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전봉석 2021. 9. 28. 05:30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3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시 35:1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괴로움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마치 조수간만의 차로 물이 들고 나는 펄의 얼굴을 가졌다. 사는 날들이 그러한지 들고 나는 흔적으로 육신의 골 깊은 사연이 그러한지 나는 미처 알지 못한다. 밀물이 들어찰 때면 모든 게 덮여 공평하게도 배들은 해수면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잡은 고기를 내려놓는다. 하루에 두 번 썰물로 밀려난 펄은 얼굴을 달리한다. 서로 다른 골마다 깊이가 다르고, 가끔은 펄 한 가운데 박혀 오도 가도 못하는 배를 보기도 한다.

 

집 근처 소래포구에 나가본 것도 한참이 되었다. 예전의 소래포구는 연상할 수조차 없이 변하였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궁벽한 살림의 땅은 온통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섰고, 소래포구의 옹색한 흔적만 남았다. 말이 좋아 포구지 거대한 아파트단지의 한쪽 귀퉁이를 빌려 쓰는 신세가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허허로운 펄 위로 조그만 협궤열차가 다녔다. 이쪽과 저쪽을 잇는 바다 위로 난 선로로 사람들이 건너다녔다. 사람들이 선로 위를 지나 바다를 건널 때면 뒤뚱거리며 뒤따르는 협궤열차는 속도를 줄이고 사람들의 보폭을 따라 위태롭게 바다 위를 건너곤 하였다. 아주 가끔 소래포구에 가면 나는 멀찍이 아파트단지를 등지로 펄을 바라다본다. 육지로 오르지 못한 펄은 골마다 사연이 다른 듯 굽이굽이 그 형체도 모양도 다르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들 사느라 여념이 없는 것은 같은 모양이다. 나는 시장을 좋아했다. 특히도 새벽시장에 나가면 분주히 오가는 도매상들의 발길을 피해 한쪽 귀퉁이에서 국수를 말아먹곤 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말씀 묵상을 하다말고 뜬금없기는, 생각은 펄을 들고 나는 것처럼 이유가 없다. 막냇동생은 이 와중에 어깨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필리핀에 사는 둘째네는 뎅기열에 온 가족이 홍역을 치고 있다. 누가 코로나 백신 1차 접종을 하며 문자 끝에 저는 살아야 해요, 하는 말을 남겼다. 나는 그 말속의 출렁거림 때문이었는지, 육신을 입고 산다는 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궁색한 일인가를 생각하였다. 앞서 시편 67편의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우리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새삼 가슴 깊이 박히는 듯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시 67:1).

 

오늘 아침은 긍휼의 은혜로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도 그러하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이와 같은 말씀이 삶 가운데 역사하는 삶은 복되다. 다윗은 이를 놓치지 않았고,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시 35:1).” 하고 주께 아뢰고 있다.

 

넘실거리는 축복의 물결과 달리 검은 펄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마음이 숙연해지곤 한다. 억새가 주변을 에우고 저쪽으로는 염전이 있던 곳이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소래포구는 왠지 나에게는 우리네 인생을 축약해 놓은 듯 함의적이다. 가끔씩 염전에 나가보곤 했었다. 밀물로 들어찬 바다를 가두어 인부들은 널따란 판막음을 하고 그 위에 고인 바다를 햇살에 말리며 쓸고 또 쓸어 며칠을 에우다보면 하얗게 소금이 내렸다. 행여 소나기라도 내리면 물을 거두어 염전 안에서 비를 피하였다. 멀찍이 서서 인부들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면 삶의 고단함이 저절로 끼쳐와 혀끝이 짰다. 들고 나는 물을 가두어서 소금을 내기까지 인부들은 매일 땡볕을 등지고 같은 일을 반복하였다. 나는 가끔 사는 일에 지칠 때면 염전에서 보았던 인부들을 연상한다. 또는 시장통 사람들의 단내 나는 새벽장사를 떠올린다.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죄로 인한 이 땅에서의 삶이 때로는 버겁고 어렵다. 어제는 ‘아픈 아이’를 오게 하여 같이 점심을 먹었다. 요즘 들어 어찌나 성경을 열심히 옮겨 적는지, 다시 시작한 시편을 끝내고 잠언도 지나 이제 전도서를 필사하고 있다. 뭐라도 쓰면 지능이라도 좀 나아질까 하여 자기 이야기를 쓰게 하였었는데, 나로서는 저의 글을 어찌 지도하고 다듬을 실력이 되지 못하였다. 누가 물으면 저의 의식은 일반인이 한 장씩 읽어내는 의식을 듬성듬성 몇 장씩 건너뛰며 읽어내는 듯하여, 의도와 그 흐름은 알겠는데 어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마치 검은 펄 위로 난 골처럼 어느 날은 깊고 넓었다가 어느 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드러난 골은 본래의 자리가 아니었는지…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성경을 필사하게 한 것이다. 이제는 아이도 그것으로 주의 위로와 평안을 소유한듯하다. 더는 내가 재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길을 따라 바다가 들고 나듯 은혜를 체험하는 것 같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저것이 누구 탓인가 하여 여러 번 그 부모를 생각하였던 적이 있다. 저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그래서이겠거니, 하고 생각하였던 것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헛된 생각이 되었다. 아이는 아이의 세계를 산다. 주가 더하시는 날을 다하기까지 우리는 각자 자신의 골을 따라 물이 들고 나는 길을 연다. 검은 펄은 어두운 세상을 연상하게도 한다. 그 위로 바다가 가득 들어차는 만조 때면 멀리 바다로 나갔던 배들이 들어오고 이를 알리는 듯 갈매기 떼도 극성이다. 시인은 이를 노래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어둡고 캄캄한 이 땅에서 우리의 빛은 구원의 주로부터다. 누가 오는 날이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닐 때면 아이의 퇴근을 기다렸다가 같이 점심을 먹는다. 아니면 녀석은 혼자 돌아가 덩그러니 빈 집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뭘 하죠? 하고 문자를 날리곤 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을 간수할 수 있어서 성경을 쓰고 게임을 하고, 성경을 쓰고 산책을 하고, 성경을 쓰고 밥을 먹는다. 요즘은 새로 보드를 산다는 데 마음이 들떠서, 녀석은 계속 무슨 말을 하는데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가만히 같이 산책을 하다 사람이 가장 적은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점점 나의 자세도 달라지는데, 굳이 다 이해하고 알아듣고 동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그 곁에 또는 누구의 문자에 응대하는 것으로 족하였다. 내가 뭘 하게 하시려고 여기에 두시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펄 깊은 골 따라 바다가 알아서 들고 나는 것처럼 주의 은혜와 긍휼하심은 나로 거기 있어 가만히 알게 하심으로 영광을 나타내신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그러니 오늘을 살면서 나는 자꾸 힘을 빼려하는데, 억지로 아이와 대화를 이어가려 하면 뭔 소린지 원! 어쩔 땐 짜증이 올라온다. 누구의 끝도 없는 염려와 공연한 푸념도 들어주는 일로는 한도 끝도 없다. 저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기껏 대화 끝에 ‘저는 살아야 해요!’ 하는 말을 하였으니 그 속을 누가 모를까? 아직 어린 아들과 미우나 고우나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신랑의 목회를 두고 하는 말이었겠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길로 가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가 길인가를 밝혀줄 빛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어제는 또 유난히 다리가 저리고 시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후께 비가 내렸다. 잠깐 소파에 누워 등을 지지고 오전 일찍 갈피를 잡아둔 설교원고 초안을 보다 잠이 들었다. 다들 사느라 급급하고, 저마다의 고통을 이고 지고 사는 생의 최전방에서 나는 한가로이 내게 놓으신 길을 따라 주의 축복이 통하여 오가는 것을 상상하였다. 그럴 때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도 복되었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2).

 

이를 알게 하시려고 나를 저 앞에 두셨는가? 나 같은 사람한테 무슨 이런 일까지 일일이 말하고 의논하려 드는가, 하고 짜증이 일다가도 오죽하니 그럴까? 하고 누구를 대한다. ‘아픈 아이’와 친구한다. 특히 녀석은 까불까불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고 떠든다. 나는 병적으로 마스크를 벗지 못하게 하고 주저리주저리 뭐라 하는 녀석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다. 난데없기는… 점심을 먹으면 커피도 한 잔씩 먹곤 하는데, 공부하고 있는 형 거라면서 조각케이크를 하나 같이 포장하여 내놓았다. 우리는 각기 저마다의 세계로 사는 것 같으나 그 모두가 하나의 개펄이고 그 위로 난 여러 갈래의 골 같다. 골 따라 물이 들고 나며 은혜의 정도는 물론 다를 테지만 나는 가끔 장성한 녀석의 미래가 염려된다. 목사님, 저 연애하고 싶어요. 나중에 여자 친구 생기면… 하면서 요즘 부쩍 마음이 그런 모양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 3:8).”

 

나는 가만히 말씀을 음미하고, 이글거리는 볕에 바짝 말라 소금이 되는 염장의 손질을 생각한다. 그 더디고 고단한 반복의 시간이 만들어낸 바다의 덩어리다. 저 작은 알갱이 안에 어디 고래의 숨결이 서려 있을 테고, 느린 거북이나 문어, 또는 저 먼 바다의 온갖 작은 미생물들이 연합하여 짠맛을 내는 것이겠거니. 나의 상식은 얕고 미천하여서 이게 맞는지 틀린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은 어째서 나 같은 이를 보란 듯 목사로 세우신 것일까? 다들 어떤가 모르겠으나 나는 그야말로 평생을 도망치다 억지로 끌려온 셈이라, 그 은혜는 남다르다. 여느 교회와 비교해도 또는 어느 목사의 목회를 연상해도 내가 하는 일이란 것을 두고 주의 일을 준행하는 목회자라 하기에는 그야말로 미천하고 보잘것없어서 누가 물으면 감히 목사라고도 말하기조차 민망해 한다. 그럼에도 내 안에 두시는 간절함이라니! 더는 세상을 바라기보다 주를 바라고, 지긋지긋한 누구의 일로 공연히 덩달아 헉헉거리면서도 내 안의 절박함이 곧 주의 것이 아니겠나? 하고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하여,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3).

 

고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는 이와 같은 고백이 언젠가는 나에게도 거침이 없는 의지가 될 수 있겠지? 과연 지금은 어떠한가? 하고 스스로 물으면, 나는 아픈 게 제일 싫다. 귀찮고 불편한 것도 참 싫다. 남의 일에 참견하고 끼어드는 것은 더 싫다. 하물며 저 한 영혼이라니!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 개나 물어가라 그래! 하며 하나님을 더 멀리 하고 살려고 했었는데, 아뿔싸… 어쩌다 연결이 되고, 보내시는 한 영혼이 내게는 벅차다. 소금은 받은 인부들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도 내려 여러 개의 주름이 골이 깊이 패여 바다가 들고 난다. 사는 게 다들 그러려니, 노인이 된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펄 위로 들고 나는 물살처럼 그 골마다 오고 가는 세월이 하염없을 것인데,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아, 나는 묵묵히 어디에 박힌 말뚝이 된 것 같다. 또는 덮지도 오므리지도 못할 깊이 팬 골 같다. 넓고 깊이 팬 골에는 멀리서부터 온 바다가 더 많이 들어차 육지 저만치까지 밀고 들어가는 힘이 강하다. 오래 서 있는 말뚝에는 온갖 새들이 날아들어 쉬기도 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것이 어쩌면 오늘도 바다가 오고가는 나의 골이면서, 염장에 가두어 말리는 소금인지도 모른다. 바다는 차별이 없으나 모든 바닷물이 소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시 67:4).

 

이 기쁨에 동참한다는 것, 아니 그 기쁨의 주역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영광이다. 그 의, 하나님의 의에는 차별이 없으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다만 이를 거두어 누구는 소금을 내고, 어느 골은 뱃길이 되어 멀리서부터 들어오는 만선의 기쁨을 같이 한다. 그렇게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1-13).”

 

이는 주가 모두 하신 일이다. 내가 저 아이와 또는 누구의 일로 함께 하는 이 모든 게 나의 임의로가 아니었다. 가을 햇살은 평온하였고 순하여 선선한 바람으로 더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땡볕에 곡식들이 익어가기도 한다. 그렇게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욘 4:8).”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는 것 같아도 주가 더하시는 날이라,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이와 같은 비결을 알면 알수록 주의 뜻이 내 것이 되어 충만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이 아침에도 나는 어김없이 말씀을 끌어다 앞에 두고 글을 쓸 수 있다는 이 사실 하나로도 복되다. 나의 충만한 은혜와 은총은 어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가고 새로이 주어진 한 날에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주의 약속이 내 것임을 믿는다. 이에.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시 35:23).

 

내 안에 다 말할 수 없는 모든 사연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 골을 따라 주의 은혜가 들고 나고, 비로소 염장의 질 좋은 소금이 되어 짠맛을 낸다. 그리하여,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24).

 

이로써 우리가 함께 주를 찬미하고 주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27).

 

그리하여,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