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전봉석 2021. 8. 19. 05:13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1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시 145:5

 

 

하나님은 자기를 두려워하며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기뻐하신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1).” 이는 우리가 그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다. 곧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저는 우리의 왕이시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시 147:7).” 용사이시고,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18:7).” 반석이시며,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31:2).” 영원한 피난처가 되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46:7).”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목자이시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1).” 사랑으로 나를 위하시는 어머니 같으시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131:2).” 이와 같은 말씀을 찾아가며 묵상하는 일은 유익하다. 말씀이 더하지 못하는 영혼은 황폐하다. 그의 사는 날이 날마다 강퍅하다. 악착같고 번잡스런 삶이 끊이지 않는다. 말씀으로 말씀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은 복되다.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는 세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낙오자로 살까봐 두려운 것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일갈하신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시 145:14-16).

 

계절이 바뀌는 것 때문인지, 비가 잦은 날씨 탓인지, 전에 넘어진 것 때문인지, 어제는 자꾸 어디가 아파서 고단하였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다 소파에 누워 허리를 지졌다. 운동 삼아 살살 걸어 다니는데 성큼 가을이 온 것 같았다. 누가 전화를 하여 돌아오는 주일부터 줌으로 같이 예배드리기를 원했다. 정신과 약은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도 하였다. 이런저런 소식이 반가웠고, 가만히 주만 바라고 기다림이 헛되지 않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아픈 몸은 아픈 대로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때론 서러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가족들을 대하기도 민망할 따름이라 가장 아픈 티를 내기가 어렵다. 나의 일과 내 곁의 일이 나에게 두시는 일인 것을 받아낸다. 누구는 이내 글을 쓰지 않고, 누구는 그저 사느라 사는 일에 여념이 없다. 더는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잠자코 주를 바람으로 인내한다. 이는 곧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되는 이야기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 57:11).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은 주를 바라게 하는 데 유용하다. 때론 내 뜻 같지 않아 실망할 때도 있지만 그것으로 또한 주를 바람이었다. 누가 오고 안 오고, 같이 하고 못 하고, 하는 일에 대하여는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때 그 상황을 조성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리 권하여 손 내밀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면, 하고 안 하고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다. 곧 내 안의 어떤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로 죄는 아니다. 다만 그것으로 스스로 무장할까 그게 두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하면 세상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세상을 사랑하게 돼 있다. 고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오늘 말씀은 이를 분명히 하신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6).

 

몸이 원하는 것은 편안함과 안락함이다. 더욱 즐기고자 하는 쾌락과 자신의 안위다. 그러니 육신의 정욕은 눈에 보이는 안목의 정욕으로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이생의 자랑을 삼는다. 나름의 보람이고 뿌듯한 기쁨이 된다. 저의 추구하는 바는 얕고 미천하다. 이를 저만 모른다. 그렇게 어울리는 자들 또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훗날 이를 돌아보아 깨닫는 날에 밀려드는 후회와 한탄은 스스로 감당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디가 아프고 힘들어서 그것으로 고단한데,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싫은데 싫지만은 않고 고달픈데 고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주를 바란다는 것, 이를 위해 동원하시는 우리의 어려움이 오히려 복되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리 말해주었다. 힘들게 하던 것이 나아졌다고 좋아할 것만 아니라, 행여 그래서 간절함을 저버리는 일이 없기를 말해주었다.

 

곧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인정함으로 두려움이든 고달픔이든 그것으로 복되게 한다. 다른 무엇으로 대신하려 드는 만족은 일시적이라, 바람이 부는 일처럼 헛될 뿐이다. 그래서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위장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말아야 한다. 걱정거리가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고민해야 한다. 훌훌 털어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 ‘네 잘못 아니야!’ 하고 말해주는 일은 잘못이다. 그냥 넘어가고 덮어두는 것으로 오히려 주를 멀리하게 된다. 주를 믿는 것이 문젯거리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 신앙은 얕고 질이 안 좋다. 언제든지 예수를 도로 십자가 못 박으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무던함이란 어떠하든지 주를 바람이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는 일은 오랜 시간의 연마로 몸에 배는 일이다. 한두 번 그리하다 마는 정도로는 절박함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래서 더는 구제불능 같은 존재라 해도,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8-19).

 

우리의 그 어떤 허물과 죄악됨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크시다. 내가 알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능가한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일은 결과적으로 내가 행하여 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시는 것이고, 주실 것이고, 더하여 주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나도 충만하여진다. 충만하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한껏 차서 넘치는 무엇이다. 내가 인위적으로 그리 느끼며 채워가는 정도로는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지경에 감사가 나오겠나? 싶은데 감사함으로 충만하여지는 일. 가령 나는 이제 내 자식들 일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 저들을 믿는 게 아니라 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 하나님은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이시다. 내가 느낄 수 있는 ‘여기까지’는 한계를 설정하지만 하나님이 더하시는 ‘여기까지’는 제한이 없는 무궁하심이다. 영원한 나라를 상기시킨다.

 

고로 내가 어떠하든지, 더는 어쩔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라 해도 그것까지도 포함하는 ‘여기까지’다. 이를 오늘 말씀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이시다. 하나님은 이를 물리실 수 없다. 내가 더는 구제불능이라 해도 아들의 십자가의 보혈로 더는 나를 정죄하실 수 없다. 설령 내가 다시 ‘죄를 범하여도’ 그 죄로 인하여 버림을 당하거나 지옥에 던져지는 일은 없다. 그럴 리 없는 것은 성부 앞에서 성자 되신 예수께서 나의 대언자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주의 사랑은 잔인하고 죽어도 없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시인이 읊조리는 것이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45:5).”

 

괜히 또 이렇게 쓰면 누가 염려하고 안타까워할까 마음이 쓰이기는 하지만 고로 나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나의 약한 육신으로다. 덕지덕지 파스를 붙이고, 때마다 안정제도 털어먹어야 하고, 늘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하여 몸을 뒤틀기 일쑤이면서… 누가 공황을 잘 극복하고 약을 끊을 정도로 좋아졌다는 말에 축복과 함께 우려의 당부도 같이 건넸다. 그리고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에도 기특하여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니 전에 같으면 내가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하는 자괴감이 밀려들기도 할 텐데. 선생님은 좀 어때요, 하고 묻는 말에 나는 눈치도 없이 빌빌거리는 육신과 여전히 안정제를 의존하며 살고 있는 별 볼일 없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하였다. 쯧쯧, 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혹시 나를 대할 수는 있겠으나 나는 저에게 저의 나음은 다 귀히 다루시고 쓰시고자 하는 이의 뜻을 따르는 데 유용하기를, 잔소리처럼 길게 설명하였다.

 

모두를 얻고 하나를 잃느니, 하나를 얻고 모두를 잃는 게 더 낫다. 이에 대한 생각을 나는 오늘 말씀에서 가름한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시 145:14).” 그럼 상대적으로 잘 안 넘어지고 비굴할 것 없이 당당한 자들에게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시지 않는다는 소리다. 저도 그럴 것이, 굳이 넘어지는 일도 꿀릴 것도 없는데 애써 주를 바라고 찾겠나? 주를 앙망함이란 분명히 고달프고 힘든 일이기는 하나, “…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15-16).” 하는 놀라운 손길을 더는 경험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대놓고 누구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저의 신앙은 참으로 실용적이었다. 필요가 다 채워지자 더는 굳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어졌고, 주일을 지키며 함께 주를 바라는 일에서도 시들하여졌다. 물론 나는 아들 같은 저의 잘된 일에 축복한다. 굴지의 모 공기업에 5급 공무원급으로 입사를 하고, 적당한 여인을 만나 가정을 꾸려 서울의 노른자위에서 일찌감치 터를 잡고 살게 되었으니, 성공했다. 내가 가르쳤던 아이 중에 가장 훌륭하였다. 자, 이 땅에서는 무얼 더 바랄 게 있겠나? 절실할 때 부르던 저의 하나님은 도로 철학적이고 보편적인 신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였고, 굳이 뭐 이제는 그나마 절대자의 도움이 절실한 것도 아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곁에는 적당히 성공한 아이들이 포진하여, 글방을 하던 선생으로 보면 가장 성공한 팀이다. 한 녀석 소식만 모르고 나머지 셋 또한 이렇게 저렇게 ‘걱정 없이 산다.’ 저의 전언에 나는 유구무언이라.

 

왜 성경은 은근히 부정적인 의미로 우리를 일깨우시는가?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저 그렇게 된 나의 대언자가 아니시다. 이를 위해 자기 목숨도 내어주신,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한 아버지의 공의를 충족시킨 사랑이시다. 막연히 우리가 아는 멜랑꼴리한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4).” 주를 안다는 건 그냥 남들처럼 살아가는 게 아니다. 앞서 저에게도 가끔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면 ‘다 안다. 명심하고 있다.’ 하는 말로 자신이 안다는 데 거침이 없다. 주일은 접은 지 오래고, 안 믿는 여인과 가정을 꾸려 남들처럼, 그보다 조금 나은-보장된 삶을 사는 게 낙이 되었으니. 그나마 철학을 전공하고 심도 있게 삶을 고민하던 마음조차 상실한 셈이다. 그러니 더는 뭐라 한들.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얄팍한지. 필요에 의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정도로는 영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 이내 저의 등짝에는 막대기뿐인가!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잠 26:3).” 그렇게라도 한 대 후려갈겨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게 복일 텐데, 그마저 내버려두심으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이어지는 결과와 현상은 참혹할 따름이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그런데 세상은 한 술 더 떠서,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서로 거든다. ‘괜찮아, 다 그러고 살아! 인생 다 그렇지 뭐!’ 하며 떠내려 보내는 인생이 허망할 따름인데. 아직 젊으니까, 적당히 능력이 되니까,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니까… 뭐라 이른들 ‘농담으로나 듣는 것은 당연하겠다.’ 말씀 없이는 소용이 없다. 오늘 말씀은 이를 강조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나는 누구에게 권할 뿐이다. 자기 이야기를 쓰시라, 같이 성경공부를 하시겠나? 상담이랄 건 없고, 같이 나누지 않으시겠나? 하면 열에 아홉은 고맙다는 말 뒤로 나의 처지를 더욱 딱하게 여기며 없었던 말로 흘려버린다. 지난 주말에 친구와 모처럼 통화를 하다 나의 묵상글에 대해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게 책으로 묶어서 내던가, 뭘 좀 하지 그러냐는 소릴 들었다. 그때 나는 저에게 ‘나는 주목 받는 생이고 싶지 않다.’ 하고 웃자는 말로 진심을 전했다. 나는 나의 필요에 의해 글쓰기를 한다. 나의 이야기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나 같은 자의 이야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묵상한다. 그것으로 족한 것은, 저의 말마따나 한 사람이라도 같이 공감하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으로 됐다. 나의 꿈은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이다. 나야말로 나 하나 건사하기조차 어려운 사람이라…. 고로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아픈 아이’는 하루에 서너 장씩 성경을 필사한다. 누가 물으면 나는 그 애가 가장 자랑스럽다. 다들 저를 두고 혀를 끌끌 차지만 내가보기에는 쯧쯧, 혀를 차는 저들의 영혼이 더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름은 잘났다고 잘난 줄 알고 살아가고 있지만, 아이는 벌써 신약을 다 끝내고 구약에서도 느헤미야를 달리고 있다. 올해 안에 구약을 다 끝내자고 힘을 모으고 있는데, 이를 누가 자신들의 밥벌이보다 귀하다고 여기기나 하겠나?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24).” 다만 우리는 그뿐이다. 더 무엇을 바랄까?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25, 29).

 

고로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시 145: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