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 20:15
왕이 노하실 때에 그들을 풀무불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리니 불이 그들을 소멸하리로다
시 21:9
사람을 보고 살다간 미친다. 뉴스만 보고 세상만 보고 살다간 마귀가 된다. 스스로도 얼마나 간사한가? 당장은 이랬다가 언제 또 달라질지 자신도 알기나 하겠나? 남 얘기 할 거 없다. 자신이 문제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기도란 얼마나 기이하고 신기하며 이상하고 희한한 일인가? 미천한 내가 어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일인가? 당시에 유대민족은 기도를 도식화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내용을 읊조리며 의무적으로 의식화된 기도였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경멸하셨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5).” 외식하는 기도란 틀에 박히고 형식적이며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는 자기 위안을 삼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하신 말씀을 읊조리며 형식적으로 되뇌는 게 습관처럼 몸에 뱄다면 이를 좀 더 부풀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자기만족을 위한 떠벌임이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 아무 말도 없는 말의 고백이 기도이다. 아무도 없는 빈 방이 골방이다. 우리가 어떤 형식에 따라, 또는 무슨 의식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게 기도가 아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오히려 하나님은 중언부언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신다. 그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한 마디로 가슴을 뜯으며 주께 엎드리는 것, 그곳이 바로 골방이다.
누구의 이런저런 말에 나는 기도밖에는 달리 답이 없음을 알았다. 그만, 하고 저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만 보면 안 된다. 그게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고 가족이라 해도, 사람만 보고 살면 미친다. 그것이 사랑인 줄 아나 그것은 집착이다. 애착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서 시작된 거짓 사랑이다.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이 말을 하는데 저 말을 꼬투리 잡고, 달을 가리키는데 가리키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을 두고 뭐라 지껄여대는, 특히 요즘은 개인방송이 늘면서 다들 미친 것 같다. 마귀가 따로 없다. 악다구니 쓰며 남을 비망하고 욕하고 조롱하며 시시덕거리면 돈이 된다. 꾸여꾸역 입에 쳐 넣고 억지로 먹어대는 꼴을 보며 ‘먹방’이라 하여 낄낄거리며 돈을 보낸다.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는 미친 소리에 환호한다. 산책을 하다 어디 나무 그늘 벤치에 가 앉으면 삼삼오오 모인 노인네들이 죄다 무슨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거나 정권을 두고 감 놔라 배 놔라 끝도 없는 말을 떠들어댄다. 그러니 사람만 보고 살면 미친다. 뉴스만 보고, 남 탓만 하고, 돈 벌 궁리만 하면 죄다 마귀가 된다.
누가 하도 돈에 찌든 소리만 해대기에 영혼을 팔면 돈 번다고 쏘아 붙이듯 말했다. 마귀가 좋아할 일을 하면 돈 번다. 한 번 사는 세상으로 규정하면 뭐 그리 인간다움을 지킬 게 있나? 소위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졌다는 위인들이 하는 작태를 보면 거기야말로 생지옥이다. 다들 멀쩡한 것 같지만 온전하게 사는 사람이 없다. 남들은 잘들 사는 것 같지만 들춰보면 그 속이 성한 데 없고 하나같이 이상하다. 다 큰 어른이 게임에 환장하고 오후 늦게 여는 가게에서는 퇴폐영업이 성업 중이다. 저쪽 어디서 탈북여성 몇을 데리고 성매매를 알선하는 이가 있다. 봉고에 여자를 실어 나르고 모텔 앞에서 기다리며, 누가 주문(?)을 하면 그리로 또 이동을 한다. 이래저래 누가 누가 사는 모습을 가만히 들춰보면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어디 온전한 정신으로 사는 일이겠나?
그런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하나님은 우리로 골방에서 만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다 아시면서도 이를 듣기 위하여 하나님은 먼저 골방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 도대체 다 아는 소리를 뭐 하러 또 듣고자 하시는 것일까? 스바냐는 노래하였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이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려고, 그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골방에서 기다리신다. 길을 걷다, 운전을 하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다… 거기가 골방이다. 은밀한 중에 저는 듣고 계신다. 은밀한 중에 저는 말씀하신다.
사람만 보면, 자식만 위하고 사랑하는 이만 바라면 미친다. 마음은 갈가리 찢겨 상처만 받는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사이는 없다. 그러려니 하고 저를 놓아둘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맡김으로밖에 다른 수가 없다. 저를 사랑하는 것도 주가 저의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확신으로 인한 것이어야 한다. 내 새끼니까,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어찌 더 사랑할까… 하고 목을 매다가는 숨이 막혀 죽는다. 그러니 무엇을 주께 구할까? 주는 내게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아신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다 아시는 걸 어찌 더 들으시려 기다리시는 것일까?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4-8).
내가 지금 어떠하든, 어느 지경이든 주가 거기 먼저 계신다. 내가 주의 영을 피해 어디로 가겠나? 앞뒤로 나를 둘러싸심이 기이할 따름이다. 그 하나님은 내가 아뢰기 전에 내 혀의 말을 하나도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다. 그러니 부디 함부로 지껄여댈 게 아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전 5:2).
그야말로 말이 범람하여 홍수가 난 듯 시끄러운 세상이다. 자고 깨면 엉뚱한 말이 나돈다. 이 사람은 저 말하고 저 사람은 이 말한다. 부부 사이에도 말이 서로 엇갈린다. 자식 일에도 뭐라 할 게 없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지혜가 다른 게 아닌 것 같다. 누구와의 통화 후에 나는 가만히 창밖을 보고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나도 모르게 주님, 하고 부른 뒤 할 말이 없었다. 저에게는 정신과에 가라고 강제로라도 강요하였다.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괜찮아요, 하는 꼴이었다. 그러니 늘 했던 말을 되풀이 되고, 해도 해도 그 속의 말은 다 퍼낼 수가 없다.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 5:3).” 신기한 건, 그런 자들이 꿈꾼다. 주의 소명을 무슨 사업구상처럼 여긴다. 저들의 말을 듣다보면 나도 꿈꿔야 하나? 하고 도태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당최 누가 기도를 하고 누가 그 기도를 듣는 것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저마다 하나님이다. 지껄여대고 명령하고 요구하고 강요하듯 떠든다. 그걸 기도라고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말할 기회도 없다. 그러니 저의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막으신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시 28:1).
가장 무서운 게 무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눈물을 많이 흘려도 못하는 게 인생이다.’ 내가 뭐라고, 누구더러 정신과에 가서 진료 받고 약을 타서 먹으라고 하였다. 강경하게 그리 권하였더니, 그래서 집을 나선 모양이다. 우울증이 심한 상태로 무슨 약을 우선 일주일치 처방 받았다고 하였다. 약 먹고, 가만히 골방으로 가라.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떠벌일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당사자들을 붙들고 하소연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은밀한 중에 듣고 계시는 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예수밖에 없네.’ 하는 마음으로였다.
이게 보면 다 습관이다. 어제오늘 그리 된 게 아니다. 아주 어릴 때, 그 너머 어느 기억이 닿지도 않을 때부터 그래왔다.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 이야기 전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는 게 너무 고단하다. 이를 바울도 진솔하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고단함으로 오히려 감사하였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곧 오늘 우리의 고단함은 우리로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는 긍휼하심이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이처럼 말씀을 끌어당기고, 나의 골방에 앉는다. 때론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는 나의 걸음이 골방이고, 가만히 창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가 나의 골방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에 살짝 열린 창으로는 풀벌레소리만 자글자글하게 들어오는 나의 이 손바닥만 한 베란다가 나의 하나님과의 은밀한 골방이다. 마치 연인처럼 할 말이 많다. 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럼 고요한 가운데서 들려오는 듯하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0, 13).
그래서 나는 하루 중에 이 골방의 시간을 가장 사랑한다. 누구는 노인네 같이 일찍 자고 잠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책상에 앉아 말씀을 편다. 그럼,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8-9).
저가 나를 깨워 이르시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0).
어제에 있었던 누구의 일을 아뢰고 나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말하다보면 어느새 주가 대꾸하신다.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17).
주의 사랑이 아니면 아내고 자식이고, 사람과 사람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우리는 때로 억지로라도 저녁 식사 후에는 가정예배로 둘러 앉는다. 같이 기도를 하고 성경 한 장을 읽는 것이 전부이지만 서로는 이제 말을 안 해도 그 시간을 통과하여 사랑한다. 간혹 감정이 상할 때 또는 어떤 일로 마음이 어려울 때, 그 시간은 당연히 어색하고 무안하기 이를 데 없으나 그럼에도 우린 한 자리에 모인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죽을 것 같아서, 더는 내 힘으로 살 수가 없어서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르고 살려달라는 심정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고단하다. 다들 사는 게 너무 피곤하다. 그 중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개나 소나 모두가 언론매체라 주장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뉴스를 틀지 않고 지면으로 읽곤 하는데, 것도 가관이라. 말이 너무 넘쳐나는 세상이다. 오후께 산책을 하다 어디 나무 그늘에 있는 의자에라도 가 앉아 있을라치면 어쩜 다들 그리 말이 고픈지. 언제부턴가 나도 어쩔 수 없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나마 마스크를 쓴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사람보고 세상만 바라면 미친다. 모두가 마귀새끼가 된다. 덩달아 으르렁거리며 너는 어느 쪽이냐고 편을 가른다. 최소한 우린, 주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들이 아닌가! 나는 누구의 늘어지는 말에 입을 틀어막듯이 저의 말을 끊었다. 최소한 우리는… 기도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도 되는 사람이지 않았던가?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시 4:1).
우리는 주께 아뢸 수 있고 가만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자들이 아닌가?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17:1).
주가 아니면 누구에게 하소연하겠나? 사람 붙들고 떠벌여봐야 그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는 위인인데,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격려한단 소린가? 세상은 사람이 우선이라 하지만 이는 모두 미친 것들의 헛소리일 뿐이다. 사람이 우선도 먼저도 아니다. 모두가 문제투성이다. 내남없이 지쳤다. 피곤한 영혼들이다. 막무가내로 자기를 사랑하며 산다. 누구도 골방을 원하지 않는다. 사랑을 잃은 연인들 같다. 둘만의 골방은 괴로울 뿐이다. 시시덕거리며 삼삼오오 모아서 서로들 편먹고 떠들어 댄다. 아…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39:12).
우리의 실상을 주가 아신다. 그 주님은 골방에서 기다리신다. 오늘 아침, 나는 짧은 말씀 한 구절을 엄히 읽는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문득, 진지하고 정직하게 이를 두고 두려운 마음이 들까? 내가 정말 주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가 맞을까? 그런데도 세상과 덩달아 미쳐 날뛰며 외로움을 호소하고 사람의 관심과 사람의 사랑을 호소하며 전전긍긍, 어느 봉고차에 실려 다니는 몸을 파는 아니 영혼을 파는 구차한 삶으로 연명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성경은 우리의 멱살을 잡고 외치신다. “왕이 노하실 때에 그들을 풀무불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리니 불이 그들을 소멸하리로다(시 21:9).”
어쩌면 우리는 너무 낭만적으로 인생을 생각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신앙도 인생처럼 장차 들어갈 천국에 대해서 허튼 꿈을 꾸며, 안이하게 바라고, 의당 그러려니 하는 구실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정말 나는,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확신하는가? 그런데도 그 모양으로 살고 있단 말인가? 미친 사람들과 마귀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아무런 구분도 없이? 이에 오늘 시편은 간절한 음성으로 되뇐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2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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