향한 결기어린 찬송이다.
3. 분화: 적절한 위기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밝혀준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시 62:3).”
‘분화’는 우리의 감정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이다.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바, 하나님의 감정과 닮았다. 부정적인 감정이란 없다. 슬픔을 느껴야 남의 고통을 이해한다. 시기를 느낄 때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 질투가 있어야 사랑도 가정도 온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감정이 상하면 서로의 감정이 혼재된다. 뒤섞이면서 우리의 제어를 능가한다. 이를 다윗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일제히 공격하”는 것으로 되묻는다.
즉 상한 감정은 독소를 내뿜는다. 서로 엉겨 다른 감정도 훼손한다. 죄의 결과로 우리의 감정은 공격적이고 남을 해하는 것으로 분출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광야를 더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4. 도구적 공격성: 악한 자들의 공격은 악의적이다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시 62:4).”
곧 ‘도구적 공격성’이란, 이처럼 의도적으로 상해를 가하는 파괴적인 행위이다. 꾀하여 거짓을 즐기고, 겉으로는 축복하면서 속으로는 저주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이는 또한 역으로 유혹하여서, 아주 달콤하고 은밀하게,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롭다. 이에 우리들은 죽으러 가는 것도 모르고 “사지로 내려가며” 지옥으로 끌려가며 생명의 파탄을 눈치 채지 못한다(잠 5:3-6).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 마귀, 음녀와 같은 세상은 언제든지 온전한 우리의 신앙을 훼방 한다. 저들은 본래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59:3).” 곧 저들의 사명은 ‘도구적 공격성’이다.
5. 존재 허용적인 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8).”
이에 우리는 ‘존재 허용적인 태도’ 즉 ‘시시로’ 주를 의지하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주님 앞에 마음을 토하라.’ 기도하고 묵상하고 이를 주께 아뢰어야 한다. 우리 신앙의 경건은 연습에 의해 몸에 밴다.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킨다.’는 바울의 고백도 그런 의미이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고 말씀하신 것도 우리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본래 우리는 약하다(막 14:38). 이에 하나님께 토하는 것은 훈련돼야 한다. 뒤에서 좀 더 언급하기로 하고.
6. 자기애적 성격장애: 사람과 돈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 62:9-10).”
시쳇말로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 하는 짓을 보면 그의 인품을 알 수 있다.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평소 사용하는 말투로도 알 수 있다. 함께 어울리는 사람이 저의 됨됨이다. 곧 이는 ‘자기애적’인 반응 때문이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데 그 뒤에 ‘성격장애’를 붙였다. 한 번 끌려가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성격을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자기애적 성격장애’에는 ‘회피적 성격장애’와 ‘의존적 성격장애’가 있다. 회피적 성격장애는 스스로의 책무를 회피하는 것이다. 의존적 성격장애는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함으로 회피와 의존은 동시적이다. 특히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하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데 있어, 곁에서 같이 고생한 가족들의 희생은 무시한다거나 여러 도움의 손길을 회피하고 망각하는 경우가 단적인 예이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성경은 그러한 인생을 의지하는 것에 반대하고(사 2:22), 특히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다고 일축한다(잠 11:4). 즉 우리는 우리 인생도, 또한 자신이 모든 재물도 의지할 게 못 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11:28).”
7. 행동적 확증: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이 행동하게 한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 62:11).”
‘행동적 확증’은 실천함으로 권능을 더함이다. 여기서 ‘한두 번’은 숫자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반복적인 의미다. 곧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아예 마음에 두고 익숙해질 정도로 생각하고, 묵상하고, 실천함으로 “주께 속한 사람에게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을, 권능!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8. 무언의 노출: 우리는 소금과 빛이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 62:12).”
‘무언의 노출’은 말 안 해도 다 드러나 알게 되는 것이다. 곧 우리 그리스도인은 역시, 뭔가 달라도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이라 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은 짠 맛을 내고, 부패하고 상하는 것을 방지한다. 또한 우리에게 빛이라 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곧 빛은 환하게 드러난다(마 15:13, 14). 이와 같이 소금과 빛은 감출 수 없다. 소금은 짜고 빛은 밝다.
가령 ‘무언의 노출’에서 동생 아벨을 죽이려 하던 가인의 행동은 실행으로 옮기기 전부터 얼굴에 다 드러났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 4:6).” 하지만 저는 결국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다(고후 3:3)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다. 누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는다. 누군가 우리의 삶에서 예수의 향기를 맡는다.
9. 대리 강화: 믿음의 계기를 강화해야 한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5-6).”
오늘 좀 더 다루려는 부분은 5, 6절의 말씀으로 이는 1, 2절의 말씀을 반복한다. 앞서 우리는 1, 2절을 통해 ‘사고중지’와 ‘자아충족적인 예언’이라 하여 주 앞에 잠잠하기. 그리고 바른 생각을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하면 ‘대리 강화’라 할 수 있다. 대리 강화는 타인의 행동과 그 결과를 관찰함으로 자신을 강화하는 것이다. 가령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사건 사고를 통해 우리의 온전한 믿음을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 사회를 봐도 기독교가 덩달아 진영논리에 휘말리고, 저들과 부화뇌동하여 본이 되지 못하는 것을 본다. 예전에 독일의 히틀러에 맞서 본 회퍼 목사는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을 들라’고 주장하며 정의로운 현실참여의 하나로 히틀러를 죽이려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의 손에 히틀러를 맡기지 않으셨고, 본 회퍼 목사는 히틀러가 죽기 이틀 전에 죽었다.
이해를 돕고자 성경의 사례를 한 곳 더 보자. 사도행전 13장 6-12절에 보면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 그때 저의 곁에 있던 거짓 선지자이며 마술사인 엘루마가 있었다. 엘루마는 번역하면 마술사로 저의 이름은 바예수다. 저는 사울과 바라바를 대적하며 총독이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다 장님이 되었다. 이를 본 서기오 총독은 오히려 저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믿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누구를 보며 예수를 본다. 잘 모르겠을 때, 우리는 양무리를 따라가며 목자의 뒤를 따라야 한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이것이 신앙적인 대리 강화다. 그럴 때 우리의 기본자세는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곧 자신의 의지나 판단을 멈추고,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10. 공감적 경청: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7-8).”
‘공감적 경청’이란 다른 사람의 말과 글에 적극적으로 공감을 보이는 것이다. 곧 저를 지지함으로 자신을 동일시한다. 경청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듣는 것이다.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말을 멈춰야 한다. 하던 일도 멈춰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국민의 90%가 넘을 정도로 문맹률은 OECD국가 중에 1위인데, 읽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은 40%도 안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지독한 난독증은 빨리 읽고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손을 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권의 책을 읽느니 한 권의 책을 열 번 읽는 게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빈수레처럼 요란하다.
성경은 이르기를,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잠언 5장 1-2).”
나오는 말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하고 그 주체를 바로 알고,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하는 바른 이해와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는 바른 공감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하는 바른 지식이 돋보인다.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시편 62편을 살펴보았다. 단순하게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간 다윗의 처량한 시편에 불과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평소 우리의 심리상태, 감정의 실제를 도출하여 살펴보았다. 알다시피 우리는 누구도 완전한 감정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자기 기분이나 심리상태를 통제하거나 능숙하게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감정은 쉽게 상하고 욱, 하고 치밀어 오른 충동적인 욕구로 인해 잦은 실수는 물론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때,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하는 올바른 인식이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한다. 기준은 결코 움직이거나 변할 수 없다. 이에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하는 진리에서 떠나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하는 고백과 믿음의 자세가 우리 각자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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