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 146:3-4
열역학 제2의 법칙 같이, 공돈이 생기면 돈 쓸 일이 생긴다. 기껏 우산을 두고 나가면 비가 내린다. 좋아라하는데 덜컥, 힘든 일이 생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듯이 사람의 일은 불분명하다. 무엇도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 계획대로 일이 되는 게 아니다. 마음 같지가 않다. 나는 좋다고 손을 내미는데 상대는 싸우자고 덤빈다. 서로의 뒤틀린 심경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것 같다. 본래 사랑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물론 내게 잘해주고 좋아라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여기는 일이야 누군 못할까? 서로들 밉상이다. 점점 더 그 골이 깊어간다. 그저 그런가보다 하기에는 저들이 너무 내 곁에 가까이 있다. 그럼에도 저들을 사랑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성경은 한 술 더 떠서, 자기 목숨을 버려야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이것이 어찌 우리 의지대로 되는 일이겠나? 누구를 사랑하는 데 있어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 것 같다. 곧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그러려니 상대를 고려하게 된다. 굳이 그럴 것까지 뭐 있겠나? 하고 내가 스스로 판단하게 되고 저를 걸러 적당히 거리를 두기도 한다. 그런데 말씀은 자꾸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나를 사랑하신 것에 대해 언급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1).”
나야말로 주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나 있나? 막돼먹은 사람으로 살아왔으면서 지금에서는 누가 누구를 경계하고 탓하고 비판할 수 있겠나? 결국은 주의 사랑으로다. 내가 저를 사랑하는 데 있어 어떠한 노력도 또는 이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 그러하기를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12).” 한 마디로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할 일이다. ‘성령으로’ 할 수 있다.
사랑은 곧 우리가 아는 그 이상의 마음을 품어야 가능한 일이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그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사랑함으로 소망을 가지고 주께 향함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장래에 우리가 어찌 될지 어찌 알겠나? 그럼에도 믿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증거를 받지 못하고 약속을 받지 못했어도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하심’을 아는 것으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어제는 예약된 순서에 따라 백신을 맞았다. 가까운 병원에서라 사람들이 한 데 모여 불안을 감추지 못한 표정들로 조급해하였다. 간호사들은 피로에 지쳐 눈이 충혈 되고, 고개를 모로 꺾으며 눕고만 싶은 듯 힘겨워했다. 나는 가장 이른 시간에 시간을 잡고 그것보다 30분을 일찍 가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누가 성마른 목소리로 왜 빨리 안 하는가, 재촉하였다. 여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으면 저기서도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저들의 소리를 차단하듯 이어폰을 꼽고 눈을 감고 있었다. 서둔 덕분에 앞서서 내 차례가 왔고 누구보다 일찍 귀가를 하였다. 하루 종일 시달려야 할 어린 간호사들의 수고가 고맙고 안쓰러웠다. 그저 고맙고 감사하기란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다. 자신들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으면 언성을 높이고 억지를 부리기 일쑤다. 나는 도망치듯 저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일은 너무 어렵고 용서는 점점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럴 때 서로의 반응은 공격적이거나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그래서 사람들 무리에 섞일 때 두려움을 느낀다. 두려움은 통증 같다. 통증은 염증이 있다는 소리다. 손상된 몸의 활동을 알려주듯이 영혼의 한 부분을 일깨운다. 불안이나 두려움이 싫지만 그래서 나는 앞서 백신을 맞은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서 읽어보고 나름의 준비를 하고 갔던 것이다. 그와 같이 통증은 달갑지 않지만, 고통으로 적절한 대비가 가능하다. 나는 사람들을 보며 예전의 나를 떠올린다. 여전한 나의 습성을 돌아본다. 저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다 누구 못지않게 그러했던 나를 되새기는 것이다. 물론 고통이 깊고 두려움이 잦으면 오히려 위축되지만, 하나님은 늘 적절하게 나를 다루신다. 그와 같이 천국을 소망하는 데 있어 이 땅에서의 삶과 그 마무리를 예상하는 일은 중요하다.
아내는 종종 그러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뭐라 하지만 나는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사랑하게 되었다. 앞서 알아보고 서둔만큼 일찍 그 아수라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천국에 대하여도 마치 다섯 처녀와 같이,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마 25:9-10).” 뭘 꼭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소릴 종종 듣는데, 그리할 수 있게 하는 나의 두려움이 때론 귀하다.
점점 서로에게 공격적이 되는 것은 그 안에 두려움이 적극적인 반응으로 변한 까닭이다. 그러니 그런 자리에서 소리를 높이고, 재촉을 하고, 다그쳐서 가뜩이나 일에 지치고 피로에 치이는 간호사를 닦달한다. 아주 못된 습성은 그것을 마치 자신의 권리로 착각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극복하고 같이 가야 하는 것이지 이를 공격적으로 휘두르면 애꿎은 사람만 못살게 군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3).”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나?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 두려움과 무서움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46:2-3).”
물론 나는 병적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도 이와 같이 주를 바란다. 나의 불안이 새벽을 깨운다. 나의 두려움이 주를 바라게 한다. 다른 그 어떤 일보다 이 시간을 귀히 여기고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가는 신부와 같이, 혹시 몰라 기름을 더 준비하는 것이 슬기로운 마음이었다. 한 남자는 자신의 시간이 아닌데 일찍 온 것인지, 날짜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병원이 다른 데였던 것인지, 억지를 부리며 그냥 놓아주면 안 되냐고 막무가내로 요구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언성이 높아지는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내가 딱 그럴 위인이라, 그러고 살아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나에게 오늘의 모든 통증은 유익이다. 나의 두려움을 나는 그리 받는다.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막무가내로 그리 될 게 아닌 것을 아는 일이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 35:4).” 새벽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말씀 앞에 앉으면 나를 토닥이는 음성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아침마다 일찍 눈을 뜨고 아직 이른 새벽인데, 조금 더 여유롭게(?) 묵상을 하고 글을 쓰고 가만히 턱을 괴고 말씀을 마주하기 위해 일찍 서둔다. 그럴 수 있는 나의 하루와 내 안의 어떤 바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러다보니 종종 아내와 마찰이 생기는 것도 저는 주로 태평한 거라. 코앞에 닥쳐야 하고 그러는 동안 여유를 부린다. 몇 번 그 일로 마주치다가 것도 더는 뭐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봐야 서로가 다른 것이다. 내가 강요할 일이 아니다. 다만 나는 오늘의 이런저런 나의 나 됨을 사랑한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3-14).” 천국을 사모하고 바라는 마음도 그에 따른 준비를 통하여 맛을 더한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낚시를 가거나 어디 여행을 갈 때 나는 주로 가는 것도 좋지만 가기까지의 준비가 더 좋았다. 낚싯줄을 새로 고치고 필요한 목록을 작성하여 떡밥이나 장비를 점검하고, 갈 곳을 미리 검색하여 자리를 대충 정해두면서… 솔직히 그와 같이 들뜬 마음을 더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꼭 같이 가는 친구는 전에 쓰던 그대로 와서 거기서 줄을 다시 고치고, 찌를 맞추고, 뭐 그리 부산을 떠는지. 그럴 때마다 뭐 있니? 이것 좀 해줘! 저거 어딨어? 하는 식이라… 늘 그 친구에게 잔소리를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이를 천국 문 앞에서 우왕좌왕 이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보면… 이거야 말로 끔찍한 일이 아니겠나? 기껏 나름은 한다고 하고 좋다고 들어갔는데,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차라리 아예 그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다 지옥에나 떨어지는 인생이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저도 환장할 일이기는 하겠다. 주의 이름으로 한다고 한 것인데, 정작 주님은 저를 알지 못하겠다고 하시니!
내가 두려워하는 일은 그것이다. 행여 나의 믿음이 나를 속일까 하여, 스스로의 믿음을 너무 믿음으로 정작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신랑을 기다린다고 나가기는 했는데, 아뿔싸! 결정적인 순간에 기름이 떨어질 줄이야.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마 25:1, 11).” 뒤늦게 기름을 채워온들.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두려움을 없이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사랑하는 방법을 익혀간다. 그 유익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누구는 병적이라 하고 누구는 공황이라, 불안증이라 그렇다고 치부하는 일들에서도, 내 안에 두시는 두려움으로 나는 주를 바라는 데 유용하여 감사하다. 필연적으로 주를 경외함에 대하여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곧 나의 두려움이 또는 나의 상한 심령으로 더욱 더 당당히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친다. 그것도 아주 당연히 말이다. 왜?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시 33:18-19).
고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하여 내가 나에게 두시는 불안과 두려움을 감사로 받는 것은, 두려움을 통하여 그 참 사랑을 간별 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허튼 데 기웃거리지 않는다. 그런 자들과 더는 어울리기를 피한다. 저들이 외면하고 욕하고 수근거려도 개의치 않는다. 누가 어딜 가고 무얼 누리며 얼마나 즐겁게 살아가는지도 부럽지가 않다. 두려움은 통증처럼 나를 못 살게 굴지만 또한 그것으로 더욱 더 조심조심, 근신하고 깨어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심이 귀하다. 나로 온전한 사랑을 구하게 하는 것이 내게 허락하신 연약함으로였다. 이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 146:3-4).
인생 그저 허망할 따름이다. 나의 두려움이 이를 알게 한다.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그렇게 주를 바람은,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19-20).
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21-22).” 나는 죄인이고, 상한 심령이며, 두려움에 지키고, 불안에 쫓기는 사람으로, 곧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23).” 기꺼움으로 사랑한다. 그저 고맙고 감사를 따름이라. 고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24).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0) | 2021.08.22 |
---|---|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0) | 2021.08.21 |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0) | 2021.08.19 |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0) | 2021.08.18 |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0) | 2021.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