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7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 41:12
주가 내 편이시다. 나의 책임은 주께 순종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어떤 일을 두고 마음을 기울일 때 주의 이름으로 그리하는 것에 대하여,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다. 롯이 속한 소돔이 멸망을 앞두고 있다. 주는 먼저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으신다. 하려는 일을 먼저 알리시는 하나님, 세상의 악함이 의롭다 하신 우리로 고통당하게 한다. 그것은 죄와 무관하지 않다. 베드로의 진술이 없었다면 롯을 의롭다고 여길 아무런 근거가 없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어제는 이 말씀을 전하다 여러 번 울컥, 하였다. 우리의 턱 밑까지 어려움이 위협하고 달려들었다. 아이는 도로 공황이 왔고, 누구는 확진자와 같이 근무하고 식사하고 회의를 했다. 확진자의 가족들은 일시에 확진이 되어 뿔뿔이 흩여져 치료중이다. 저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생각하여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까운 여관에서 며칠 혼자 기거하기로 하였다. 누구는 가르치는 학교에 확진자가 나와 모든 수업이 중단되고 코로나 검사 후 대기 중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고통, 그 어려움의 출처는 따로 있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이를 찾았다. 첫째, 저는 그들 중에 거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 끼치는 어려움은 모두 죄 때문이다. 세상이 악하다. 이 또한 주가 알고 계신다.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욥 9:24).” 싫든 좋든 그들 중에서 살아야한다. 기껏 한 영혼이 주 앞에 오려는가, 하고 기대하며 같이 하려 할 때 세상은 저를 순순히 놓아주지 않는 것을 느낀다. 누구는 그래서 도로 잠적을 한 듯 더는 연락이 없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성경을 이를 일깨우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들은 흑암 속에 거한다. 어둠은 어둠을 분간하지 못한다. 서로를 더듬어 타박할 뿐이다. 자기모순은 알지 못한다. 그런 저들과의 생활로 영혼이 상했다는 것은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저들 방식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창 19:8).” 이것이 의인이라 칭하는 롯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어째서 그 지경이 된 것일까? 둘째, 날마다 저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이었다. 같이 어울려 그리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삼음이다.
은연중에 남다를 게 없다. 어울리고 같이 섞여 ‘그러려니’ 하고 따른다.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순리가 아닌 역리로 취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우리 안에 충분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그야말로 자유의 나라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앎을 허투루 다룬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어지는 말씀이 마치 우리 모습을 비춰보는 것 같다(22). 그리하여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
오늘 날 너와 나의 모습 아니던가? 썩어질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바꾸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 내버려두심도 하나의 방편이겠으나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차라리 어떤 일이 터져, 저절로 그 입에서 곡소리가 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복이다. 이건 마치 안개처럼 스며들어 속옷까지 적시는 것처럼, 외로움이 온 영혼을 잠식하는 것처럼, 그리 내버려두실 때에 마음의 정욕대로, 몸을 서로 욕되게 한다. 이는 한 가지 이유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5).”
이와 같은 말씀을 증거하다 보면 오늘의 내가 얼마나 복이 많은지, 각별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지를 알게 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 이는 아주 부정한 일이었다. 주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신 사람을 물건 취급하고 소모적으로 다루었던 일이다. 그뿐인가?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7).” 그에 따른 보응 가운데 하나가 서로에 대한 반목과 터무니없는 공격이다. 쾌락과 관련된 범죄는 아무리 철저하게 방어한다 해도 그물망을 뚫고 우리 안에 침투한다.
성경을 그저 가만히 읽고, 보고, 생각하는 것으로도 두려움이 엄습한다. 오늘 날 행해지는 가장 놀라운 사실 하나는 영화다. 영화는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여 종합적으로 표현한다. 사람들은 이에 열광하며 흥행몰이를 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오징어게임>이란 영화가 <미나리>나 <기생충>에 이어 한국영화의 쾌거를 이루고 있는 모양이다. 전 세계 여든한 개 국가의 영화관에서 모두 1위를 석권하며 흥행을 이루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거 보면 성경에 쓰인 말씀 그대로다. 저들도 다 안다. 오늘의 실상과 인간의 파괴된 인격과 영혼의 손상된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였다. <기생충>은 보았는데, 나는 보면서도 이게 왜 인기몰이를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다만 거울 앞에 발가벗고 서 있는 것처럼 부끄러울 뿐이었다.
우리의 양심이 굳어버렸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감각이 없다. 본래의 느낌을 잃었다. 인디언 속설에 ‘양심은 동그라미 안에 삼각형’이다. 처음은 뾰족하여 삼각형의 꼭짓점이 찌른다. ‘찔린다’는 표현은 순수할 때의 의미가 되었다. 여전히 찔리고 있으면 현실에서는 도태된다. 이를 베드로 사도도 셋째,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다시 말하지만 롯과 같은 이를 어찌 의인이라 칭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저에 대한 반문은 고스란히 나를 치는 꼴과 같다. 내가 내 뺨을 후려갈기는 격이다. 아,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 나이가 되어서도, 나름 경지에 이르고 믿음의 경륜이 높아졌다 싶은데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곧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매우 값진 감정이다. 초딩아이가 오후께 묵상글을 쓰느라 잠언의 한 구절을 질문하며 ‘주를 경외한다는 게 뭐예요?’ 하고 물었다. 나는 단답형으로 ‘두려워할 줄 안다는 소리야!’ 하고 답을 보냈다. ‘뭐가 두려워요?’ 하고 묻는 아이의 다음 질문에도 ‘아무도 모를 것 같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에 대해서….’ 하고 답하자 아이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글 한 편을 썼다. 자신과의 연관에서 아직 서툴지만 그러려고 하는 모습이 기특하여 나는 늘 그대로 둔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 오늘 날 일련의 사태를 두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피부로 느끼며 주의 하려 하는 마음, 그 자체로도 충분한 복일 거였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소돔성의 멸망을 앞에 두고 있다. 앞서 아브라함에게는 불가능한 일, 다음 해에 약속의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경사스러운 소식이 동시에 주어졌다. 문득 아무리 악한 흑암 속의 세상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고 일하시는 것에 전혀 차질이 없으시다. 그럼에도 대체 우린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뜻은 엄연하셨다. 비록 죄로 인하여 세상이 그릇 행하고 있으나,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나의 죄를 내게 돌리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니! 우리 눈에는 온통 불가능한 일뿐인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창 18:11).” 그런 가운데, 이제 와서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대체 뭘까? 왜 진작이 그리하지 않으셨을까?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5).” 곧 우리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하나님은 너무 도식적이다. 여느 신의 자리에 하나님을 둔 것 같이 자신의 소원을 위해서면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그런 정도의 상대로 여긴다. 이를 하나님은 경멸하신다. 그리고,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3).
이를 알게 하시려고, 오늘의 이 모든 것을 내버려두신다. 스스로 느끼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다. 물론 그리 느낄 수 있는 동기부여를 제공하신다. 가령 내가 누구로 글을 쓸 수 있게 하려고 어디 대회에 원고 준비를 하게 한다. 당장은 상금 얼마에 마음이 간다. 하지만 정작 글을 쓰게 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아, 자기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고, 느끼고, 생각함으로 저가 나의 편이 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부디 알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기껏 다시 공황이 오고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글을 쓰고 생활을 다짐하며 성경으로 나아오는가 싶었더니, 대체 이게 실화인가? 듣도 보도 못한 내 곁에서 보이스피싱을 당해 수천만 원을 날리다니. 그러니 아직 어린 나이에 돈독이 오르고, 기껏 같이 드리고 같이 나누던 말씀은 뒷전이 되고 부질없는 게 되었다. 나는 속상하고 자꾸 눈물이 난다. 또는 어제 설교 중에 또는 누구를 위해 기도부탁을 하다 안쓰러움인지, 속상함인지, 울컥- 하는 마음으로 잠깐씩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제 곧 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최선을 다려는데, 이 무슨! 그럼에 상대적으로 감사한 것은 한 녀석은 그 뒤로 다시 잠수, 연락도 없이 돈벌이에 온 정신을 팔고 있는가 모르겠고, 한 녀석은 그래도 얼른 연락을 하여 상황을 말해주고 우리 같이 기도로 이 모든 상황을 주 앞에 돌리고 있다.
같은 동시간대를 살면서 누구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여져서 약속의 씨를 보장 받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어느 한쪽은 곧 멸망할 도성에 갇혀 타성에 젖은 자로 그 심각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숨기지 않고 알게 하시는 이는, 우리에게 오늘도 알리신다. 주가 우리에게는 감추시는 게 없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이 얼마나 큰 영광이면서 두려운 사명인가? 거기 있는 롯을 생각하여 주께 구한다. 의인 오십, 사십오, 사십, 삼십… 결국은 그 큰 도성 안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이내 멸망이 결정되었다. 오늘도 이 하루하루가 연명되고 유지되는 것은, 나는 오늘도 의인 열 명 가운데 하나로 이 흑암의 도시를 밝히고 있는가? 시인은 이를 찬송한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 41:12).
주께서 행하심으로 내게 가능하다. 내가 뭐라고 감히 나서 누구를 탓하고 비판하고 경계하겠나? 나는 롯만도 못한 위인이었다. 롯과 같이 저들 속에서 저들과 어울리며 살았고, 그들의 이런저런 행실을 따라 서슴없이 같이 행하기를 반 세월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 역시 저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였고, 오히려 영혼은 상할 대로 상하여서 죽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자살을 꿈꾸며 살고 있던 때도 있었다. 그럴 때까지 놓아두심이라. 그리 내버려두심이 돌아보면 은총이었으면서 동시에 저주가 되었다. 나는 누가 기도를 부탁할 때 저의 바람을 구하지 않는다. 어쩔 땐 저가 피하고자 하는 실수와 고통을 넌지시 구한다. 그리하여 주를 알고 잃었던 주의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 106:8).
다른 이유없다. 주를 주로 알게 하시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나는 이제 이것이 참 귀하다. 날 위해서가 아니어서 너무 다행이다. 나의 수고나 노력의 대가가 아니어서도 더욱 감사하다. 그렇다면 하등에 쓸모없었을 것인데, 오늘도 나의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의 주가 되심이었다. 이를 위해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히 7:25).
그러니 이제 나의 남은 생을 무엇으로 살 것인가? 오늘 시인은 말한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41:4).
나의 몸도 영혼도 주가 고치시지 않으면 상한 영혼으로 소돔에서 옴짝달싹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아, 그러니 오늘 내가 믿고, 의지하고, 주를 바라는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나고 위대한 일인가?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2).
그러므로 우리의 남은 날의 할 일은 하나뿐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1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0) | 2021.10.06 |
---|---|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0) | 2021.10.05 |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0) | 2021.10.03 |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0) | 2021.10.02 |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0) | 2021.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