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전봉석 2021. 8. 30. 05:07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 5:8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 6:9

 

 

두루마리가 봉해져 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 5:1).” 이는 정한 때를 위한 것이다.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환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단 8:17).” 이를 우리에게 알게 하실 것이다. “진노하시는 때가 마친 후에 될 일을 내가 네게 알게 하리니 이 환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임이라(19).”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환상을 간직해야 한다.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26).” 마지막 때를 위해 이를 마음에 간직하고 봉합해야 한다.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12:4).”

 

이 의미는 하나로 통한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설 때까지 봉합해져 있는 말씀을 보고 요한이 운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계 5:4).” 봉하여졌다는 것은 힘을 발휘하지 못함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여전히 미뤄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 사도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반드시 다윗의 뿌리, 그리스도 예수가 이기신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5).” 이기는 자는 이 두루마리의 봉인을 뗄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슥 4:10).” 성전은 반드시 재건될 것이며 그때에 여호와의 일곱 눈이 지키실 것이다.

 

곧 성경은 계시 언어로 되었다. 열어보이셔야 볼 수 있지 우리의 눈으로 읽고 이해하고 아는 정도의 세계가 아니다. 이를 억지로 풀려 해서는 망한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그래서 나는 문자적으로 그 단어의 의미와 어원을 찾아 휘저으며 다루는 성경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읽으며 같은 의미로 연결되는 성경을 두루 살필 때 주의 영이 이를 보여 알게 하시는 정도이면 족하다. 아무튼 오늘 말씀은 새삼 성도로서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되새기기 한다. 우리는 모두 오래, 건강하게 살기를 바란다. 이 모든 세계가 잘되기를 바라고 적당히 유지되길 원한다.

 

한데 이는 일련의 사태를 통하여도 경고음을 울린다. 카불 공항이 공격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모두는 자신들의 신념을 들고 서로가 옳다고 주장한다. 여기저기 산불이 일어 삼분의 일이 타고,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계 8:7).” 바다가 죽어가고 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8).” 산천이 오염되어 쑥처럼 쓰고, 썩고,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10-11).” 하늘이 오염되어 오존층이 파괴되고 우주가 더렵혀지고 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12).”

 

성경은 선포의 언어이고 경고의 메시지다. 안이하게 굴며 혹시나, 설마, 하며 쭈뼛거릴 때가 아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때에 우리는 주의 나라를 사모하며 곧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봉인된 말씀을 취하심을 본다.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계 5:7).” 이런저런 죄악 됨과 부끄러움으로 두려워하다가도 주의 보좌 앞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심이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저를 보시고 심판장 되시는 만유의 주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이런저런 나의 부끄러움이 저의 아름다운 옷으로 덧입었음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4-5).” 앞서 사탄은 늘 우리를 정죄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2-3).” 하지만 그러한 저를 책망하시고 나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심이다.

 

말씀 앞에 가만히 서면 나의 나됨을 두고 하나님은 긍휼하실 따름이다. 이를 알면 알수록 생각을 뉘우치고 말을 조심하며 행동거지를 바로하게 된다. 곧 내 안의 두려움이 작동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시 64:1).” 곧 우리의 근심이 주로 인한 것이면 말이다. 이를 바울의 아름다운 논증으로 펼쳐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10-11).

 

엄연히 우리의 근심이 양분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고 ‘세상 근심’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게 한다. 하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일 뿐이다. 그저 먹고 사는 데 급급하고 사느라 산다고 열심을 다해 사는데 그 삶이 모두 허사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뿐 그 마음에 참 평안이 없다. 하지만 바울 사도의 설교처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는가? 이처럼 아침마다 주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고, 나의 남은 날이 주 앞에 온전하기를 바라게 하는 데 있어 근심할 줄 모르면 무슨 경건함을 더할 수 있겠나? 그러니 이 근심이 나로 변증하게 한다. 누구랄 것도 없는 죄의 실체를 두고 얼마나 분하게 하는가? 이를 도저히 감당하고 이겨낼 수 없어 두려워하게 한다. 두려운 마음은 주의 도우심만을 바라게 한다. 하여 주를 사모하게 하며, 이를 위해서도 얼마나 열심 있게 하는지!

 

스스로 근신하고 깨어 있게도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곧 오늘 나의 깨끗함이 무언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덧입혀진 아름다운 옷이다. 곧 다윗의 표현과 같이 ‘주께 숨을 수 있다.’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시 64:2).”

 

한 주일이 지나면 다음 주일의 본문을 앞서 펼쳐 그 의미를 살핀다. 하나님이 내게 두신 가장 잔인하면서 가장 선하신 족쇄는 목사가 되게 하신 게 아닐까? 가끔은, 아주 가끔은 끔찍한 생각을 하다가도 목사가 안 되었으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하고 되뇔 때가 있다. 나이어린 나의 동기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게 되면 같이 한숨을 쉬며 말하길, 오죽하니 너나 나나 목사로 세우셨겠냐! 하고 푸념 아닌 은총의 의미를 일깨운다. 이제는 나로 알게 하심인데,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시 27:1-2).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어찌 나를 넘어뜨려 쓰러지게 하려는 ‘악인들이’ 없겠나? 오히려 더 극성일 때도 있고, 그것이 나의 고질적인 불안이거나 지랄 같은 성격이거나 지긋지긋한 우울감일 수도 있다. 어제도 기껏 예배 잘 드리고 돌아와 오후께 쉬는데, 내내 우울감이 또는 어떤 서글픔이 나로 하여금 몸서리치게 하는 것이다. TV에서 어디 여행지를 소개하는 프로를 별 다른 시선 없이 지켜보다, 모두가 나간 빈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서러워하였다. 낚싯대라도 도로 몇 대 살까? 훌쩍 어디 며칠 저수지에라도 다녀올까? 마음은 한껏 까부라져 저 혼자 곤두박질 칠 때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앞서 말씀을 묵상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나와 현실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나의 괴리감은 골이 깊다. 특히 말씀을 전하면서 나는 아들을 염두에 두고, 손위 처남과 장모와 아내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과 아픈 아이를 염두에 두고 우리 모두의 됨됨이를 연상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다. 마음은 뜨거웠고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누가 같이 들었으면 하고, 누구를 생각하며 설교 중에 기도하는 여유도 있었다.

 

그런데 오후께 밀려드는 공허함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 끙, 하고 찜질기 위에 몸을 누여 허리를 지지며, 이도저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처지와 상황에 우울감은 더해질 때,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아니면 우린 무엇으로 사는가? 더욱 주를 바람이란, 그러려니 하는 안이함에서가 아니다. 어떤 만족과 그 가운데 안주하는 믿음으로도 아니다. 앞서 살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근심으로 나는 다시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성경의 어려운 의미를 턱을 괴고 앉아 짧은 지식으로나마 성경을 찾고 의미를 확장한다. 이 모두는 세상-내 안의 나로 인한 공격으로 인함이다.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시 64:4).” 겉으로야 누가 누굴 알겠나? 가족인들 서로를 어찌 다 알겠나? 다녀간 누가 나의 겉모습을 보고 내 안의 갈등과 허물과 속됨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목사로 세우신 데는, 먼저는 나를 꿋꿋하게 주의 길 가게 하려 하심이고 다음은 내 곁에 두시는 주의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하시는 당부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하려 하심이었다. 가령 누구 일로 마음이 쓰인다. 이 녀석은 왜 이번 주일에는 문자 한 번 없을까? 일이 많나? 혹시 주를 바라는 마음이 그 새 다 식은 건 아닐까? 또는 토요일에 다녀간 아이와 아이엄마를 생각하며 저들은 과연 주일 예배를 어찌 드렸을까? 문자라도 해볼까? 그냥 두는 게 나을까? 이처럼 머릿속의 생각을 침대 위에 늘어놓는다면 오만가지 생각으로 뒤죽박죽 난리도 아닐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구의 여유로운 산책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울컥, 하고 치미는 어떤 감정의 정체는 또 무엇이람!

 

한 입에 악을 품은 말과 선을 품을 말이 동시에 머금은 것처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9-10).” 나는 나의 이 이율배반적인 모습에서 늘 당혹스럽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하고 묻는 말씀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11). 앞서 증거하였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들에게 향한 당부와 위하는 기도의 말들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서러움과 노여움의 말이 음식물 쓰레기처럼 악취를 풍기며 입 안에 같이 머금고 있는 셈이었으니! 아, 나의 이 구제불능인 영혼을 어쩌면 좋을까? 성경은 그런 내게 주의를 기울이라 하신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10-13).

 

하여, 기도밖에는. 오늘 말씀에서 나는 아주 단순히 이를 붙들고 묵상한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가만히 주 앞에 고개 숙일 때 온갖 서러움이 또는 악취가 나는 나의 허물과 죄악이 훼방하여 휘젓기 일쑤지만, 주여!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뿐. 때론 더 이상 아뢸 말이 없어 가만히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 6:9).”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아시는, 내 기도를 이미 다 받으셨음을 두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14).” 주의 당부하심 앞에 두 손을 모은다. 그리고 가만히 베드로 사도의 경고의 설교를 되새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어떻게든 우리로 쓰러뜨려 주저앉아 있게 하려고, 그렇게 세월을 뭉개다 타성에 젖어 그러려니 무뎌지기를 바라면서 꾀는 현실의, 내 안의, 사탄의 저의는 하나다. 할 때에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기도 외에는 답이 없다.

 

이에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를 읊조린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 6:1-2).

 

나의 구주가 아시면 내가 누구에게 이를 아뢰고 고할까?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 6편 전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