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 147:10-11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은 저를 두려워하며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일이다. 이를 주가 기뻐하신다. 곧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이 한 구절의 말씀을 한참 입에 머금어 본다. 주를 사랑함으로 더하신 모든 날들을 사랑한다. 저마다의 관심이 다른 것 같으나 더하신 날 안에서의 일이다. 그 날이 얼마나 될지 혹 길지 또는 짧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떠하든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를 경외함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것에 주가 기뻐하신다. 이와 같은 오늘 시편의 말씀을 여러 번 되뇌며 머금는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0-11).
누구와 통화하다 은연중에 우리 안에 있는 자긍심에 대하여 그 은밀하고 달콤한 자기만족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본래 우리의 모든 속성 곧 그 감정들은 선하다. 이때 우리가 부정적으로 여기는 시기, 질투, 미움, 분노와 같은 경우도 선히 다루어질 때 그 특징은 선명하였다.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독려하는 ‘대리 강화’를 유발한다. 질투는 상대를 좋아하는 데 있어 더욱 그 사랑을 차지하고 유지하고 싶은 마음을 강화한다. 미움은 옳지 않은 것이나 더럽고 악한 것을 밉게 여김으로 이를 경계하고 주의하게 한다. 분노는 그에 따른 분개로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는다. 이처럼 각각의 감정은 ‘분화’하여 그 자체로 선을 발휘하여야 했다. 한데 이것이 죄로 인하여 서로 섞여버리면서 시기에 미움이 더해지고 질투에 분노가 섞여 그 본연의 역할을 상실한 것이다. 곧 우리 안의 ‘섞여 있는 무리’와 같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그와 같은 충동이 덜어내지 못하고 사는 감정이며 부질없는 미련이다. 저의 회상은 가관이라,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5).” 하며 그리워한다. 추억하는 일이 감정을 부추기고 기억을 왜곡한다.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포도원의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저의 특성은 썩은 것을 좋아하고 무르익은 열매를 헤집으며, 의심과 불안으로 자주 뒤를 돌아본다. 섞여 사는 무리의 특징도 그 회상이 다르지 않아서,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 11:6).” 오늘의 감사를 앗아간다.
누구는 모 국제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그 학교를 운영하는 교회를 출석하고 있다. 종종 교회의 이런저런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부탁하며 의견을 묻곤 하는데, 보면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이 다 ‘너무들 잘났다!’ 대부분 고학력에 부유층에 내로라하는 직업군을 가졌다. 아이 때문이든 어쩌든 그 교회로 다니는 데는 은근한 자긍심들이 있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그 학교 설립자이며 교회 담임을 맡고 계신 이가 모든 전권을 가지고 일을 추진한다고 하지만 그래서도 이런저런 잡음은 끊이지 않는 듯하다. 여느 공교육이나 어지간한 사립학교에 비해서도 교육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아는데, 그러니 본전 생각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나는 주로 저의 믿음을 경계한다.
하나님 없는 선은 악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사랑이 신이 되면 파국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이는 묘연하고 현실적으로도 분간이 어렵다. 그러니 오늘 본문도 이를 여러 번 강조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한데 그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여겨 이를 주장하고 사람을, 자신을 더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일이 신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할 때 ‘사랑이 신이 되면 우리에게는 파멸뿐이다.’ C. S. 루이스의 말이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하나님을 사랑함이어야 한다. 가령 내가 자식들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일은 주께서 저들을 사랑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고로 주의 이름,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루이스의 말마따나 그 사랑은 파국일 뿐이다. 전에 어떤 이의 고백이 충격적으로 기억에 남는 게 있다. 저는 안 믿는 가정에서 홀로 믿음을 지키며 안 믿는 자족들을 위해 날마다 주께 호소하며 주의 은총을 바랐다. 그러던 중에 만일 사랑하는 남편이 이내 예수를 안 믿고 지옥에 가야 한다면, 사랑하는 딸과 아들이 끝내 교회를 부정하다 천국에 갈 수 없다면, 자신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없는 천국에 혼자 들어가 살고 싶지는 않다는 거였다.
곧 저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아니었다. 주를 사랑한다고 하고 주께 열심히 구하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그 모든 사랑이 실은, 파국일 뿐이었다. 어제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저의 상담 아닌 상담에서 나는 그 속에 스스로에 대한 자긍하는 마음이 남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교인들이 교회 운영에 반기를 들고 목사님의 권위에 도전할 때 저는 목사님의 결정을 존중하고 이에 순종한다고 하지만 언제든 뿌리칠 수 있는 마음이 없지 않다는 것을 엿보았다. 물론 목사의 권위나 저력도 주의 사랑 안에서의 일이지 저가 그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에 오늘 요한은 말문을 이렇게 열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1).” 누구의 희생과 헌신으로 그 교회의 기틀이 되고 한 국가의 흥망성쇠가 좌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다. 주의 사랑이 아니면 모든 게 헛되다. 하나님의 사랑을 운운하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상숭배처럼 도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판단은 하나다. 우리의 나라는 하나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2-3).” 사람 예수 그 이상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우리는 믿는다.
구제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에 있어 실제적인 희생은 극히 드물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경우에도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4).” 이를 알면 알수록 자신은 낮아지고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인 것을, 이를 주가 쓰심으로 귀하다 여기시는 것이지 남들과 견주어 어디 대학을 나와 무슨 학위를 가지고 어느 대기업의 어떤 위치로 얼마나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일은 가소로울 따름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리로다.’ 그래봐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게 고만고만하고 티끌만도 못한 것일 뿐인데, 이를 귀히 여기시는 까닭은 그 안에 아들의 영이 함께 하심이었다. 그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8).
오늘 요한일서의 진술은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다. 말 나온 김에, 며칠 전부터 머리를 맴돌던 생각이 하나 있었다. 흔히 우리가 글을 쓴다고 할 때 ‘묘사와 진술과 설명’은 같이 간다. 이때 글쓰기 훈련이 안 된 경우의 글은 설명에 치중한다. 모든 서술이 원인과 결과로 구술되어져 ‘왜 그랬냐하면’ 하는 식으로, 뭐가 어떻게 그게 어째서 그랬는가를 나열하기에 급급하다. 글의 백미는 누가 뭐라 해도 묘사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 어떤 상황을 또는 그 이야기의 구성과 흐름을 한 눈에 펼쳐 마치 손에 잡힐 듯 그려주는 일이다. 이는 좀 더 오랜 경험으로 손에 익힌 붓의 터치와 같이 자연스럽게, 그러나 고단한 반복과 훈련으로 이루어진다. 가령 나는 소설가 김훈의 글을 사랑하는데 저의 문체가 묘사의 수려함을 보여준다. 저의 모든 책을 가지고 읽고 되풀이하여 흉내라도 내고 싶었을 정도이다. 특히 수필집 <자전거 여행>을 사랑한다. <현의 노래>는 여러 번 읽어 책장이 너덜거릴 정도이다. 여하튼 다른 하나는 ‘진술’인데 이는 매우 주관적이며 감정적이다.
아이들과 수업할 때 드는 유치한 예이지만 ‘바람이 불어 낙엽이 떨어졌다.’ 할 때 말 그대로 바람이 불어 낙엽이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거센 바람이 불어와 낙엽은 하늘을 휘휘 젓다 바닥에 미끄러지듯 한참을 뒹굴었다, 하면 이는 묘사다. 물론 묘사나 설명에도 사실적 묘사와 진술적 묘사로 나뉘어 세분화할 수 있지만 그렇다 치고. 바람이 불어 낙엽이 떨어졌다는 데서, 거센 바람에 낙엽은 쓸쓸히 떨어져 외로운 듯 바닥을 뒹굴었다, 할 때에는 진술이다. 화자의 감정이 들어간 것이다. 원인과 결과로 설명을, 그림 그리듯 묘사로, 감정을 실어 진술로 글을 서술된다. 이를 잘 균형 있게 다루는 일은 오랜 연마로 얻어지는 솜씨다.
뜬금없이 이러한 설명을 더한 것은, 성경을 두고 묘사 글일까? 설명 글일까? 진술 글일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여서다. 물론 그때마다 이 모든 게 적절하게 드러나지만 성경은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또는 어떤 일이나 무엇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의도, 이 성경을 쓰신 데 따른 진술의 비중이 더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가령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단지 그러하다는 진술뿐이다. 이를 토대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 하고 단정하면서 말이다. 곧 성경은 친절하지 않다. 독자를 위한 세심한 글쓰기는 배제되었다. 그저 전하여 진술할 뿐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어제 누구와 그 교회, 학교 이야기를 나누다 통화 저편의 긴 사연을 들으며 낙서처럼 메모를 한 것도 위의 내용과 의문이었다. 결국 저들의 반감, 교회에 대한 또는 학교에 대한 교장, 목사의 독단이 자신들의 이해와 상식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교육은 논리를 바탕으로 이성적인 사고를 이끈다. 그러다 보니 많이 배운 자들은 나름의 판단과 기준이 충족되기까지 때로는 그 속의 반감을 풀지 않는다. 나아가 하나님의 생각을 능가하려 든다. 저처럼 눈이 밝아지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면 오늘의 선악과도 기꺼이 재차 따 먹는다. 가진 것을 놓지 못하는 데는 본능과 같다. 오죽하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5).” 부자란 자신이 가진 것, 재물이든 학식이든 사회적인 지위든 무엇이든지 그것으로 인하여 손에 쥔 것을 놓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저마다 자신이 수고한 만큼의 대가와 대우를 기대한다. 그러니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사람에게는 낭만적이기만 하다. 그러기가 참 쉽지 않다. 어느 선교회 훈련센터장 목사는 억대의 BMW를 탄다. 그 차를 몰고 다니며, 저의 역할은 여러 교회나 단체로부터 선교사들 후원금을 모아오는 일이다. 자신의 집은 강남의 고급 빌라에 산다. 나는 저의 일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즘 자주 건드리는 예로, 어느 상담가의 고가의 상담료와 저가 입고 들고 차고 치장한 고가의 명품들로 마음이 어렵다. 아이의 발달장애나 말 못할 절박함을 두고 저의 진단이나 묘책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글쎄, 나는 영… 제일 황당했던 소리는 신대원에서 어느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고, 노회의 중책을 맡고 있으며, 목사 지망생도들을 강의하러 오던 교수였는데, 저는 자주 언급하기를 목회의 성공여부는 타고 다니는 차를 보면 안다는 것이다. 부의 상징과 같이 성공의 상징이 된다는 것인데….
모르겠다, 나는. 저들의 이런저런 나름의 논리에 뭐라 반박을 하면 저마다 자기들의 주장이 있기 마련이어서 굳이 내가 재반박을 하고 어떤 논리를 들어 그건 아니라고 외친들! 성경은 그러하여서 묘사와 설명을 배제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설명해주는 책이 아니고, 그의 역사와 다스리심에 대한 묘사로서의 글도 아니다. 때론 일방적인 선포다. 진술뿐이다.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를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 의무가 없다. 보다 알기 쉽게 또는 보기 좋게 묘사해야 할 의무도 없다. 그렇다는 선언으로의 성경이다. 이를 오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와 설명을 모두 일축하는 진술로 기록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우리의 의견을 묻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다만 선언이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이를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도, 오래 숙련된 기술로도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13).” 성령으로 기록하셨고 성령으로 읽게 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 이를 듣고 다만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솔직히 묘사니 진술이니 설명하는 따위의 도식도 성가시다. 내 안에 어찌 저를 사랑하고 더욱 바랄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났는가, 나는 알 수 없지만,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7).
종종 누구와 이야기하다 말문이 막히는 것에 안도할 때도 있다. 억척스럽게 나의 주장을 펼칠 게 아니어서 말이다. 그리 여기는 저의 생각에 대하여 뭐라 나무랄 마음으로도 아니다. 다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8).
오늘은 다만 한 구절 한 구절 말씀을 오래 머금고 그 뜻을 음미하는 것으로 족하였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 그러므로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 14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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