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4 주일
시편 69편
백합화의 노래
시 69: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시 69:31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 69:32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시 69:35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시 69:36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
들어가는 말
다윗은 어떤 일로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오늘의 시를 기록하고 있다. 시편 22편과 오늘 69편의 시는 고난 중에 쓴 다윗의 시로 대표적이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한 것인지, 그의 절친 아도니야의 반역으로 괴로워하던 중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와 같은 ‘극심한 고통’은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와 똬리를 튼다는 것이다. 한데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시를 ‘소산님에 맞춘 노래’로 삼았다는 것이다. ‘소산님’은 ‘백합화’란 뜻이다. 히브리어로 ‘소산심에둣’ 하면 ‘백합화의 노래’라는 의미다. 우리는 여기서 퍼뜩 예수님이 우리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실 때 예를 드셨던 백합화를 떠올리게 된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이때의 백합화는 전적인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나고 자라고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다윗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후손 이스라엘 백성의 지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합화에 맞춘 노래’로 극심한 고난 가운데 주를 바라는 것이 우리 성도의 기본적인 수준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바울의 진술에서도 환난 가운데 우리가 오히려 기뻐한다고 하였으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를 토대로 결론부터 정리하자면 소산님, 백합화의 노래 곧 우리 성도의 찬송은 믿음으로 소망을 붙드는 신앙으로다.
본문이해
시의 구성은 모두 다섯 단락이다. 1연은 1-4절, 고통 가운데 절규하며 주께 아뢰는 모습이 기술되어 있다. 2연은 5-12절, 그 고통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토로하고 다짐한다. 3연은 13-18절, 고난의 깊은 수렁에서서 오직 주께 호소하는 저력이 있다. 4연은 19-29절, 우리를 힘들게 하고 핍박하는 것들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5연은 30-36절, 선취적인 신앙고백으로 앞서서 이룬 줄 알고 감사와 찬송을 올리는 것이 믿음이다.
1연(1-4절), 고통 가운데 절규하면서도 주께 아뢰는 신앙
1) 하나님을 먼저 바라는 훈련이 필요하다. 인생을 살며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그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멸망이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1).” 하고 터진 문제를 물로 표현하면서 주께 구호를 요청한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2).”
실제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얼마나 우리는 주께 의뢰하며 도움을 요청하는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어디 도움을 구할 곳을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다(시 121:1). 설령 우리도 다를 게 없다 해도,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2).” 하고 신앙의 궤도를 되찾는다. 호세아 선지자도 말하길,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5-6).” 이것이 우리의 권세이고 특권이다. 그러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
첫째,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미 7:7).” 둘째, 오직 예수를 바라봐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셋째, 기도와 인내는 평소 훈련으로 연마해야 한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시 69:3).” 넷째, 참된 복을 붙들 때 가능하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2) 하나님께 향한 열심과 원수의 공격은 비례한다. 바르게 믿음을 지키려고 할 때 사탄 마귀는 우리를 가만 두려하지 않는다. 교회를 흔들고 가정을 괴롭힌다. 오늘 다윗도,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4).” 그만큰 주를 의뢰할 때 이와 같은 고난은 예상해야 한다. 그렇다면 저의 공격을 피해야 할까? 맞서야 할까?
첫째, 끝까지 견디는 연습이 돼야 한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둘째, 환난은 성도의 올바른 신앙의 좌표가 된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 3:4).” 셋째, 믿음으로 굳건히 대적하는 담대함이 요구된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2연(5-12절), 고통을 돌아보면 하나님께 열심을 다하는 길이 보인다.
1) 우리의 열심은 교회의 영광을 위하여서다. 부모노릇 자식노릇 잘 하고, 서로 화목하게 살다오라고 우리로 이 땅에 살게 하신 게 아니다. 이는 부수적인 것이지 전부가 아니다. 오직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6).” 이는 행여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조심해야 한다. 자칫 교회를 우선하지 못할 때 자기 의를 드러내게 된다. 이는 목사에게 가장 큰 유혹이고 성도들로서도 다를 게 없다. 이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즉 교회를 어떤 목적과 이유로 선택하고 나아가는 게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2) 우리의 수치와 고독은 성도로서의 필연적인 일이다. 교회를 무슨 서로의 친목을 위해, 또는 사업이나 사회 교류의 장으로 삼으려는 무리가 있는데, 다윗은 말하길,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8).” 교회를 위해 때론 고독한 길을 간다. 이는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9).”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주를 섬기는 일에 우선할 때 가족들과도 괴리를 겪을 수 있다. 그래서 서로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를 바라는 가정이 복되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사도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무슨 의도에서 이런 말씀을 진술하는 것일까?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곧 우리는 장차 들어갈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는 게 가장 우선이다. 이에 오늘 다윗은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10-11).” 곁의 누구도 때론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이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3연(13-18절), 고난의 깊은 수렁에서서 오직 주께만 호소하는 성도
아이러니하게도 절박할 때 우린 기도한다. 스스로 할 자기 의지를 구사할 땐 세상 방식을 선호한다. 이에 다윗은 노래한다.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13).” 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사야의 진언으로 이를 더욱 선명히 알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9).” 둘째, 우리가 문제는 문제 이상의 훈련 차원이다.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셋째, 어려움이 어려움을 겪는 이를 돌보게 한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넷째, 하나님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다.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다섯째, 곧 우리는 상한 심령들에게 영원한 생수를 공급하는 샘이 된다.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10-11).”
왜 오늘 시편의 ‘백합화의 노래’로 불렀을까?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14-16).” 다윗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4연(19-29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을 기다리는 성도
1) 우리의 모든 상황은 주께 올려지는 예배다.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19).” 그럴 수 없는 중에 그러는 것을, 바울은 우리의 영적 예배라 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2) 우리의 관심은 영혼 구원과 하나님의 공의다. 공의란 옳지 못한 것을 바로 잡는 것이다. 오늘 시편 22절에서 28절까지는 저들, 곧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하는 모든 자들에게 응당 있을 공의로운 재판을 구하고 있다. 이는 저주가 아니다. 자기 안에 품고 살거나 스스로 응징하려 하면 저주지만 하나님께 아뢰면 탄원이고 기도이고 예배다. 지혜자는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 28:5).” 하고 단언하였다.
첫째, 공의를 배워야 한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7).” 둘째, 믿음으로 견뎌야 한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이에 다윗은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23, 27).” 이와 같은 근거로 탄원한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29).”
5연(30-36절), 선취적인 신앙고백은 성숙한 성도의 자세다.
믿음은 아직 이뤄지지도 않은 일을 그리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하여 수긍하는 것이다. 주의 선하심을 붙들고서 말이다. 이는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2:1-2).” 오늘 다윗은 시편에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30).” 어떻게 어려움을 토로하며 고난 중에 있으면서 이런 찬송이 가능한가? 믿음이란 선제적이다. 이루어지고 난 뒤 그리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우리에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였다.
첫째, 우리는 죄에서 영혼의 속량을 받은 것처럼 육신의 속량도 기다린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둘째, 우리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소망이 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3-25).”
나오는 말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렘 20:13).”
오늘 다윗도 노래한다.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31-32).” 영혼 구원은 이루어졌으나 육신으로 사는 동안 육에 속한 사람들처럼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의 연단으로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안다.
자 이제,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2).” 이것이 우리의 남은 사명이다. 믿음이 자라고 신앙이 성숙하져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단지 이 땅에서 보다 착하고 성실한 인간이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 모든 게 예배다. ‘백합화의 곡조’에 맞춰 우리가 부를 찬송이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33-34).” 어떤가? 과연 우리는 날로 날로 그러한가? 아니면 점점 더 세상 사람들처럼 되어가는가? 다윗은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35).” 우리가 누릴 영원한 복락은 이 땅에서가 아니다.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대상 17:14).” 곧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고 천국 백성으로 산다는 일은,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36).” 저들 중에 살면서도 구별된 자로 백합화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로 사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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