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시 26:6-7
그 존재감을 상실할 때 저는 무용지물과 같다. 아담은 어디 있었을까? 문맥을 살펴보면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하는 것으로 보아 저 또한 하와와 같이 있었을 것 같은데, 설령 다른 곳에 있었다 해도, 어찌 아무런 제지도 않고 아내의 처사를 수용한 것일까? 다시 천천히 읽어본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앞서 여자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는 사탄의 의도적인 질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는 모호한 대답을 하였다.
‘~할까?’ 하는 모호함이 하와를 흔들었다. 처음부터 사탄이 ‘먹어도 돼!’ 하고 접근했더라면 방어적인 자세를 가졌을 텐데, 의견을 묻고 존중하는 듯 접근하자 하와는 우쭐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 약속언약을 파기할 수 있는 위험한 답을 하게 되었다. 여지를 두면 가차 없다. 설마, 하는 데 틈이 벌어진다. 이 정도쯤이야, 하는 곳에 반역이 꿈틀거린다. 하와는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런데 아내의 그와 같은 결정에 어째서 아담까지도 허물어진 것일까? 안 돼! 하고 말렸어야 하고, 설령 그녀가 먼저 먹었다 해도 그 심각성을 지적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으면 어땠을까? 종종 우리의 사랑은 우리로 수렁에까지 빠뜨린다.
사랑의 정의를 찾아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곧 우리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의 최고봉은 서로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으로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랑으로, 예수님은 이어서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 말씀을 따를 때 우리가 감히 주의 친구인 것을 알게 하신다. 이에 신적인 사랑을 정의할 수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즉 우리가 아직 저를 사랑하지도 않고 심지어 죄인의 상태로 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심으로 죽으셨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께서 증명하신 것이다. 서로 좋아하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이에서 동료를 위해 죽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나,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4:48).” 우리로 하나님처럼 되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탄이 유혹하던 말의 진의도 여기서 단서를 찾을 수 있겠다. 곧 하나님이 원하시던 것을 자신도 알았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처럼 되려하기 보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하였다. 사람에게도 이와 같은 죄의 씨앗을 던진 것이다. 엄연히 성경은 우리로 하나님처럼 온전한 자가 되라 하신다. 우리 스스로는 그리할 수 없다. 그러느니 하나님이 되는 쪽으로 선회한다. 내가 주관하고 판단하고 의를 이루려는 게 더 수월하다. 그러나 성경은 다시 정리해주셨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우리로 아들이 되게 하심이다. 그러기까지 해의 빛을 모두에게 고루 비추신다. 아직 기회가 있었다! 아담은 안 돼! 하고 하와를 제지했어야 한다. 설령 얼결에 그리 죄를 지었다면 이를 인정하고 주 앞에 용서를 구하며 회개를 유도했어야 옳았다. 한데 아담은 너무나 무력하게 아내에게 끌려갔다.
요즘 자주 되새기게 되는 생각이지만 사람을 보면 미친다. 그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결과는 미친다. 사랑하면 그 사랑이 지나쳐서 집착이 되고 애착이 되어 미치고,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감정으로 인하여 이내 미친다. 아,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질그릇으로 빚으셨는지 알겠다. 곧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실체로 만드셨는지를 알겠다. 스스로 결정하고 그리 판단하면 이런 사달이 난다. ‘죽을까 하노라’ 하는 식의 해석이 우리의 모호한 태도다.
누가 늘 기도를 한다. 기도를 부탁하기도 하면서 언제부턴가는 자신의 일보다 누구, 곁의 한 영혼의 이런저런 사정을 말한다. 홀로 기도굴에 들어가 기도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곁에서 이를 보고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 남편의 행세를 들려주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이를 문화의 차이로 이해한다. C. S. 루이스는 애연가로 독주를 즐겼다. ‘그럴 수 있다’고 허용하는 순간 그 작은 일에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실제 흡연의 폐해보다 음주로 인한 피해가 사회적으로 더 큰 무리가 일으킨다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모든 범죄의 현장에는 술이 있고 돈이 있고 여자가 있다. 어느 것도 내 것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장치를 두신 것은 우리로 이 귀한 복음의 진리를 질그릇에 담아주셨다. 어제든 위태로우나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8-10).” 그 중심이 분명하여 우리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는 것으로 증명된다. 고로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1).”
우리는 한없이 연약한 존재이고 질그릇 같이 연약할 따름이지만 주의 사랑으로 온전하다. 주를 사랑함으로 굳건할 수 있다. 이는 ‘타협 없는 믿음’으로만 보장된다. 가령 토요일마다 아이가 하나 온다. 어제부터는 잠언을 같이 한 장 읽고 그 가운데 한 구절을, 마음에 주시는 어떤 느낌을 따라 자신의 삶을 들추어 적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서너 주가 지나면서 아이의 성실함과 약속에 대한 책임감이 돋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히 훌륭하고 칭찬 받을 일이지만 은연중에 나는 아이가 지고 있는 어떤 무게, ‘그래야 한다는 강박적인 행동’을 엿보게 된다. 아직 뭐라 단정 짓기는 이르다. 참 고약한 일은 이런 일을 그 부모에게 알리거나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주의 선하심으로 내가 분별하고 마주해야 한다. 간혹 느껴지는 어떤 쎄-한 느낌이 있다. 쉽게는 너무 수동적이고 의무감으로 따른다. 그 뒤에는 반드시 뭐가 있다. 이쯤 생각이 미칠 때 성경으로의 글쓰기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특히 잠언은 격언조로 그 문장이 격언이나 속담과 같아서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연관되어지는 삶이 다양하다.
날짜에 따라 잠언 18장을 같이 읽고 그 가운데 한 구절을 아이고 정하고 그 의미를 해석해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 구절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글로 쓰는 것, ‘잠언으로의 자기분석 글쓰기’란 성경으로의 이해와 단정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길이다. 서너 구절을 더 해보면서 아이도 어떻게 하는지 알겠다고 하였다. 다음 한 주간은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틀리고 맞고가 없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제 날짜에 맞는 장수를 읽고 한 구절을 적용하면, 토요일에 같이 짜장면을 먹기로 했다. 나는 가끔 이렇듯 단순하게(?) 아이를 대하는 일이 어른들을 대하는 일보다 즐겁고 수월하다. 왜냐하면 어른이랍시고 여기는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경험, 체험을 토대로 하는 선입견을 떨치기 어렵다. 열에 열은 이와 같은 작업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이유도 간단하게 순순히 그리 따르는 어른이 없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시는 예수님의 예시가 이해가 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어른이라 여기는 우리 중에 ‘결단코’ 앞에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다들 풋, 하고 웃으며 에이 설마, 하고 그냥 넘기기 일쑤다. 누구와도 이와 같은 글쓰기를 시도하려고 노트북까지 들고 오게 하지만 저는 순순히 이를 행하지 못한다. 질문이 늘어지고 자기 말이 항상 앞선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성경을 읽고 들을 겨를이 없다. 결국 잠언으로의 자기분석 글쓰기는 중단되고, 것도 내키는대로 쓴다.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다고 여기는 것만 쓴다. 그 내용은 똑같이 푸념이고,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끝도 없는 주절거림이 된다. 참으로 지겨운 시간의 연속이다. 버려져 쓸모없을 말들뿐이다.
한 번은 어린이 예수가 어른 부모에게 오히려 의아한 듯 물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49-50).” 실제로 이와 유사한 경우를 나는 자주 경함한다. 아이 일로 이런저런 상담을 하는 그 부모의 오해가 아이의 심각성보다 더 심각하다. 자신들만 모른다. 저의 이해와 속단이 그릇됨을 저들은 알지 못하고 행여 이를 말해주면 저들은 신기할 정도로 동일하게 반감을 표시하고 떠난다. 공통적으로 깨닫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잘난 세월 탓이다. 자신들의 체험으로 우선하는 사고체계 때문이다. 자신들이 자식을 겪어봤기 때문에 잘 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아이에 대해 속단하고 앞서 아이의 문제를 까발린다. 그럴 때 나는 치가 떨린다. 저가 더 문제다. 이를 말해주기는 어렵다. 아이에게서 좀 떨어져 거리두기를 할 것을 권한다. 물론 열에 열은 그렇게 못한다. 미친 짓이라 생각한다. 이미 미친 걸 모른다.
오늘 어쩌면 하와-‘모든 산 자의 어머니’의 착각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언제부터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긴 것일까?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것을 ‘죽을까 하노라.’ 하는 해석으로 희석시킨 것은 교만이나 반역의 의미보다는 그만큼의 친밀함에 따른 표현이라 짐작된다. 자신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는 착각,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렇게 정말 죽이실 리 없어! 하는 어떤 좋은 의미에서의 신뢰와 믿음이 문제의 화근이었다. 술 한 잔인데 어때? 하는 심정도 같다. 스스로 허용하는 범주가 죄의 틈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당해본 베드로도 말하길,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의 화근은 자신이 잘 안다고 여기는, 친밀감 내지는 체험에 대한 확신이다. 그래서 나는 간증을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예전에 어땠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 살아야 한다. 십수 년을 같은 은혜를 우려 그에 따른 체험으로 기반을 둔 판단은 오늘 하와의 어처구니없는 해석과 다르지 않다. 그리 함께 있던 아담의 무력함도 다르지 않다. 사람을 보면 그렇게 미, 친, 다. 그저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녀의 결정은 뭐라도 옳게 봐준다. 하나님을 경외함을 순간적으로 상실하였다. 이처럼 사랑은 아름다우나 가혹하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그러할 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8).
사람의 사랑의 한계다. 인격적인 사랑은 참으로 고결하고 귀한 것이나 그 한계는 말씀을 폐하고 은사도 그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폐할 수 있다! 그 결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그러니 사랑은 모든 사람의 화두이면서 화근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게 제 몸을 사랑하듯 하라 하신 말씀이 새계명이기는 하나, 앞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 사랑의 진수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일까? 여기에는 ‘먼저’가 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무조건 위하고 더한다고 해서 살리는 사랑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죽이는 사랑이기 십상이다. 이에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자기 희생이란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4-15).” 하나님께 향한 찬송의 열매로 이 모든 게 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오늘 시인은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시 26:6-7).” 우리의 남은 바 사명이다. 자식 잘 키워 뭐하겠나? 나중에 주 앞에 서서 몇 명의 자식을 낳고 어떻게 잘 키웠는가로 판단하실까? 자식은 우리 태에 맡기신 기업이다. 나는 요즘 누구의 자식 사랑이 병적이라, 쩔쩔매는 저의 몰골이 흉측하게 여겨진다.
내가 어찌 하려 하는 모든 결정은 다만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며 새삼스러운 것이다. 여태 그 곁을 같이 하며 지내던 게 남의 말 한 마디에 혹,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하여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더는 우리 힘으로 생명나무로 들어갈 수 없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24).” 이에 오늘 시편의 기도가 간절하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시 26:2-4).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8-9).
말씀을 중심에 두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도록 오직 주만 바라며 살 수 있기를. 나에게 보내시는 한 영혼을 두고, 나는 저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살핀다.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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