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창 15:6-7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 38:15
‘코로나19’ 백신 2차 접종을 하려고 갔다. 사람들의 모습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럼에도 재잘거리며 옆 사람과 말을 하거나 통화를 하는 사람이 계속 있었다. 병원 종사가가 계속 통화하는 사람을 제지하고, 옆 사람과 말을 나누는 사람을 찾아가 당부하였으나 그때뿐이었다. 누가 누구를 통제한다는 일은 가히 불가능한 일 같았다. 일찍 서둔 까닭에 세 번째로 백신을 맞고 돌아왔다. 국가적인 재난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금세 익숙해진 듯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그 환경에 동화되고 적응하는 능력은 대단한 것 같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하시는 주의 말씀에 아브라함의 대답은 의외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2).”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을 상급으로 저에게 주셨는데, 저의 엉뚱한 소리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주의 약속을 믿고 집을 나섰으니 누구보다 약속대로 후손을 얻을 줄 알았겠다. 그것만 바라고 그것의 주관자는 아랑곳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 일이 지체되자 저에게는 나름의 방도가 필요했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3).”
우리의 이와 같은 자기 판단과 결정에 대해, 전능자 하나님이 묵묵히 참으시며 응대해주시는 게 놀랍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4-5).” 하시는 말씀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황망하기까지 하다. 당장 자식 하나 없이 늙어가는 저에게 그 숱한 자식들을 약속하시다니. 그러니 그 말씀의 뜻,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안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도 귀한 일인지. 물론 오늘에 이르러서 이 모든 말씀은 이루러졌다. 대대로 저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별과 같이 늘어갔고 오늘날 기독교인의 숫자가 어마무지하다. 하지만 그 시절,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 이와 같은 약속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무엇으로 저 황당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6).
믿음이란 이처럼 기이하다. 불가항력적이다. 상식을 초월한다. 믿을 수 없는 중에 믿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현실의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귀에 들어오고 마음에 새겨져 이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구원은 이와 같이 엄청난 신비이고 증거다.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7).” 그렇게 저는 하나님을 믿었고 이에 응하였다. 이를 오늘 시편의 노래로 표현하면,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 38:15).
바람과 응답은 믿음을 소유한 자의 것이다. 실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이것을 우리 사람이 어찌 행사하려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 되게 하시고 더하여 주시는 이의 전인적인 은총이다. 한데 우리의 불순종은 작고 사소한 데서 일어난다. 이와 같은 약속의 증거로 주께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9).” 하여 저는 다 준행하였다. 그런데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10-11).” 저는 소나 염소에 비해 새는 작은 것이라 소홀히 했다. 이에 그 위로 솔개가 날아들고 이를 쫓아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 생겨났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럴 수 있다는 게 그래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데 우리의 허용은 서로를 위기로 몰아간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12).” 곧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불순종으로 고달프게 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다. 자아란 영성은 뺀 것이다. 영성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유지하는 일이다. 영성은 공상도 아니고 신앙인의 몽상도 아니다. 지극히 현실이며 지긋지긋한 일상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잠들 때에 흑암으로 두려움이 임하다니. 이에 따른 불찰의 결과는 너무 막중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3-14).”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무엇, 그 작은 실수와 같은 불신앙의 결과로는 너무 과중한 일이었다. 하물며 믿음을 부정하고 당할 영원한 형벌의 정도는 어떠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향하신 이와 같은 일, 그에 따른 구원의 계획이 이미 창세전에, 즉 아브라함의 그것 아니 아담의 죄 이전에 이미 수립되어 있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이를 볼 때 우리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 이상의 존재로에 대한 역사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도저히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주의 섭리 가운데 종종 우리는 ‘흑암의 두려움’을 경험한다.
누가 동생에게 골수를 이식하여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고 한지 채 한 달도 안 돼 그 몸에 거부반응이 일고,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의 교회에서 특별기도회를 열고 살려주시기를 바라는데, 누구의 부탁으로 나 또한 안타까움으로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고는 있지만…. 기적은 그가 극적으로 회복하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바뀌는 데 있다. 물론 우리의 연약함은 살려주십사, 도와주십사 바라고 구하는 게 전부이겠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의 뜻과 놀라우신, 더 깊고 풍성하신 은혜와 긍휼하심을 알게 하시려고 하는. 누가 내가 울먹거리며 그와 같은 상황에서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기도를 부탁할 때 나는 저들의 또 다른 면을 위해 주께 아뢰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런 상황에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일.
어떤 어려움이 우리로 어려움에 처하게 하여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주를 바라고 구할 때, 당연히 우리의 바람은 당장의 어떤 결과,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창 15:3).” 하는 속단은 금물이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으나 오직 주를 바란다는 것,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우리 주님도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결과적으로 주가 원하시는 것, 그 뜻대로 이루시기를 바라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
나는 누가 그렇게 주를 원망하고 교회를 떠났다가 이내 동생의 임종을 앞두고 주 앞에 나와서 매일 울며 기도하는 저의 호소도 안다. 이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누구는 같이 그 기도회에 참석하여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또 구하는 것인데, 물론 이는 우리의 필연적인 모습이고 연약함으로겠으나 설령 주께서 우리의 뜻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해도,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와 같은 고백이 우리를 이끌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하지 못했던 아브라함은 작은 실수가 4대를 지나 저의 후손이 겪을 엄청난 고통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이 아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이 귀한 진리를 바로 붙들지 못하면, 이내 눈앞의 결과에 따라 누구는 도로 떠나가고 남을 사람은 몇이 안 된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그런데 오늘날의 현상은 영혼을 팔아 자아를 추구하게 한다. 그야말로 '영끌'의 시대다. 영혼까지 끌어다가 지상에 아파트 한 채 사는 것이 꿈인 세상이다. 이를 부추기고 '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서로들 눈 감아준다. 하지만 엄연히 우리가 믿고 구하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물으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하고 저는 대답하였고 이어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7-69).” 결국 어떠하든지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알게 한다. 우리의 가시적인 요구와 바람이 때론 우리 안에 허상을 심고 영적인 몽상을 꿈꾸는 자로 만든다.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모든 사람은 존엄하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아서이다.
실제 우리 영혼을 뜻하는 ‘네레쉬’는 신체의 ‘목’을 의미한다. 머리와 몸을 잇는 통로로, 자아란 그 영혼을 뺀 상태를 의미한다. 자아에 따라 드리는 기도는 그래서 생명력이 없다. 누가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갔다. 우리 딸애를 생각하면 부럽기도 하다. 넉넉한 부모 덕에 한강 어디 자기 아파트로 시작하여, 몸이 약하니까 집에서 쉬며 주식이나 하라고 1억을 척척 내어주는 시댁어른들의 씀씀이가 부럽다. 그러니 친정부모는 안 믿는 가정이라고 반대를 하다 '그럴 수 있지' 하는 쪽으로 선회하여 결혼을 허락한 셈인데, 한두 번 주일을 빼먹고 가뜩이나 코로나로 비대면예배를 실시하다보니 것도 흐지부지, 당장에 누리고 즐기는데 정신이 팔렸다. 처음에 좋았다가 것도 한두 번이지, 신랑은 신랑대로 직장도 없이 주식이나(?) 한다는 게 어디. 그러니 매일 게임에 빠지고 늘어지는 게으름으로 젊음을 탕진하고 얘는 얘대로 친정부모가 알까 전전긍긍하면서도 외로움만 깊어가는 중인데. 듣다보면 그들 부모가 원수라.
한참 어려움을 겪고야 비로소 알게 되는 우리의 이 어리석음에 대하여, 누구는 혹시 동생을 살려주실까 하여 저토록 열심히 기도회를 나간다고 하고, 누구는 조금 있다 코로나가 풀리면 다시 교회를 다니겠다고 하고, 그러니 참 저마다의 기도가 자칫 신기루만 같아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면 순식간에 사라지기 일쑤인 것이다. 정말이지 어쩜 그리, 내 곁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들어보면 다들 '믿었었다'는 과거형의 대답을 한다. 사연은 여러가지다. 결국은 자아가 영혼을 밀어냈다. 육이 영을 이겼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애타게 구하였고 하나님은 이를 들어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스스로들 정당화한다. 그 결과 안 믿는 자보다 완고한 자들로 괴물이 되었다. 예수님도 같은 처지를 경험하셨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다시 보면 아들의 기도는 응하였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우리 주님의 기도는 전적인 ‘아버지의 뜻’으로의 것이다. 이 두려움과 고통의 순간을 없이 하기를 원하지만 그 전제는 아버지의 뜻으로다. 곧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곧 오늘 우리의 기도를 수정하게 한다. 나의 기도가 그릇되었음을 알게 한다. 아브라함도 이를 알지 못했고, 아버지의 뜻대로가 아닌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 결과 작은 실수로 새를 쪼개는 일을 깜빡한 것 같지만 ‘그럴 수 있는, 그래도 되는’ 것으로 스스로 판단한 일이다. 그 위로 솔개가 날아든다. 번뇌와 고통이 사람들을 비틀어놓는 것도 그런 것이다. 대체 그 잠깐, 입 좀 다물고 말하기를 멈추고 경건할 수는 없었을까? 나는 그런 꼴이 보기 싫어 그런 일에는 최대한 일찍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오듯 순서를 치른다.
연신 담배를 피우느라 마스크를 내리는 사람들, 답답하여 손으로 몇 번씩 마스크를 들썩거리며 떠들어대는 사람들… 우리의 그럴 수 있는 아주 작은 사소함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6).” 어떠하든 주의 역사는 이루어진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17).” 이내 우리 어두운 영혼에 빛이 들게 하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 5:14).” 결국은 주를 경외함으로 죄를 멀리해야 한다. 죄란 살인이나 강도 같은 끔찍한 일만이 아니다. 아주 사소하게 여기는, 누구라도 그럴 수 있는, 당장의 이익과 그 결과를 두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조종하려 하는 것!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시길,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8:11).” 다시는 그리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을 두고 주 앞에 아뢰는 일이 복이었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시 38:1).
이를 두려워할 줄 알고 주의 하여 경계하는 자의 삶이 영성으로의 삶이었다. 영성이란 주를 바라고 주의 뜻대로, 주가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고, 말 그대로 삶에서 이 지긋지긋하고 진저리나는 자신과의 다툼을 매일같이 수행하는 일이다. 즉 일상을 떠난 영성은 몽상이다. 낭만적인 영성은 신선놀음을 하듯 구름 위를 걷게 하지만 그저 일장춘몽일 뿐이다. 우리의 영성은 하루하루 자아와의 치열한 싸움이다. 여기에서 영의 일을 뺀 것이 자아이다. 자아 그 자체로는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내 안에 이는 이런저런 두려움이 왜 없겠나? 끊임없이 생겨나는 죄, 하나님의 뜻을 바라기보다 나의 뜻을 우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시 38:6-8).
그럼에도,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9).
주를 바라고 앙망하는 것, 비록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10).” 나의 요구나 원하는 바를 외면하시는 듯 들어주지 않으실 때도, 그리하여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11).” 더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없이 하신다 해도,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5).
반드시 그리하실 것을,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16).” 그래서 더는 누구를 바라보기보다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교만할까 주의하게 하시는데,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17-18).”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도무지 회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것들 앞에서,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2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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