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전봉석 2021. 9. 18. 05:19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 25:4

 

 

말씀이 대부분 ‘여호와 하나님이’ 하는 주격으로 모든 문장에서 일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바로 하고 있다. 결국 사람이 사람으로만 있으면 흙의 존재와 다를 바 없으나 생기를 그 코에 불어 생령이 되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그 ‘땅’의 형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이는 앞서 하늘에서 쫓겨난 사탄이 땅을 오염시켰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땅을 하나님이 운행하신다! 그것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비로소 ‘생령이 되었다.’ 그 속에 역시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결국 그 땅도 사람도 하나님이 운행하시고, 생령으로 존재하셔야 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기이하다. 이를 바울 식으로 풀어서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고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자랑할 수 없다. 곧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 그러한 것을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으로가 아니라 생령으로 산다. 보면 누구의 이력이 저를 말해주듯 어느 대학을 나왔고 어디서 일하며 무슨 내력을 가졌는지, 그 사람을 들어 말하는 데 있어 앞서 주격이 뒤바뀐 세상을 살고 있다. 한참 누구에 대해 소개한 후 ‘그런 사람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를 설명할 때면 그 일과 그 일이 무슨 상관인가? 하는 의아함도 생긴다. 하여튼 ‘생령’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생기’를 잃으면 그 땅의 형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이가 그를 지배하게 된다. 그런 저가 어느 대학을 나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가,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누가 설마,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봐서 두려워… 하고 울먹이는 누구에게 나는 우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우리가 누구를 동정하고 측은히 여겨 저를 대신하여 주께 기도할 수는 있지만, 동조하여 저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가 자살을 한다 해도 그건 저의 거기까지다. 또한 그가 오늘에 겪고 있는 여타 어려움의 본질은 주를 떠나 그의 ‘생령’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 주를 경외함이 있다면 (오늘 시편의 찬송처럼) 물론 혼란하고 공허하고 흑암의 깊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지만 그럼에도 주를 바랄 것이다. 마치 욥과 같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런 거 보면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듯이 오늘의 현상은 어제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는 암으로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새로운 여자를 두었다. 동생은 여자를 어머니라 불렀지만 그는 여자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저 둘은 권사와 장로로 신앙이 좋았다고 한다.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에 선호하는 비혼처럼 부모도 그냥 살았던 모양이다. 나름 완벽주의자라고 하는 그는 그때부터였을까? 신앙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틈이 벌어진 사이로 균열이 생겨나 성곽이 무너지는 것처럼 저의 믿음은 반감이 차지한듯하다. 그렇게 십여 년 후 부친도 암으로 사망했다. 그에게는 이제 혈육이라 하면 동생밖에 남지 않았다.

 

동생은 결혼을 앞두고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집안 병력을 들어 형제의 골수이식을 권하지 않았으나 그는 동생을 위해 다니던 대기업도 그만두었다. 다행인지 저의 골수는 적합하였고 이식 수술도 성공적이었다. 회복을 기다리며 극진히 동생을 살피던 중에 몸은 거부반응을 일으켰고 저의 기대와 희망은 다시금 깡그리 무너지게 되었다. 암으로 고통당하는 모친을 위해 얼마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했던가. 비록 부친에 대한 앙금은 있었지만 저가 암으로 고통당할 때 또한 얼마나 주께 바라고 빌었던가. 그리고 이제 하나 남은 동생마저 그렇게 마구 흔들어대는 하나님을 저는 원망한다. 뒤늦게 신앙으로 믿음을 키워가는 아내를 박해하고 하나님에 대한 분풀이를 아내에게 퍼붓고 자신에게 쏟아낸다. 정신과에서 숱한 약을 처방 받아 먹고 있지만 동생의 고통에 자신의 호소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런 이를 곁에서 지켜보며 어찌 해야 하는지 몰라 누가 물었다. 그러게, 우리가 무슨 말로 위로를 하고 저를 변호할 수 있겠나? 저러다 스스로 안 좋은 선택을 할까봐, 누구는 노심초사하며 어찌 해야 할지 물었고 나는 너무 빤한 답지를 손에 쥔 사람처럼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다.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생령을 잃은 사람은 사리분별이 어렵다. 뭐라 이른들 들을 리 없고, 다만 저를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고약한 것은 하나님을 아무리 원망한들, 하늘을 향해 종주먹을 휘두른들 분풀이가 안 되니까 공연히 아내를 트집 잡고 못살게 군다. 믿음으로, 신앙으로 주 앞에 서려 하는 아내를 박해하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대신하고 있다.

 

내버려두고, 감당하지 못할 것을 너무 마음에 두어 지레 울먹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두고 보자, 하고 일렀다. 그리 말하는 것은 늘 나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 안에 두시는 측은지심으로 누구를 위해, 그 영혼을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짓는 일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때에 은혜란 양날의 검과 같다. 가령 예수의 복음이 저들로 격분하게 한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눅 4:14-29).” 결국에 은혜를 잃은 뒤에나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30).”

 

하나님을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이에 따른 필요성을 잃지 않는 것이 생기다. 생령으로 사는 사람이다. 오늘과 같은 시국에 이를 먼저 할 겨를이 다들 어디 있겠나?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 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잠 15:21).” 그러니 숨겨진 삶의 면면은 혼동과 공허와 흑음의 깊음이 더해질 따름이다. 아니 본래의 속성으로 사는 꼴이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시 3:3).

 

이것은 생령으로 사는 자의 날마다의 고백이다. 저는 날마다 경험하고 또 안다. 이를 체험하고 일상으로 받으며 산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18:35).

 

곧 우리가 무엇으로 사는지, 나 같은 게 뭐라고 주가 그리 돌보시고 귀히 여기시며 주의 영광을 더하시는지를 찬송하게 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8:4-8).

 

앞서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누구의 사연을 전하며 은연중에 저를 두둔하고,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는 투의 판단은 사람으로 살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겠으나…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나는 이번 주에 두세 차례 같은 말을 반복한 것 같다. 저들 말끝에 ‘이해는 가요!’ 하는 동조적인 언사를 바로 하였다. 우리가 대체 무얼 이해한단 말인가? 그리 행하시는 하나님을? 또는 그리 반항하고 원망하고 제멋대로 구는 사람을? 저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과 심정을? 이 모두는 주제넘은 마음이다. 나는 성경에서 가장 이해가 가는 존재가 타락한 천사 사탄이다. 오죽 하나님 같이 되고 싶었으면 하나님이 되려 했을까? 처음 사람의 마음과 그 의도는?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가룟인 유다를 이해한다. 저는 열심당원으로 애국심을 기반으로 예수에게 뭔가 기대를 걸었다. 그리스도로 저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되어줄 것이라 여겨 열심을 다해 따랐다. 이내 저의 배신감과 실망은 자신의 노력과 기대에 비례한다. ‘이해는 돼요!’ 할 때 ‘사람이니까’ 개처럼 물고 뜯고 살 수도 있다는 뜻인지.

 

나는 저에게 아닌 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나의 말이 저에게 너무 냉정하게 들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해해서? 같이 여름휴가를 가주고, 술잔을 기울여주고, 토닥토닥 어깨를 감싸주며 위로하는 게 주의 사역이라 생각하면 큰일 난다. 되레 안 하니만 못한 결과로 치닫게 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하나님은 왜 더 질 좋은(?) 재료로 사람을 만드시지 않으셨을까? 왜 주는 우리 같은 미련하고 한심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들어 주의 일을 하시는 것일까? 바울의 진술을 통한 성경의 일갈은 통쾌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곧 스스로 잘난 줄 아는 것들에 디하여,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이에 따른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는 하나뿐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부모의 목숨도 귀하고 하나 남은 동생의 안타까운 사정도 속성할 일이지만, 그것으로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우리의 교만과 아집과 자기 의가 그처럼 강하고 모진 까닭이다. 결국,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이 오늘 창세기 말씀의 핵심이라 확신한다(고전 1:27-29). 왜 그런 재료로 사람을 빚으셨나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질 좋고, 완벽하고, 완전하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게 하자가 있다. 피조물의 숙명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이 만든, 덜 하나님스러운 것과 영생의 땅,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려고 사람을 만드신 게 아니다. 그러실 거였으면 사람보다 천사가 낫지.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하나님처럼 하나님과 같은 존재들과 그 영광의 시간을 함께 누리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려면 그 본질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 해도, 아니 그 이상의 하자투성이라 해도 하나님이 그 위에 운행하시면 완전하다. 그 속에 생기를 넣어 생령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면 된다. 곧 이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게 하시려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사람은 좋고 또 아무리 최고의 것을 써서 만들어도 사람일 뿐이다. 잠깐이지만 처음 사람이 완전하였던 것은 저가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가진 생령이어서이다.

 

오늘 시인은 바로 이것을 구하고 바라며 기도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 25:4).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게 무슨 전염병의 창궐보다 삽시간에 사람을 매료시킨 이때에 남자 없이 아이를 갖고, 저 혼자 키우는 것을 마치 영웅이나 된 것처럼 으스대는 이때에… 하나님이 두신 정상과는 거리가 멀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곧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다고 요즘 유행처럼 다시 번지는 동거의 관계가 아닌 ‘돕는 배필’의 관계로 서로에게 두셨다. 보니까 젊은 층에서 뿐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 사이에서도 결혼의 관계보다 비혼의 관계를 더 선호한다. 어느 기사를 보니 그에 따른 법적인 경제적인, 심지어 서로의 집안에 구속되는 점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관계의 변화라고 한다. ‘이해는 간다!’ 이래저래 얽히고설키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앞서 누구의 부모도 장로면 뭐하고 권사면 뭐한가?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이 살면서도 남남으로 지냈으니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는 다른 일처리가 홀가분하다. 어머니도 아니고, 그저 아버지의 여자로 스쳐가듯 존재한 사람에 불과하다. 마치 끊어진 전선인 것을 아무리 콘센트에 꼽고 불을 밝히려 한들? 뭐라하면 요즘 다 그렇다는 데야,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관계는 공허다. ‘친절한 타인’으로, 적당한 마음으로 족한 사이가 늘고 있다. 하긴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그게 뭐 그리 흠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시대에 맞춰 아주 지랄들을 한다. 그러면서도 믿는 자로, 장로고 권사인 것을 내세우며 뭘 어쩌라고? 아무리 화려하고 근사한들, 끊어진 전선으로는 불을 밝힐 수 없다. 맛을 잃은 소금으로는 밖에 버려져 밟힐 뿐이다. 쓸모가 없는 것이다. 정신 차리자. 부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닌 건 죽어도 아닌 거고 긴 건 죽어도 긴 것이다. 하나님이 그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이유다. 생기를 잃으면 생령으로서는 소멸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있지 않으면 화려한 저의 이력도 신앙경력도 쓸모가 없다. 그때 가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다 헛되다. 흑암이 깊음을 더하는 세상에서 빛을 잃으면 우린 똑같이 흑암일 뿐이다. 희미하게라도 좀 나은가? 부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한순간 훅, 하고 간다. 저에게 끌려가 스스로 죽어야 할 정도라면 어쩌겠나? 죽어야지. 불쌍하지. 안 됐으니 울어줘야지. 그런들? 정작 무서운 것은 이 땅에서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이를 알고 더 많이, 더 확실하게 알고자 하였던 것이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5).

 

어쩌다 잠깐 짬을 내서 묵상을 하고 기도를 한다. 것도 자기 요구만 늘어놓으며 하나님이 뭐라 하시는지는 들으려하지 않는다. 누구의 슬픔으로 찔끔,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중보도 적당하다. 그래놓고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을 피할 줄로 여긴다. 어림없다.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아니면 저 시편의 말씀이 이상한 것일까? 나는 누가 처음 글을 쓸 때 하루에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쓰라고 당부한다. 어떤 날 시간 내서 열 장을 쓰느니, 하루에 한 장씩 열흘을 꾸준히 쓰라고 이른다. 같은 맥락으로 안다. 우리가 주를 바랄 때, 적당할 때는 잊고 있다가 필요해지면 114로 문의하듯이 주를 찾는다. 그래놓고는 주를 원망한다. 익숙하지 못한 하나님이 하나님 탓인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아니 최소한 처음 사람 아담의 때부터 우리와 함께 계셨다. 그럼에도 어렵다, 낯설다, 어색하다 하는 따위로 면구스러워하다 제 맘에 들지 않으면 원망은 또 왜 그렇게 해대는지? 그 정도로 친밀하기는 했었나?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1).

 

나는 오늘 시편의 첫 구절을 여러 번 되뇐다. 마치 다짐하고 또 다짐하듯이 되풀이 한다. 그리고 아뢰기를,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4-5).

 

부디,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6).

 

주 앞에 납작 엎드려 고한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7).

 

나야말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는데도 이만큼 더하시고 풍족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8-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