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창 14:12, 16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시 37:40
주변으로 인해 어쩌다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환경도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그를 의지함이다.’ 주를 바란다는 것,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7:30-31).
이런저런 것으로 마음이 상하고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그러다 보면 문득 드는 ‘부러움’으로 미끄러질 뻔한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73:2-3).”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살아가는데 어찌 나는 이러한가 하여, 이 길이 맞나? 하는 생각으로 불현듯 낙심이 또는 의기소침함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와 같은 마음을 아시는지, 아침이면 이와 같이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37:23-24).
곧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을 주가 기뻐하신다는 확신. 나는 비록 아무 것도 내세우고 자랑할 게 없으나 주가 나의 손을 붙드신다는 확고한 생각이 나로 죄를 다스리게 하신다. 죄는 언제나 나의 문 앞에 엎드려 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그러니 죄를 다스린다함은 어찌 감당이 될까? 오늘 시편은 이를 확실히 알게 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5-7).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상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려움을 느낀다. 남은 날이 온통 걱정뿐이라. 이건 이래서 걱정, 저건 저래서 걱정, 이 모든 것을 주께 맡겨야지… 하면서도 실상은 늘 머리 위를 휘젓고 있는 것들이라. 마틴 루터의 말처럼, 그럴 수 있다. ‘새들이 머리 위로 날아다닐 수 있으나 그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된다.’ 걱정 없이 사는 것이 어찌 이 땅에서 가능한 일이겠나? 그러한 내 안의 혼재.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을 가지고 하나님은 다루신다. 그것을 취하여 빛을 내신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 1:2-3).
그 빛은 하나님이시다. 이를 시인은 노래하기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
아니시면 내가 무슨 수로 살까? 어제는 공연히 마음이 어려웠다. 생각이 많아 주초에 초안으로 잡아둔 설교원고를 작성했어야 하는데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늘 백신 2차 접종이 있어서 혹시 몰라 이번 주에는 미리 그리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래봐야 종일 사상누각인 것처럼 모래성을 지었다 헐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달렸다. 그럴 때는 말씀뿐이라,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1).” 주가 나를 기뻐하신다는 데야 무엇이 어쩔 것인가?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로 운행하심’ 같이 나의 마음도 다스리시는 것이어서… 다 저녁이 되어서야 에라, 모르겠다! 주의 교회다. 그럼 주가 알아서 하시라! 하고 더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그래놓고나니 종일 뭐한 일인가 싶었다. 어디로 교회를 좀 옮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적합하지 못한 것 같은데, 편한 것으로 치면 이만한 곳도 없어서. 늘 그렇듯 내가 하는 일이 아닌 건 알지만 주가 어찌 이끌어가시려는가, 생각하고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다 우선 그만두었다.
생각하기를 멈추기. 이제 나름 아주 조금 주의 뜻을 따르는 데 있어 생겨난 실력이라고 하면, 하던 걸 멈추기. 생각하기, 말하기, 계획하기 등등. 사람과의 일에 대하여도 ‘여기까지’ 하고, 끊어야 할 때가 있다. 아니면 질질 끌려가다 정신 못차린다. 그래봐야 하나님은 내 뜻대로 하지도 않으신다. 아니, 내 뜻대로 하려던 게 전부 미련하였다. 한도 끝도 없는 일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뿐, 하나님은 절대 하나님의 뜻을 굽히신 적이 없다. 그럼 뭐, 하나님과의 씨름 또한 멈추기. 그리고 가만히 하나님이 하시도록, 기다리기. 그럼 오늘의 이 마음이 그저 나의 고질적인 노파심인지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시려고 하는 신호인지, 곧 알게 된다. 그때마다 반드시 ‘독수리가 그 새끼를 그 날개 위에 업는 것 같이' 주가 나를 돌보시었고 교회를 이루시었고 나 같은 것을 세워 상한 심령을 마주하게 하시었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 32:10-12).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지 않던가? 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돌았던가.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였던가. 숱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위로함을 얻으려 했던가. 그러는 동안 나 자신은 물론 가족들이 고생이었다. 그런데 ‘저가 나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지 않았던가?’ 그뿐인가? 그때마다 나를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그때는 차마 그럴 것도 없이 죽게 내버려둬도 되었을, 하등에 쓸모없는 존재임에도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내 곁을 지키시고 나를 보호하지 않으셨던가? 돌아보면 모든 게 주의 은혜요, 은총인 것을. 나의 고질적인 생각하기는 조바심을 일으키고, 나의 끝 간 데 없는 염려는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대듯 극성인데….
그래서였을까? ‘아픈 아이’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 잔 들고 어느 건물 문 닫은 상가 앞에 서서 잔뜩 찌푸린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돌리게 하셨다. 이런 말이 우습게 들리겠지만 내 곁에 위로가 되는 사람은 지능 60에, 일반적으로 말(言)의 저울이 다른 저 아이가 가장 반듯하게 주를 섬기는 것이다. 묵묵히 성경을 쓰는 일(그 뜻을 알든 모르든)은 물론 늘 기도로 자신을 돌아보며 주를 의지하려는 마음이 기특하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게 더 솔직할 것 같다. 가장 나를 목사로 존중하고 주의 종으로 섬김을 다하는 게 저 아이다. 하다못해 가족들도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일을 두고 아이는 경의를 다한다. 지능이 낮고 아프니까 그러려니 한다면, ‘차라리 너희도 맹인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어제는 우쭐하며 녀석이 점심도 사고 커피도 사면서 형이 자신이 원하는 보드를 사줬다고 좋아라하였다.
하나님이 하신다. 그 하나님이 큰 일,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그 일은 곧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이는 반석 위에다. 여기서 반석은 우리가 주께 아뢰는 신앙고백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이와 같은 고백이 아무나의 것이 아니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그래서 하는 말이다. 아침마다 묵상글을 보내면 가장 먼저 읽고 가장 먼저 아멘을 하고 덩달아서 성경을 필사한다. 모두는 저를 대할 때 ‘아픈 아이’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차라리 저들 또한 아픈 영혼들인 것을 알았더라면! 자신들은 할 일이 많아 하나 같이 똑같은 말이다. 희한하지?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저마다 진짜 똑똑하고 할 일이 많고 그리 한가로운 사람들이 아니다!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하면서 다들 이구동성으로,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14:18-20). 오늘 내 곁의 모든 사람들이 실은 그러하지 않던가? 들어보면 다들 어쩔 수밖에 없는 거라. 어쩌겠나?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라는데, 나름의 사정과 처지로 각양의 삶이 다르듯 각색의 결과도 다를 것 같으나, 어쩌나? 사는 것은 각색이나 결과는 하나인 것을! 사는 데까지 살다 보면 알 일이고, 나는 아이랑 나란히 처마 밑에 서서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고 모든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아이는 연신 뭐라 떠들어대고, 사람들은 분주히 오가갔다. 일상의 소음은 어디서나 가득하였다.
어느 가까운 훗날 주 앞에 서면 나는 주께 무슨 말을 아뢸까? 하나부터 열까지 늘 비루하고 모자라고, 남루하고 처량했던 것들 뿐이겠으나 ‘여호와께서 홀로 나를 인도하셨나이다.’ 하는 고백은 내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한 다른 신이 없었나이다.’ 하고 말할 수만 있다면. 저는 언제나 나의 눈물을 닦아주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요즘은 솔직히 아내도 아들딸과도 모두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저들은 저들이고 나는 나다. 저들에게 나 또한 어려움이겠으나, 그렇게 일정 걸음을 유지하자. 주를 바라는 데 있어 그 어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 이상으로 가까울 게 못 된다. 찾아오는 누구에게도, 마음에 두어 씨름하는 누구의 일로도, 적당히 ‘여기까지’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은 모두 금할 필요가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하면 주를 바람인데,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2-13).” 내남없는 일이겠으나 더욱 주의 길을 가는 일이란 외로운 법이다. 어쩌면 아담은 이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이내 아내의 손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때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그릇된 밀착은 서로의 반목과 미움보다 극적이다. 주의 뜻을 흐리게 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렇게 아브라함은 애꿎은 전쟁에 휘말렸고,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 14:16).” 그 덕분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18).”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그러하여도,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4).
이는 주가 우리로 우리를 위하여 앞서 걸으신 길이었으며,
이는 주께서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 5:5-6).
곧 우리를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10).
주가 내 안에 계심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저는 나의 빛이시다. 나의 어려운 난제를 가지고 빛을 내신다. 길을 밝히시고 동네를 비추게 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하나님이 빛이신데 나로 빛을 발하게 하심이고, 주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심과 같이 우리로 또 그 길을 감당하게 하시는 일이다. 이에.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 14:19).
날 위해 기도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고로 나는 오늘의 나로, 나의 이 어려움과 연약함으로 주가 행하시고 이루시는 일을 본다. 곧 오늘 성경에 이름과 같이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20).” 나의 남은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시 37:3).
이보다 더 복되고 귀한 사명이 또 있을까?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4).
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40).
이와 같은 정답을 늘 손에 들고도 먼 산을 올려다보는 꼴이었으니,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16).” 공연히 애쓰고 마음 쓸 것 없다. 주가 하신다. 나는 다만 주를 찬송하고 신뢰함으로,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2-24).
하면,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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