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전봉석 2021. 9. 29. 05:14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창 13: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 36:7

 

 

길에 따라 목적지는 갈린다. 모든 시작은 끝에서 출발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있고 롯은 소돔으로 갔다. ‘삶은 삶이 목적이다.’ 우리는 누구나 살기 위해 산다. 그럼에도 이르러 죽음을 맞이한다. 살기 위해 살면서도 기어이 죽음에 이르는 길 위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곧 오늘의 삶은 삶보다 더 큰 무엇이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나와 그 삶을 정비하였다.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3-4).” 모든 끝은 시작이고 모든 시작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부터이다.

 

결국 롯의 길이 다르고 아브라함의 길이 달랐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 가진 게 많으면 불화가 인다. 실상은 주가 더하신 것을 가지고 서로가 다툴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롯이 자신의 길을 택하였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0).” 눈에 들고 실상이 좋은 곳으로 당장의 유익을 택하였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11).” 보기 좋은, 자신이 흡족한 곳으로 말이다. 결국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12).”

 

어쩌다 그리 된 것 같은 삶도 살아서 삶인 것이다. 마치 우리는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는데, 모든 삶은 삶이었다. 그리 산 것이지 죽었던 게 아니다. 강제하거나 억압하여 자유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면, 하긴 그것도 삶은 삶이다. 누구는 실패 가운데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누구는 모든 것을 잃고 주께 온다. 그렇지만 누구는 그렇지 못하다. ‘내 끝에 내 시작이 있었다.’ T. S. 엘리엇의 말이다. 오늘 시편의 고백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되기를.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 36:7).

 

더는 피할 길이 없는 곳에도 주의 인자하심은 있다. 삶은 언제나 삶 그 이상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 롯은 어쩌자고 그런 가운데서 정착을 했던 것일까? 기껏 하란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다다랐으면서 이내 서로는 다투었고 갈라섰다. 굳이 그 원인을 따져본다면 저들이 머문 곳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씩 남방으로 옮겨 이내 애굽에 이른 것이다. 거기서 큰 화를 당할 뻔하다 극적으로 구원을 얻은 뒤였다. 롯을 의인이라 하시니 의인인가보다 하지, 저의 삶에서 의를 찾아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아브라함을 따라 하란을 나온 것을 의로 여기신 것일까?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 2:7).” 덧붙여 저에 대한 베드로의 진술은 의아하다.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8).”

 

소돔이 멸망할 때 저들을 극적으로 구원하셨으니 그 와중에도 롯의 처는 뒤를 돌아봄으로 비극을 맞이했던 것을 생각한다. 예수님은 이를 놓치지 않으셨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그때마다 얼마나 자주 뒤를 돌아보곤 하는지. 어제도 친구와의 통화에서 누구와의 약속으로 어디 가는 길인데, 그곳은 나 역시 자주 가던 곳이었다. 그 시절, 나의 영혼은 허기져있었고 낭만을 꿈꾸며 길 위를 헤매던 때였다. 그럼에도 어떤 그리움이 목울대를 치는 것처럼, 그랬었지… 떠올려보게 되는 그때 그 시절이었으니.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롯의 처’가 되곤 하는지. 실은 아쉬운 것이다. 그리움이란 두고 온 것에 대한 미련이고, 기억은 이를 왜곡한다. 오늘 롯의 경우도 자신의 어떤 기억이 왜곡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고 그 길을 택하였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참 이상하지? 이는 순식간의 일로 기억의 편린이란 그 눈에 콩깍지를 씌우는 듯하다. 순간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여태 자기들 곁에 있던 것인데 새삼 그리 좋아 보이는 것은 그리 마음이 먼저 간 것인지, 눈길이 닿은 까닭인지, 무엇이 되었든 순식간의 일이다. 우리 안의 ‘롯의 처’도 기껏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소돔을 떠나오면서 왜 뒤를 돌아본 것일까? 이는 물을 것도 없이 우리 안에도 다분히 그럴 수 있는 요소 중에 가장 어려운 난제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러니 누구와의 대화에서 ‘우린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할 때 나는 그 순간이 섬뜩하다.

 

우리의 남은 사명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고 이에 불필요한 모든 요소들로부터 자신을 경계하는 일이다. 다윗의 호소는 그런 의미였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 67:5-7).

 

이와 같은 고백은 자라가는 것이다. 삶은 삶으로 삶이 되고, 살아서 사는 동안에 사는 일일 텐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롯은 기어이 제 길을 찾아서 갔고 거기는 소돔이었으며 그곳에 정착하여 살았다. 하나님이 가라 하신 가나안을 등진 것이다. 한데 저를 의인으로 여기시고 이내 주의 구원으로 건지시기는 하였으나… 과연 저의 땅에서 주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며 살았던 삶이었을까? 나는 저에 대한 성경의 후한 평가에 고개를 갸웃한다.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벧후 2:8).

 

어떻게 저런 자를 그리 여겨주실 수 있지? 하다가도 내가 할 소린 아니라는 것에 머쓱해진다. 친구가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약속 장소를 머리에 떠올리며, 그 시절 내가 자주 가던 그곳과 그때의 삶을 돌아보면… 롯의 심정도 그러하지 않을까?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이란 이처럼 민망하고 송구스러운 게 아닐까? 이를 알면 알수록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왜 그래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된다.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깨우침도 행함도 아닐 거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으로다. 다른 방도가 없다. 성경은 이를 굳건하게 강조하신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롯의 구원으로 죽어가는 소돔의 멸망은 그 실상을 더한다. 저들의 아우성은 후회와 탄식뿐 다른 길이 없었다. 이제 이를 안다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것이 오늘을 오늘답게 삶을 삶으로 사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사느냐’ 하는 문제에 답을 해야 한다. 순간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밖에 있을 땐 사서 고생인 것처럼 여겨지던 주의 길이 안에 있으면서는 믿는 자로 사는 일보다 쉬운 게 없다.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그 말을 해주었었나? 그래도 난 지금이 제일 좋다! 저들의 눈에는 안 됐고 딱하게 여겨진다는 것도 안다. 내가 그런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던 때도 있었다. 한심하고 처량한 노릇이라, 왜 저러고 사나… 싶어서 상종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좋은 것이 넘쳐나고 좋고 좋은 것으로 이를 즐기기도 정신이 없는데, 고리타분하긴! 여기에서의 구원이란 웬 말인가? 비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아이와 점심을 먹으러 먹자골목을 서성이다 보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며 거침없이 행동하고 말을 하고 모든 게 다 가능한 것처럼 구는 젊은이들을 보면 모두가 예전의 나 같다. 안될 게 뭐람? 안되면 말고! 까짓 거 인생 뭐 있나? 싶던 시절, 좋은 것을 행복이라 여기며 만족하였던 날들을 떠올리며 저들을 위해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계집아이가 짝 달라붙은 레깅스를 입고 남자들 사이에 둘러서 담배를 빨아대고 이 놈 저 놈 지분거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아는지 싫지 않은 듯 허용한다. 눈을 어디에 둘 곳이 없다.

 

그러니 붙들고 뭐라 한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다른 방도가 없다. 실제 소돔이 더 재밌고 좋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고모라 성에 살고 싶다. 즐거운 게 진리다. 소망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치 오늘만 살다 죽는 사람들처럼 육신의 소욕을 따른다. 정욕의 소욕을 뿌리칠 이유가 없다. 안목의 정욕으로 아리따운 여자의 뒤태를 힐끔거린다. 명품 가방이 행복의 척도가 되고 자신의 취미와 취향이 생의 즐거움이다. 목사면 대순가! 아차, 하는 순간에 훅, 간다. 고가의 피규어를 모으고, 게임에 몰두하면서 그 정도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자부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허용하는 범위는 점점 더 남방으로 내려가다 기어이 애굽으로 간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9-10).”

 

가끔 아이나 누구와 대화할 때 나는 저의 항변을 듣다 ‘그럴 수 있지’, 사느라 그러는 건데, ‘그럴 수 있지’ 하고 동조하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럴 수 있다는 게 그래도 된다는 건 아니다.’ 내가 자주 즐겨 되새기는 소리다. 우리 삶에 숱한 ‘그럴 수 있지’ 하는 허용이 모여져서 나중에는 ‘그래도 돼’ 하는 데 이르면 거기가 애굽이었고 소돔이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별건가? 서로 좋으니까, ‘그럴 수 있지.’ 서로들 괜찮다면서 그럴 수 있다고 허용한 범주의 땅이 소돔이었다. 기어이 롯은 그곳에 정착하였고 상대적으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머물렀다. 이제야 다시 이르시기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 실은 그 모든 게 이미 주가 내게 주시기로 한 곳이었다! 여기서도 주가 주시는 쉼과 내가 쉬려는 쉼의 차이다. 내가 취하려고 취한 얻음과 주가 더하셔서 얻은 얻음이 서로 다르다. 삶이란 기어이 사는 일이다. 살기 위해 다들 산다.

 

그럴 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거듭남이란 내가 임의로 어찌 수고하여 그리 되는 결과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삶이란 산다고 다 삶이 아닌 것이다. 내 곁의 누구는 한참 같이 어울려 좋아라 할 때는 몰랐으나 내가 이렇게(?) 되고 난 뒤 저는 아직 거기에 있으면서 여기에 있는 나를 알 수가 없다. 왜 그러고 사는지, 서로가 이해할 길이 없는 것인데 이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곧 우리의 삶에 스스로에게조차 아이러니하다.

 

나는 여전히 세상이 좋다. 말이 목사지, 까딱하다간 요즘 신문에 오르내리는 어느 목사의 성추행이니, 무슨 사기행각이니, 교주행세니 하는 따위의 유혹이 남 이야기가 아니다. 오죽했으면 예전의 친구 중 누가 내게 말하길, 네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 여신도가 남아나질 않겠는데? 하고 야유를 퍼부은 적이 있다. 나는 저의 말을 마음에 새겼다. 웃자고 한 말이겠으나 실상은 나도 잘 안다. 특히 목사와 같이 어쨌든 사람의 시선을 받은 사람들은 더욱 조심해야 할 게 돈과 여자와 자신의 여가시간이다. 게임 정도야, 하고 남방으로 내려가고, 개인적인 취향이나 나름의 선호하는 목회를 꿈꾸다가는 영락없다. 정신 차리고 보면 거기가 애굽이었다. 아주 먼 훗날 롯의 노년에 그곳이 소돔이었다. 어쩐지! 주의 일을 하고 믿음으로 신앙 안에서 주의 길을 간다고 갔는데도 왜 그 길이 지옥이었는가, 알겠다.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

 

다만 그런 저를 그래도 의인이라 여겨주시니 주의 인자하심이 한량없을 뿐이다. 어쩌면 오늘 시편은 그런 이의 찬송이 아닐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시 36:5-6).

 

나 같은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의로움이었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7).

 

그러니 날마다 복에 겨워 산다. 사는 게 복이다. 삶이 삶이 아니었다. 사는 게 다 사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죽는 이만 못한 삶도 허다하다. 그런 가운데서,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8-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