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전봉석 2021. 10. 6. 05:15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창 20:13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3:5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구원의 비전을 갖는 일이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권한이고 의무이다. 이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없다. 믿음도 주시는 것이고 이를 행함도 주가 함께 하실 때이다. 곧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순종이다. 단적인 예로 이를 훼방하는 것은 스스로의 모색인 것 같다. 어떤 이유로든지 내가 어찌 해보려고 하는 모든 것에는 그릇 행함의 어긋남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창 20:13).”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방도가 옹색하긴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었겠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 부분에 대해 왜 먼저 하나님께 아뢰지 않았을까?

 

스스로의 방도는 이처럼 하나님을 배제한다. 어쩌면 우리는 경기장을 뛰어다니는 운동선수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관중이 된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소서

그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시 68:29-30).

 

곧 이 모든 일에 주가 관여하시고 주관하신다. 이를 알고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우리는 모든 일의 결국을 분별하며 사는 사람들이 된다. ‘하나님이 꾸짖으시고, 밟으시고, 흩으신다. 이를 아는 사람은 주께 예물을 드리며 주의 전에 들어간다.’ 시편이 함축하고 있는 구원이 실체는 놀랍다.

 

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

(시 68:31-32).

 

고관들이 애굽에서 나온다. 이방 민족이 신속히 주 앞에 손을 든다. 땅의 왕국들이 하나님을 알고 찬송한다. 곧 아브라함이 네게브 땅으로 옮겨 그랄에 거류할 때 앞서 낸 꾀를 유지하여 형편을 모색하였다. 이에 아비멜렉은 몰랐다. 그러다 저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구원의 사람인 것을 알고 두 손을 드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서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무엇이 우선이고 그게 왜 중요한가를 안다. 믿음은 절대 지식으로 그치지 않는다. 학문이 아니다. 시편 68편의 남은 부분은 이를 알게 한다.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시 68:33-35).

 

누구라도 이와 같이 주를 알고 찬송할 수 있다면 그 힘과 능력 앞에 다른 무엇도 소용이 없음을 알 텐데.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욥 37:23).”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찾을 길 없다. 다만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주가 이루시는 구원의 광경을 우리는 목격한다. 감히 뭐라 나서 내가 어찌 행한다고 해서 있고 없고, 이루고 이루지 못하고 할 그런 문제의 것이 아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성급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일로 그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주로 이 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넘어지고 난 뒤, 실수하고 또 후회가 밀려들 때에나 깨닫는다. 머리로 알 때와 실제는 다르다. 남의 일과 실제 나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우린 같은 도식으로 스스로 문제를 풀려하다 번번이 같은 실수를 한다. 오늘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랄 이전에 애굽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같은 실수가 연속되는 것은 주께 온전히 맡기지 못해서이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주께 의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를 경외함이란 이를 먼저 일깨운다. 나의 길에서 나와 주의 길을 찾게 한다.

 

사람들은 떠나가고 모든 계획은 실패와 같이 되는데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그럴 걸 알면서도 예수님은 굳건하실 수 있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곧 이 한 구절의 확신이 좌로도 우로도 치우침이 없이 무던하게 주의 길을 가게 하신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자가 있다. 반드시 그 자들은 올 것이다. 오는 자는 결코 내쫓지 않으실 것이다. 저가 살인자이든, 창녀이든, 병든 자이든, 가난한 자이든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누구라도 별 수 없다. 그때 주님은 물 위로 걸어오시면서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요 6:20).” 이때 우리는 다만 주를 맞이할 따름이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21).”

 

그런데 우린 당장의 일을 모면하는 데 급급하다. 없었던 일로 누가 좀 훅, 하고 치워주길 바란다. 도로 돌렸으면 좋겠다. ‘나 돌아갈래!’ 하고 절규하는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것도 여러 번의 기회를 다 놓치고 결국 더는 물러설 데가 없을 때 드는 후회다. 병적으로 우린 자신이 싸지른 똥을 누가 좀 치워주길 바란다. 그냥 덮어두려하기 일쑤다. 외면하고 방관하며 그 위에 산다. 희한하지?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사 49:4).” 기껏 애써 수고한 것이 모두 헛된 일이 되고 난 뒤에야 후회가 또 화가 밀려드는 것이었으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예수님의 역설적인 기도가 인상적이시다.

 

알 만한 사람은, 알 수 있는 때엔 왜들 그렇게 고집인지. 결국은 자기 생각을 굽히지 못하고 갈등하다가도 도로 그 위를 서성거리며 허송세월을 한다. 그러다 결국 때를 놓치고 뒤늦게 후회하며 ‘나 돌아갈래.’ 하고 절규하는 일에 대하여,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곧 우리의 옹고집을 지목하시는 것 같다. 끝내 자신의 생각과 주장대로 살아야 하는 때에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이미 들었고 보았으면서도 외면하였다. 왜냐하면 스스로 어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방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요구하실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일 같더라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이에 우리의 순수함은 무지에 따른 게 아니다. 타고나는 천성으로도 아니다. 애써 연마하여 얻어지는 신앙의 경지로도 아니다. 이는 순전히 주를 의뢰함이다. 마치,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 131:1-2).

 

내가 어찌 교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스스로 이만큼 했으면 됐지? 하고 스스로를 두둔하려는 마음을 어찌 이겨낼 수 있을까? 또한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그뿐인가?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허튼 데 애쓰지 않는다. 가령 자식 일에 너무 끼어들 때 나의 미숙함이 아이로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어떤 일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일 때 내가 어찌 하려다 급기야 줄을 끊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기 십상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고, 내 눈은 오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끔은 이 일이 얼마나 끔찍한 후회뿐인가를 나는 종종 인정한다. 어제도 딸애와 어릴 때 어떤 일을 두고 얘기할 때, 그때 아빠한테 나 혼난 거 알아? 하고 자초지종 없이 그때 일을 떠올렸다.

 

실은 그런 경우가 한두 개가 아니어서 어찌 나열도 하지 못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나는 너무 미숙했고, 그럼에도 고집과 변덕과 내 뜻대로 하여는 별난 사람, 짜증 잘 내는 사람, 그때마다 변덕이 심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나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아이들 어릴 때, 한참 의존하고 칭얼대며 치대듯 나에게 모든 결정권이 있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절대 내가 함부로 아이 일에 끼어들지 않고 무엇을 제지하거나 주장할 때 힘으로 디밀지 않을 텐데… 그땐 내가 참 많이 미숙했다. 그러면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 일에 관여하려 하고 그게 부모의 역할인 줄 알았다. 돌아보면 그때 차라리 내가 빠졌어야 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실패하더라도 내버려두며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했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병적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나에게 우상이었고, 나름은 떠받들듯 한다고 한 게 저들에겐 상처로, 슬픈 기억으로, 안 좋은 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그런 말이 나올 때면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한다.

 

어느 60대 노인이 된 친구 누이가 모친을 떠나보내고 내 앞에 앉아 푸념을 했다. 나 어릴 때 왜 그렇게 엄마는 한 번도 나를 칭찬하지 않았는지 물었지만 엄마는 결국 사과도 없이 눈을 감았다. 하고 누이는 눈시울을 붉혔다. 저의 마음엔 여전히 어릴 때 어떤 서러움, 그 노여움은 앙금이 남아 목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엄마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사과였다. 다시 말하면 지금이라도 한 마디, 인정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 모친의 장례식장에서 저의 큰 누이와의 짧은 대화가 큰 교훈으로 남아 있다.

 

다들 놀라운 것은, 지금은 모른다. 그저 옳다. 자신이 판단하고 생각한 게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위주의 이해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누군 의존적이고 누군 스스로 독재자처럼 굴림하면서, 누구는 굴종하고 누구는 폭군으로 행세하면서… 그게 어느 쪽이든지 길들여진 사고방식을 고수한다. 이에 주님은 단호하신 것이다. 잘나고 권세 있고 자기아집과 오만함으로 가득한 자에게는 이를 감추신 것에 대해 감사한다. 그리도 말도 안 되지만 ‘어린 아이에게’ 드러내심을 감사하신다. 그 바탕에는 확신이 있으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어제는 이 한 구절의 말씀이 모든 일에 대해 이해하고 판단하는 발판이 되어 주셨다. 예수님도 더는 어쩔 수 없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곧 아버지 하나님의 앞선 모든 섭리 앞에 순응하고 순복하는 일이었다. 하여 사람들이 다 떠나가도 조바심을 내지 않으셨다. 더 많은 사람들을 모르려고 일을 기획하거나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지 않으셨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요 6:61).” 말씀이 걸림이 되고 어려웠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60).”

 

해서 예수님이 말씀을 바꾸고 새로운 이벤트로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유도하려 하지 않으셨다. 결국은 많은 사람들-제자들이 떠나갔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물으셨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67).” 그때의 대답,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 이것으로 족하신 것이다. 곧 아버지가 보내신 자로 되었다. 보내심을 못 받은 자들에 대하여는 내버려두는 수밖에. 그러나 아버지가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받으셨다. 이는 ‘온’ 이스라엘을 향한 마음이시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6).” 이는 ‘온’이다. 온 이스라엘,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9:6-8).”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 ‘다’가 다가 아니다. 엄연히 그 다는 전부가 아닌, ‘이게 다야?’ 할 때의 ‘다’, 제한적이면서도 그게 전부인… 마치 우리 교회의 몇 개 안 되는 의자 수와 내가 상대하는 사람 몇몇이 ‘다’인 그 ‘다’이다.

 

가끔은 외형적인 것, 숫자에 마음 상할 때도 있다. 늘 그게 그것 같은, 그게 ‘다’인 ‘다’ 앞에서 나는 주춤할 때가 있다. 행여 누가 온다고 하여 책상을 넓히고 보조 의자도 꺼냈다가 그때마다 실망하기도 숱하게 한다. 올 것 같은데, 올 줄 알았는데, 기대는 늘 산산이 부서지고 혹시나 하고 잠시 부풀었던 마음은 풍선에 바람 빠지듯 정말 싱거운 일이 된다. 그럼에도 그 ‘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여기서의 ‘모든’,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또 다른 ‘모든’ 앞에서 우린 분별해야 한다. 가령 이번 구절에서의 두 번 ‘모든’은 서로 전혀 다른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대선주자들이 벌이는 유세현장에서 저들이 외는 ‘모든’과 ‘다’, ‘전부’의 모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관이다. 우린 결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사람보다 골 때리는 생명체도 없어서 ‘다’들 자기를 지지하고 알아준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모두’, ‘모든’, ‘전부’, ‘다’는 제한적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이를 아는 ‘모든’은 그리 많지가 않다. 점점 더 이를 실감한다. 나는 어떠한가? 돌아보게 된다. 그러할 때 예수님의 기도가 확신을 더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성부께서 성자께 주신 자들로서의 ‘다’이다. 전 인류에 대한, 모든 존재에 대한,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관념의 대상들이 아니다. 내게 ‘다’는 주가 맡기시고 함께 하시는 내 곁의 ‘다’이다. 나머지 더는 들으려하지 않고 다가갈 수도 없는, 그러나 존재하는 누구들에 대하여는 나로서 이를 감당하지 않는다. 것도 나의 평안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 131:2).

 

곧 주만 의뢰하는 일, 여기서 아브라함의 되풀이 되는 자기방책으로 드러나는 문젯거리를 두고 오늘 말씀은 묵상하게 하심이다. 그리고 오늘도 시인의 읊조리는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같이 되뇐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3:1, 3,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