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3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144:15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빅셀의 소설로 원제는 <아이들 이야기>라는 게 흥미 있다. 일상이 무료했던 한 노인이 모든 사물의 이름을 섞어버린다. 침대를 사진으로, 책상은 양탄자로, 의자는 시계로 하는 식으로. ‘그러니까 남자는 사진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양탄자에 놓인 시계에 앉아 다시 또 다른 무엇을 무엇이라 부를까 고심했다.’ 하루 이틀, 자신이 뒤섞은 단어에 익숙해지면서 저의 생각은 물론 남들과의 소통에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아이들과 이 책을 가지고 독서토론을 할 때 처음에는 다들 우스워하다 나중에는 작가의 의도와 같이 심각한 상황에 대해 여러 고민들이 생겨났다. 결국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과 설령 혼자 산다해도 기존의 언어체계가 무너짐으로 모든 사고의 세계마저 혼재해버린다는 데 그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그렇다지만 정치는 정치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저마다의 주장과 그 사고체계는 무서울 정도로 다른 것 같다. 저쪽에서 아, 하면 이쪽에서는 어, 하고 해석함으로 아, 다르고 어, 다른 세계의 괴리는 같은 진영 안에서도 골이 깊어진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고 서로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는 말의 세계가 무섭다. 그뿐인가? 같이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 겪고 감내하는 현실의 문제가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다. 그러니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든지, 사람과 사람 사이는 혼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로를 물고 뜯고 야만적인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서로에게 수시로 묻기를,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데…. 오늘 말씀은 먼저 이를 상기시킨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 144:3-4).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면 하등에 쓸모없는 게 사람인 것 같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시고, 말씀으로 오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가를 알겠다. 그야말로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물으시는 것 같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서로의 다툼을 멈추는 길은 그뿐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외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어떠해도 물러설 수 없는 자리가 있다. 싸우고 다툴 일이 아니다. 모두가 아니라 해도 나 혼자 묵묵히 지켜야 할 자리도 있다.
우리의 영적 건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와 비례하고 주를 사랑함이란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과 비례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앎으로 다른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 더는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무리 어떠해도 우리의 중심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곤궁함을 주께 아뢸 수 있는 것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때에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를 오늘 요한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이겠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곧 내가 주를 경외함은 주와 사귐이 있다는 것이고 이와 같은 사귐은 나의 삶 속에서 주를 누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란 허락하신 날들을 통하여 주의 살아계심을 알고, 느끼고, 보고, 듣고 이를 구술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범사에 그를 인정한다는 것,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내가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하시는 이의 뜻이 하루하루 충일한 것이 복이었다. 이를 오늘 시편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하고 단언한다. 이를 두고 오늘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이를 주목하게 하고 있다. 이어서 더 보면,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7-10).
곧 내가 주를 경외하고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는 자로 산다. 이는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심의 증거가 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즉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있을 수도 없으시다. 내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죄를 자백함이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것으로 더는 죄에 머무는 삶이 아니다. 과거의 죄책과 현재의 죄책과 미래의 모든 죄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다시 말해 말씀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데 정직함으로 주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다(롬 3:2). 그런데,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시 81:10-11).
이것이 오늘의 우리 모습은 아닐까?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세상에 귀를 연다. 저들의 말에 더 끌린다. 누구 어린이 상담가의 훈계나 교훈에 과한 돈을 지불하면서 기꺼이 그 상담료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어느 주식 전문가의 견해나 추천을 듣기 위해 기천만원도 아까운 줄 모른다. 어디 국제 무슨 중고등학교에 자녀를 보내려 기를 쓰고, 누가 용하다 하는 소리에는 체면이고 뭐고 없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무슨 입시설명회에 서로들 박 터지게 모여들어 자리가 모자란다. 우리를 그 애굽에서 기껏 인도하여 내신 이가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실 때에 이를 듣지 않는다. 왜들 그럴까? 나는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이는 내 속에 ‘섞여 있는 무리’가 있어서이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우리의 탐욕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다. 이를 단테는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원수’라고 하였다.
더 많이, 조금 더 풍성하게 채워야 할 것 같아서 조금 더 가지고, 조금 더 앞서고, 조금 더 높이 오르고자 하는 마음이 끝도 없다. 그러느라 안 믿는 저들의 소리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하나라도 놓칠까 하여 혈안이 되어있다. 탐욕은 곧 탐심으로 마음의 일이다. 십계명 가운데 아홉 가지 계명은 모두 실천의 문제라면 마지막 열 번째의 계명은 마음의 일이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탐심은 그저 생각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기회를 노리다 틈만 나면 그리로 행한다. 저들은 하나님의 뜻을 섞어버렸다. 섞여 나온 무리란 우리 안에 여전한 기억들이고 감정들이고 아직도 꿈틀거리며 같이 사는 습성들이다.
우리 속의 말을 더 들어보자.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 11:5-6).” 과연 그러했나? 고작 노예의 신분으로 각종 노역에 시달리며 살았던 날이었는데, 돌아보니 옛날이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 치고 오늘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니!’ 우리의 하루하루가 주의 손길로 돌보심을 받는 것인데,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출 13:21).”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나? 한데,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 144:3-4).
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하다못해 사자도 배가 부르면 더는 살육을 멈추는 법인데 사람은 끝도 없다. 합당을 하네 마네, 같은 당에 들어서도 서로가 옳으네 그르네, 헤게모니 싸움은 끝이 없고 이를 위해 할 말 못 할 말을 가릴 겨를이 없다. 하루에도 ‘코로나19’ 새로운 확진자들이 수천 명씩 쏟아져 나오고, 의료진은 지쳐가고, 중환자병상은 모자라고, 가게들은 폐업을 하고, 사람들은 독이 오른 것처럼 서로의 탓만 하며 으르렁거리듯 기회만 엿보고 있는데…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아, 언제쯤 이 모든 것들은 끝이 날까? 오늘 우리에게 바리시는 주의 음성은 점점 더 또렷하게 들린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이에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오늘도 말씀이 나로 꿇리시며 내 안에 이는 여러 염려와 근심과 회의와 갈등을 뒤로 하게 하시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나의 어깨를 감싸신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때를 따라 도우신다. 한데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시 78:22).” 서로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자기도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탐욕은 무덤 같고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은 탐욕으로부터 헤어날 길이 없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은 ‘안 믿는 자들의 충동’을 귀담아 듣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섞여 사는 무리는 이게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판단하게 한다. 우리 안의 잡족들의 충동은 거세다. 내가 나로 신앙의 중심을 잡을 수 없게 한다. 여전히 안 믿는 자들과 어울리며 저들을 더 편하게 여기는 영혼에 대하여,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3).
이와 같은 말씀이 과연 그 마음에 얼마나 울리다 말겠나? 그러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4).” 하시는 말씀이 귓등으로나 들리려나. 아, 아직도 늦지 않았다. 오늘이라는 한 날을 더 놓아두시는 것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 주의 오래 참고 기다리심이 눈물겹다. 한데도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나는 누구를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게 더하시는 말씀이라, 내 안에 이는 섞여 사는 무리들의 충동을 감당할 수가 없어 주께 엎드린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이 땅에 살면서 저들의 삶을 어찌 부러워하지 않겠으며 상대적으로 나의 처지나 상황을 두고 의기소침하여 주 앞에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말씀은 일갈하신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과연 나는, 성도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러하기를 정녕 소망하는가? 이에 오늘 시편을 작은 소리로 따라 읊조린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2, 12-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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