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누가 능히 서리요

전봉석 2021. 8. 31. 05:3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 6:16-17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 7:10-11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게 지혜이고, 멀리해야 할 것을 멀리할 줄 아는 게 용기이며, 가까이 해야 할 것을 가까이 하고 사는 게 행복이겠다. 보면 가장 쉬운 진리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남한테는 친절하고 예의바르면서 정작 가까운 가족에는 퉁명스럽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생각할 때면, 물론 ‘친절한 타인’과 ‘친밀한 사이’는 엄연히 다른 것이겠지만….

 

사랑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요한은 밧모섬에서 다섯 편의 성경을 썼다. 복음서, 서신 1-3, 그리고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삶에 있어 격리되는 일이 하나님을 더욱 내밀하게 만나는 시간이시도 한가보다. 존 번연은 12년의 감옥 생활에서 <천로역정>을 썼으니. 요한은 특히 요한1, 2, 3서의 짧은 서신에서 무려 51번이나 사랑이란 단어를 직접 사용하기도 했다. 복음서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씀으로 육신이 되신 것에 집중시켰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개인적으로 이 구절의 말씀은 오래 머금고 되씹을수록 그 의미는 참으로 깊은 것 같다.

 

이를 풀어서,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곧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지 못한 영혼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그래서 이를 권세라고 하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권세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난 자가 된 것이다, 오직!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3).”

 

말씀에 붙들리면 선을 바라고 의를 구하게 된다. 이처럼 새벽 시간이 나에게 좋은 것은, 묵상글을 쓰고 있을 때처럼만 살고 싶다. 한데 금세 돌아서기 무섭게 현실의 나는 괴팍하고 고약한 성미와 늘 삐딱한 마음과 자주 골내는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것 같다. 성마른 성품으로 제풀에 견디지 못해 약물을 의존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주의 인자하심을 아는 만큼 자신의 구제불능인 것을 실감한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음을 알수록 주의 긍휼하심만이 살 길인 것을 돌아보게 된다. 이를 어찌 꿰뚫어 보고 계셨는지, 설교원고로 준비하는 시편의 다음 본문 말씀이 정곡을 찌른 것 같다.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시 64:5-8).

 

악인들의 속성에 대한 말씀인지,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순간 나는 아찔하였다. 안 그런가?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나야말로 혹시나 하고 누구를 위하고 대하는 마음이 크지 않던가? 은근히 알아주기 바라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은밀하게 꿈틀거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결국은 이게 문제다. 내 속을 나도 모르겠지만 설마, 누가 알겠나? 하는 속셈이 늘 있다. 은연중에 바라기도 한다. 그러니 속마음을 다 드러내고 까발리며 살면 서로가 역겨워서 어찌 살까 싶다.

 

그러면서 그런 걸 두고 묘책이 있다고 자부한다.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그러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하물며 누구를 두둔하거나 누구를 업신여긴다는 게 참으로 가당치가 않다.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다.’는 말씀에서 한참을 머물며 주춤거리게 된다. 지혜자는 우리의 슬픔에 대하여 그리 묘사한 바 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그러면서 남의 말은 별식처럼 즐긴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18:8).” 그러니 우리 속에 온갖 오물 같은 찌꺼기가 악취를 풍기며 부글부글 발화한다.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욱, 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두고 주체할 길이 없다.

 

그래서 믿는 자는 서로의 격려와 위로가 수시로 필요하겠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행 15:32).” 서로 권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롬 15:14).” 왜 믿음이 없는 자와 같이 사는 게 어려운가를 알겠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관심이 없는 사람하고는 뜻을 같이 하기 어려운가를 말이다. 서로의 관심이 다르고 정도가 다른 것이다. 서로가 다른 쪽을 본다. 기껏 내가 가리키는 것은 안 보고 그저 내 손가락을 보며 뭐라 타박하기 일쑤니, 그게 아니라고 답답해해도 소용이 없다.

 

누구에 대하여, 나는 저에게 늘 어떤 미련이 남는다. 그 마음의 연약함이나 여린 성품이 늘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옥토로써의 토양의 성품은 가졌는데, 고집이 은근 세다. 자신이 보는 것만 본다. 듣는 것만 듣는다. 그것으로 함께 주를 바라기를 바라며 때론 무엇을 권하기도 하고 같이 어떤 모임을 은근히 제안해보기도 하였으나, 내가 그만큼 미덥지 않은 것이겠지만 저는 전혀 다른 쪽을 보는 느낌이 점점 든다. 같은 소리를 하되 다른 말을 할 때가 가장 어렵다. 차라리 부인하고 부정하면 다투거나 뭐라 나무라기도 하며 내 뜻을 전할 터인데… 그러니 서로가 권면하고 위로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자라간다는 일은 참으로 복되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2:11-12).

 

서로가 떨어지지 않게 한 생의 여정을 같이 동행하는 데 있어 곁을 같이 한다는 일은 복이다. 누구는 죽고 못 살 것처럼 붙어 지냈는데 말씀으로, 주의 사랑으로는 이상하게 가까이 할 수가 없는 이도 있다. 같이 놀고 흥겨운 사람이 있는데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데 훼방이 되는 사람도 있다. 언제부턴가 그런 자를 멀리하게 되고 가까이함을 경계하는 것은 마치 저와의 관계가 선택을 강요하는 일만 같아서이다. 너무 좋아했는데, 그래서 때론 어떤 대중노래에 퍽, 하고 어떤 그리움이 터지면 저가 너무 보고 싶고 같이 하던 시간을 그리워도 하지만 거기까지다. 잠시 그러는 것으로도 회개한다. 이상하지? 저를 사랑하면 하나님 사랑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낄낄거리며 어떤 말을, 관심을 서로 나누다보면 그 내용에는 하나님이 모독당하고 외면당하고 멸시당하고 계심을 알게 된다. 추구하는 게 그렇고 그 일에 적당히 허용하는 것들이 그렇다. 그러니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시는 게 아닐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

 

그럴 수 있는 사이가 필요하다. 절실하게 요구된다. 점점 더 세상은 참으로 너무 좋아서 그야말로 돈만 있으면 여기가 천국인 듯하다. 마음만 편하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어제는 막냇동생이 인천으로 와서 누구를 우리 교회로 불러 교육장소로 썼다. 그러고 이런저런 말을 할 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와의 인연이 오래인가 보았다. 한데 같이 하는 일이 늘 고역인 것은 무엇보다 한 일에 집중하지를 못한다. 계속 전화가 오고 어디 문자에 응해야 하고 생각은 다른 데 가 있고, 대체 이런 사람과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힘에 겨운 상대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 그런 사람이 있다. 이상하게도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사람이 말이다. 그러니 싫으면 싫다 마다할 수도 없고, 또 그러면 하나님은 억지로라도 곁에 붙여 놓으시니 무시하고 외면할 수도 없고, 같이 하는 두어 시간의 교육에 진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알 것은 우리의 일을 감찰하시는 이가 계심이다.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욥 34:21-22).” 주 앞에 공개된 삶, 투명한 삶으로 산다는 일은 두려운 일이지만 홀가분한 일이기도 하다. 나는 종종 이런 말을 글에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의 이런저런 말도 쓰게 된다. 이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쓰는 목적의 글이라면 여과하고 꾸밀 텐데, 나는 늘 하나님을 마주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데 있어 글로 쓴다. 글이란 늘 남의 말에 빚지는 일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지혜자의 표현처럼 내가 이를 책을 엮자는 말을 거절하는 것은 열에 아홉은 성경이나 다른 이의 말을 따온 것이다. 알다시피 사업하는 사람은 돈을 빚지고, 말하는 자는 말에 빚진다. 글을 쓴다는 일은 순수한 창작이란 없다. 나는 그리 여긴다.

 

동생은 종종 교육하는 이들의 요구 가운데 자기 책을 내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내게도 책을 내지 그러냐? 어디 대회가 있다면 형이 쓰지 그러냐? 하고 묻곤 한다. 어제도 또 누구 이야기 끝에 내게 화살이 돌아와 그리 물어서, 말이 되는가 모르겠으나 나는 각오한 바가 있다. 책을 내지 않을 것이고 글을 글로 띄우려고 애쓰며 고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서원이나 결연한 어떤 각오는 아니지만 나름의 원칙으로 세운 바 있다. 꽤 오랜 시간을 이 맘 때가 되면 ‘등단병’에 시달렸다. 어디 출품을 목적으로 글을 쓰고, 누구에게 보이고, 저들의 평가에 목을 멘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본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하셨다. 소위 신춘문예나 정평 난 문학지로 등단하는 길은 막으셨다. 그러면서도 숱하게 어디에 뽑혔다. 인천문인협회니 어디 소소한 단체의 주관으로 하다못해 입상이나 우수, 장려를 수차례 경험한 바 있다.

 

명색이 자존심이 있지, 나는 그런 데 원고를 보내고는 그런 저들의 시상을 무시하곤 하였다. 곧 어떤 글을 하나 완성하려면 거기에 묶여야 한다. 동생한데 나의 결심 아닌 결심을 말하면서 일주일에 한 편 설교원고 작성하는 일과 누구 일로 이래저래 마음 쓰다 새벽에 일어나 묵상글로 나의 삶과 연관 짓는 일로 벅차다. 만일 내 글, 내 책을 준비하려 한다면 그러느라 버려두고 미뤄야 하는 게 너무 많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나의 역량은 거기까지다. 왜 하나님이 그토록 지겹도록 등단을 꿈꾸고 시인이 되고 싶어 하고 작가가 되려 하게 하셨는지를 알겠다. 더는 그게 아닌 것을 안다.

 

성경은 간결하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그러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2).” 백날천날 난다긴다 설쳐봐야 소용없단 소리다. 주가 알아서 하시라,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배짱으로 산다. 나는 주목 받고 싶지 않고 꾸며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어찌저찌 하여 그것으로 누구를 끌어들일 마음은 없다. 글을 쓰고 책을 내고 무슨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나의 못난 성향을 내가 안다는 소리다. 나는 다만 나의 죄악을 더는 내 목전에 숨기고 살기 싫을 뿐이다.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렘 16:17).”

 

오늘 말씀을 그리 읽었다면 무리가 있을까?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 6:16-17).

 

나는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귀하다. 나의 두려움을 사랑하는 이유다. 하면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0-11).” 그렇다면 내가 집중하고 주의하고 또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만을 바라는 일. 허접하기 짝이 없지만 이와 같은 묵상글을 쓰는 일은 성경이 아무리 영광되고 존귀하고 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면 뭐하나? 저기 어디 파브르 박물관에 보관하여 고이 간직하고 살면 뭐하나? 나에게 더는 아니다. 찧고 오리고 자르고 저미고 빻아서, 나는 씹어 삼킨다. 계시록에 일러,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소리 내어 읽는 것으로, 듣는 것으로 그런 자와 같이 하는 게 복이 있다. 말씀은 누차 먹으라 하신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계 10:9).” 입에 달고 배에 쓰다. 소화하려니 배가 아프다. 속이 볶인다.

 

그럼에도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겔 2:8-9).” 먹으라신다. 예레미야의 진술은 좀 더 구체적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렘 15:16-17).

 

결국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일이다. 이를 바울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7).” 그러므로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9).” 곧 나의 묵상글은 내가 먹고 싸고 살고 끙끙거리며 지내는 하루의 일과다. 나에게 성경은 이제 ‘고상한 무엇’이 아니라, 실제의 먹고 마심이다. 때론 배가 너무 아프다. 속이 볶인다. 말씀으로 얼굴을 들 수도 없다.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고도 싶다. 그러나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7).” 그러므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시 7: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