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전봉석 2021. 9. 17. 05:28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1:3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며칠째 어떤 우울감이 두통처럼 가시지 않는다.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억지로 풀려하기보다 내버려두고 입을 다문다. 서로의 거리두기가 유용할 때도 있다. 너무 바라고 구하는 것으로 인해 내가 소진될 수 있다. 성경은 ‘어둠 속에 복을 감추셨다’는 것을 일깨운다.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사 45:3).” 우리의 복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는 것이다. 어둠이나 빛이나, 어려움이나 즐거움이나 우리에게는 동일한 조건이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어떤 날은 이렇고 어떤 날은 저럴 수 있다.

 

그럼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 간단한 성경의 원리 앞에 승복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그때마다 다른 기분처럼 휘둘려 안달할 수는 없다. 구름 같은 믿음이 있고 산 같은 믿음이 있다. 두둥실 구름은 자유롭고 높다란 것 같으나 언제 흩어지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묵직한 산은 굳건하여서 어떠하든지 흔들림이 없다.

 

이런저런 누구의 사연을 두고 나를 비추어본다. 때론 나의 나 됨이 그래서 유용하다. 내 것이 저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동정하게 한다. 성령도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것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무엇을 어찌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오히려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 거 보면 사람만 고단한 게 아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2).” 오늘 창세기 1장에서 만물을 하나하나 지으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주의 마음을 마주하면서, 죄로 인하여 사람은 물론 모든 만물이 고통 중에 놓인 것을 묵상하며 안타깝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4).” 피조물도 우리도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그럴 수 있는 게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까닭이다. 아무나 느끼고 기다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무병장수하여 오래 살기를 바라나 그것이 복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누가 기도삽입을 하여 생명을 연장하며 죽음의 목전에 이르렀다. 연세가 아흔넷이라 여한이 없을 것 같은데 유족들의 마음은 다른 모양이다. 여기서도 문득 서로의 다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소망이 아무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곧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25).” 곧 오늘 우리의 인내는 목적이 있는 소망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는 것이다. 이를 안다는 것은,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시 139:12).

 

어디에 어떤 지경으로 있든 우리는 그 안에서 주의 섭리를 구한다. 오늘이 힘든 것은 몸에 밴 어제 때문이다. 아이 일로 쩔쩔매는 누구를 보며, 또는 그의 신랑을 원망하다가도 실은 사랑을 구하는 것이어서, 그에 따른 결핍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으로 ‘몸에 밴 어린아이’의 일이다. 때론 저의 열심이 저로 눈 멀고 귀 막혀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로 주를 바람은 ‘흑암과 빛’이 주에게 같음과 같다. 어떠하든지 주는 함께 하심에 대하여,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4).

 

나의 영혼으로 알게 하심이 단순히 어제오늘의 발생한 일로 그러한 게 아니다. 몸에 밴다는 것, 어쩌다 11시를 넘겨 잠이 들었는데도 몸은 평소에 일어나던 시간에 눈을 떴다. 어른으로 살면서 아이일 때의 일을 그대로 일삼고 있는 것을 마주할 때도 있다. 그래서 믿음도 자란다는 것,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그러니 ‘어른아이’로 살려니까 애를 낳고도 아이만 못한 더딘 성장을 보이는 어른이 있다. 저의 열심은 ‘낭비하는 헌신과 위험한 열정’이 된다. 이는 아무 곳에서나, 아무렇게나, 아무 것으로나 예배하는 것과 같아서 자기들 좋을 대로 하게 한다. 그래서 저의 기도나 헌금이나 찬송이나 감사는 즉흥적이다. 그것으로 됐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심지어 누구는 분위기, 장소, 느낌으로 연출한다.

 

성경은 묻는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사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53:13-14).” 곧 우리의 구별됨이 우리 믿음의 척도이다. 그 시간과 장소는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다. 하는 일과 그 가운데의 역할도 우리의 선택으로가 아니다.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 내가 하려고 하면 틀림없이 사달이 난다. 부모로 사는 일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는 일도,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만 보면 미치게 돼 있다. 내가 나를 대하는 마음도 같다. 너무 예민하다는 것, 저만치 끌려 다니는 구름과 같다. 구름과 같은 신앙은 헛되다.

 

우리의 드릴 영적 예배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나의 몸’ 곧 나의 시간, 장소, 일, 생각 그 모든 것을 통틀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 가령 내가 ‘아픈 아이’를 대하는 일은 의무감으로가 아니다. 애써 그리해야 하는 일로서도 아니다. 측은지심으로는 더더욱 아니다. 이 모두는 헛되다. 주가 두시는 마음, 아이는 나름 열심을 다해 성경을 필사한다. 나는 이를 응원하며 같이 시간을 맞춰 점심이라도 먹는다. 아니면 돌아가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으로 아이의 오후가 너무 길다. 그리 마음이 쓰는 일, 성령으로란 내 의지와는 다를 수 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아이와 같이 대화를 하거나 어떤 것을 두고 뭐라 이르는 것이 온전하게 소통되지는 않는다. 이 말을 하면 저 말을 하고, 실은 말뜻을 알지 못한다. 그런 아이와의 시간이란, 구별된 목적과 같다. 이를 성경적으로 보면,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7).

 

즉 어떤 이의 이런저런 인생의 사연을 두고 또는 아이의 엉뚱한 답변으로 황당해하면서도, 오늘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한다는 것.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이 좋음을 같이 공유하게 하시려고,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나는 내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신다. 하물며 가족이라 해도 또는 어떤 일을 두고, 우리의 헛된 열정이 그릇된 우상숭배가 된다. 나는 어느 목사의 조문 행렬을 보고, 저의 이력을 기사로 읽으며 오히려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를 애도하고 기리는 것은 알겠는데 그와 같은 평가로 주 앞에 서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곧 하나님 외에 어떤 명분도 모두 우상이다. 그에 따른 ‘헌신과 열정’이 우리 영혼을 망칠 수 있다. 개중 두드러지는 것은 자식에 대한 헌신과 나라를 위한 열정이다. 애국심보다 사람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것도 없다. 대선에 출마하는 모든 위인들의 작태를 보면 이를 위해서는 같이 했던 동지도 몸담았던 둥지도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자기 아니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보다 무서운 염병도 없다. 그래놓고는 자신도 환장할 노릇이다. 환장(換腸)이란 말 그대로 비정상적인 상태다. 꼬인 창자를 바꾸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게 되신 건지 알겠다. 자기부인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환장’할 노릇이다.

 

이어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오늘이 어찌 귀한가를 알게 하신다. 망설이다 세월 다 간다. 주춤거리고 쭈뼛거리다 인생 끝난다. 아흔넷으로 기도삽관을 하고 연명치료로 시한부 생을 마감하고 있으면서 그 후손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이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며 고작 맞바꾼 것이 남부럽지 않은 생이었을 텐데, 그래도 생을 꽉 채웠으니 호상이라 할 수 있겠나?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심은 그러자고 한 게 아닌데,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안 믿는 자들을 두고 이런 소릴 하는 것도 격에 맞지 않는 일이겠지만 오늘도 그 곁에 기회가 있는데도 저들은 엄연히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값을 어찌 영원히 짊어지고 살까? 나는 종종 그것이 가장 두렵다.

 

까짓, 이 땅에서의 생이야 정 뭐하면 얼마든지 끝장낼 수 있는 일이고 가만히 내버려둬도 조만간 끝장날 일이지만… 어릴 때부터 나에게 가장 두려운 의미는 영원이었다. 영원이라는 그 시간 너머의 측량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하여 나는 생각하다 늘 오금이 저렸다. 그야말로 더는 죽을 수도 없는, 끝이 없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간단명료한 증명 세 가지, 자기를 부인하고, 보내신 이의 일을 하고, 예수님도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보내심을 다하는 생으로서의 일생이 귀한 것이었다. 그러니 어디로 어떤 일로 보내시고 부르실지 누가 알겠나? 그럴 때 가장 큰 난제가 바로 자신의 신념이어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그런 거 보면 내 곁의 천주교인들이 왜 그처럼 선했는가를 알겠다. 저들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선행으로 더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선에 선을 더하고 의에 의를 행해야 구원의 자격을 얻을까?

 

‘사랑이 없으면’ 곧 성령의 주도적인 주관하심이 없이는 말짱 헛것이다. 신랑 목사의 교회 헌신과 사모로서 또는 한 사역자로서 누구의 역할이 너무 도를 넘어서는 데서 나는 저들의 갈등을 짐작하였다. 그렇게 수고한 후 스스로에게 상을 줄줄은 알면서 상대는 헤아릴 줄 모른다면 이보다 더 큰 모순이 어디 있겠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상 모든 독재자들이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 무력을 정당화하고 그 어떤 공권력도 합당하였다. 온통 모순인 세상에서 오늘 말씀은 단 한 줄의 명제로 우리를 일깨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우리가 어찌 세우고 건설하여 이루어진 게 아니다. 바른 구별만이 살 길이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다른 모든 것은 우상이다. 스스로의 만족보다 무서운 숭배는 없다.

 

아, 그래서 주님은 골방으로 들어가라 하셨구나.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기도밖에는 달리 길이 없는데, 기도란 어둠 가운데 감추신 하나님의 보물을 찾는 일이다. 눈을 꼬옥 감으면 어둠이 가득 차지만 거기에서 풀어져 나오는 아룀과 고함이 주를 인정하는 일이었으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결국은 살아봐야 한다는 것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한다. 비혼이 유행처럼 번지고, 실용적인 것이 가치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젊은이들은 물론 나이 든 노인들까지도 살아온 값을 못하고 이리저리 두둥실 떠다니는 꼴이니.

 

그야말로 나 하나 중심 바로 잡고 사는 일이 급선무이다. 모두가 어떠하든지 말씀으로 말씀에 중심을 단단히 잃지 않은 산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도, 중언부언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만 의뢰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죽은 자처럼 사는 일, 묵묵히 오늘도 오늘이 시작되는 것으로 감사하며. 고단함이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5).” 위로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씨름하며 사는 삶도 가치가 있다. 다들 청맹과니로 살면서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이 지경의 현실을….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3-4).

 

그리하여 오늘부터 새로 마주하게 되는 창세기에서 나는 성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묵상하게 된다. 이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하여,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9-30).

 

이를 오늘 말씀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심으로 되짚어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오늘에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것이라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7-28).”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는 삶이다. 곧 오늘 우리의 충만은 은혜와 진리의 충만이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정복함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는 것으로, 다스림은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30).” 그러므로 ‘어쩌다 오늘’은 없다. 또 한 날의 절호의 기회이다. 이는 모두 더 좋은 부활을 위함이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곧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35).” 그러한 삶의 목적은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앉아,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 24:7-8).

 

다시 한 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