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62편 /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전봉석 2021. 8. 6. 06:57

210808 주일

 

시편 62편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시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 62: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들어가는 말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우리의 감정은 우리 이전에도 있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하나님은 ‘그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곧 우리의 감정은 우리 영혼의 아우성이다. 우리의 감정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감정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곧 우리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마음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의 언어란 상처의 언어이고 회복의 언어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상처 받은 영혼이다. 아이는 배우기 전에 슬픔을 가졌고, 누가 가르치지 않았어도 외로움과 분노를 호소한다. 이와 같이 시편의 언어는 마음의 언어다. 함축된 시어로 기록되어진 시편은 마음의 색깔을 다채롭게 비추고 있다. 시편의 언어는 가끔씩 너무 잔인할 정도로 정직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그만큼 감정을 표출하는 데 있어 정직하였고, 끌려 다니지 않았으며, 휘둘리지 않았다. 마음의 일을 주 앞에 인정하되 호락호락하게 넘기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2).” 그만큼 어려운 게 마음의 일이다. 마음을 덮지 않고 주께 펼쳐 내어드리는 것은 우리 안에 감정을 두심이 그것으로 주를 더욱 알게 하려 하심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를 위해서도 시편은 우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지 마라, 고민하라, 생각하고 맞서라,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아뢰고, 다 말하라고 외치고 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시 77:1-3).”

 

 

본문이해

 

시편 62편은 지난 주일 61편 말씀에 이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친 다윗이 요단강 동편 마하나님에서 지은 시이다. 1-2절과 5-6절은 핵심구절이고, 3-4절과 7-8절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을 진술한다. 세부적으로 잠깐 살펴보면, 1-2절에서는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뢰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고, 3-4절에서는 가증한 자들의 무자비함에 대하여 주께 호소한다. 5-7절은 그러므로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신뢰하고, 8-10절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하나님의 의지가 어떠하신가를 노래한다. 마지막으로 11-12절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과 공의에 대해 고백하며 마무리한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오늘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주어진 인생을 살며 우리 안의 감정을 들추어 이를 어찌 주 앞에 펼칠지,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낼 수 있을지, 본문에 드러나는 <일곱 가지 감정의 역동성>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1. 사고중지: 위기의 순간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사고중지’는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다윗의 현재 상황은 얼마나 비참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일어나겠나? 그럴 때, ‘그만!’ 하고 자신의 생각을 멈추는 것. 가령 예수님은 베드로를 무안할 정도로 제지하신 적이 있다. 저는 바로 직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놀라운 고백을 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곧이어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하고 나섰다. 그러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저의 말과 생각을 중지시키셨다.

 

그렇게 오늘 다윗은 다소 엉뚱하게 운을 뗀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스스로, 그만!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는 듯하다. 이는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37:7).” 하고 자신에게 전하는 말이다. ‘사고중지’는 이처럼 생각하기를 멈추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하신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사 30:15).

 

2. 자아 충족적 예언: 오직 하나님만 구원자.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자아 충족적 예언’이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기대, 생각, 언어로 스스로에게 영향을 끼쳐 행동을 유발하는 감정이다. ‘서원’의 단순한 의미도 같다. 가령 요셉은 자신에게 주신 꿈으로 훗날의 여러 어려운 역경을 주의 약속으로 붙들고 견디는 자아 충족적 예언으로 삼았음을 짐직할 수 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창 37:9).” 믿는 자에게 우연이란 없다. 곧 오늘 시편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한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이는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하신 말씀에 절대적인 ‘자아 충적적 예언’을 맞추는 일이다.

 

3. 분화: 절박한 위기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시 62:3).”

 

‘분화’는 우리 감정이 각각의 특이한 구조를 갖는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고통도 즐거움도, 만족함도 결핍함도 모두 대치되는 것 같지만 실은 분화하여 개별적인 것들이다. 쉽게 말해 아이가 엄마와 자연스럽게 분리과정을 이뤄야 성숙한 성인으로 자라가듯 각각의 감정이 융합, 결합에서 떨어져야 한다. 아니면 집착과 억압으로 들러붙는다. 들러붙은 사랑은 집착이 되고, 덜 분화된 슬픔은 거짓된 웃음으로, 희락은 자칫 쾌락으로 변질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오늘 시편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시 62:3).” 하고 절박한 위기를 호소하는데, 실은 하나님이 고착된 우리의 감정을 분화시키는 과정이라 하겠다. 흔히 ‘사랑에 빠졌다’는 말도 분화하지 못하고 의존적이고 맹목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의미다. 이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가령 이스라엘은 애굽의 습성에 젖었다. 의존성이 그만큼 높다. 그러니 구원을 받고도 수시로 돌아가길 바랐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위기가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영혼을 살린다.

 

4. 도구적 공격성: 악한 자들의 거짓.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시 62:4).”

 

‘도구적 공격성’이란,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위협이나 상해를 가하는 대표적인 파괴적 증오 행위다. 사탄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아주 달콤하게 또는 은밀하게,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5:3-6).” 이를 분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시편은 저들의 공격성을 폭로한다.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시 62:4).” 세상이 그렇지 않나? ‘악의를 꾀하고, 거짓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축복하고 속으로는 저주한다.’ 왜?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59:3).” 저들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5. 존재 허용적인 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8).”

 

‘시시로’는 매순간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시시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존재 허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숙련된 대장장이는 이론으로가 아니라 손으로 일한다. 노련한 달인은 몸이 기억을 한다. 즉 행함으로 허용적인 태도 때문이다. ‘시시로 주를 의지하고, 주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심은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이에 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킨다’고 하였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 하였다.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8).”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셨다. 깨어야 한다. 일어나 앉아야 한다. 말씀을 끌어다 손에 쥐어야 한다. 결코 마음먹기에 달린 게 아니다. 마음만으론 묵상이 아니다. 지식으로는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 이는 실제의 삶이다.

 

6. 자기애적 성격장애: 사람과 돈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 62:9-10).”

 

다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다. 하는 꼴을 보면 그 인품을 알 수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저의 말을 들어보면 안다. 어떤 사람인지는 저가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안다. 이는 ‘자기애적 성격장애’ 때문이다.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자기망상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자신이 옳다. 스스로는 괜찮다. 이런 자는 어찌 답이 없다. 정치에서 진영논리가 무서운 것도 그래서다.

 

‘자기애적 성격장애’는 ‘회피적 성격장애’와 ‘의존적 성격장애’를 동시에 지닌다. 회피적 성격장애란 스스로의 책무를 망각하는 것이다. 의존적 성격장애란 그에 따른 보상으로 남에게 의존한다. 가령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하고 가족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경우들이다. 성경은 이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 146:3-4).” 자신을 비롯한 그 누구도, 뿐만 아니라 재물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의 자기애적 성격장애를 가진 신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뢰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하시고,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 11:4).” 하고 경고하신다. 결국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11:28).”

 

7. 행동적 확증: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는 마음.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11-12).”

 

저마다 은혜를 구한다. 안 믿는 자들도 은총을 바란다. 위해서 기도해준다고 하면 싫어할 사람은 없다. 이는 그 보상을 이 땅에서의 성공여부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우리가 듣는다고 하였다. ‘한두 번’은 숫자적인 의미보다 반복적인 일상의 의미다. 그 안에서 권능이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확신의 권능>과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에 속한 자’들이라는 <새로워지는 권능>과 우리는 우리에게 정하신 뜻, ‘주가 정하신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권능>이 있다. 즉 ‘행동적 확증’이란 막연한 기대나 소망이 아니라, 이를 확신하고 행동으로 삼는 것이다.

 

이에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곧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낌으로 확실한 일에 거한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생각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행함으로 이는 “주께 속한 사람에게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기 위함이다.” 이를 삶으로 확증하면서 우리는 주를 따른다. 그에 따른 확증-간증이 없는 성도는 그래서 자주 흔들린다.

 

 

나오는 말

무언의 노출: 우리는 소금과 빛이다

 

‘무언의 노출’이란 굳이 말을 안 해도 알게 하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15:13-14).” 소금과 빛은 감출 수 없다. 소금은 짜고 빛은 환히 밝힌다.

 

‘무언의 노출’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몸짓, 자세, 얼굴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가령 가인은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 때 얼굴에 죄가 가득했다(창 4:5-6). 우리를 두고 성경은 일러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셨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는 읽혀지고 보여야 한다.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 하셨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5).” 즉 그 삶에서 향기가 나야 한다. 그러할 때, 좋을 때야 모르겠으나 싫을 때는 어쩌겠나? 화가 나고 노여움이 가득할 때는 어쩌면 좋겠나? 우리 스스로는 위선뿐이다. 다만 오늘 말씀은 한 가지 분명한 방법을 알려준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1-2).” 아멘.

 

ps. 오늘 본문을 보면 상대적으로 시편 62편 5-8절이 언급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다음에 이 부분을 다루면서 우리 영혼의 외침인 '감정의 아우성'을 좀 더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