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 22:3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 45:1
여기서 왕은 다중적의미를 띈다. 당대의 왕을 지칭하기도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하기도 하며, 왕 같이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시 45:2).” 곧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어떠하든지 우리로 아름다운 덕,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의 삶을 주관하심을 삶으로 나타내게 하려 하심이다. 고로 우리는 존귀한 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그 나라의 백성들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말씀 앞에 한참을 턱을 괴고 앉아 있다. 이른 새벽, 창밖으로는 귀뚜라미 소리와 풀벌레소리들이 차가운 바람과 함께 들어와 듣기 좋다. 평소보다 더 일찍 눈을 뜨고 책상에 앉았다. 어제는 ‘사모’와의 긴 대화로 우리의 연약함과 그러한 어쩔 수 없음이 도리어 주를 더욱 바란다는 데 감사와 찬송을 올렸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서 하루가 길어졌다. 마치 뭐든 할 수 있는 자유의 여백이 늘어난 것 같다. 오늘은 뭘 하지? 하는 따위의 고민은 안 한지 오래다. 늘 하던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더는 할 수 없는 것을 두고 씨름하지 않는다. 순응이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일찍 잠에서 깨면 뒤척거리지 않고 책상에 나와 앉는다. 말씀을 끌어다 묵상글을 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 주는 설교원고를 일찍 작성하였다. 유난히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한 날이 주초에 심했고, 그래서 설교원고를 썼다. 가끔 ‘이게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서둘게 한다. 언제부턴가는 할 게 없어서 말씀을 보고, 책을 읽고, 기도를 한다. 누가 들으면 우스운 소리지만 그게 전부가 되었다. 솔직히 왜 할 게 없겠나? 예전 같으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또 할 게 산더미인데.. 이를 더는 우선순위에 두지 않음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묵상을 하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누구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인생, 그리 대단할 거 없다. 어릴 때, 젊을 땐 뭔가 남다른 사랑과 꿈과 낭만을 꿈꾸며 살았다. 연애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하고 혼자 있는 낚시터에서의 시간을 사랑했다. 돌아보면 모든 게 헛짓들이다. 주를 바라고 주를 의지하며 주께 향하는 것, 이것이 그전의 어떤 것보다 귀하다. 모두 되돌려 준다 해도 지금의 나의 이 순간으로 족하다. 누가 말하길,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러니 인생은 그런 것이더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어딘가 미숙하고, 신랑은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고, 젊을 적 꿈 꾸었던 삶은 간 데 없이 사라졌고, 현실은 짓누르고 억압하는 것들 뿐, 모든 게 바라고 꿈꾸었던 시간이 아니다. 이러한 괴리감이 우리로 초라하게 한다. 당최 하나님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름 애써 믿는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저는 억울하다. 나의 순간과는 대조적이다. 그럼 나의 현실이 저보다 나아서인가?
오늘 본문이 그 답을 대신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엥? 이 무슨 낭패람? 뭐 이런 하나님이 다 계실까? 기껏 약속했던 것과 달리 약속의 씨로 주신다고 주신 아들 하나, 이제 그나마 애써 어느 정도 장성하였다 했더니 도로 달라니?!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는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어찌 감당해야 할까? 우리 안에 드는 여러 생각은 공격적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순종은 우리의 허를 찌른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우린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 누구도 ‘난 할 수 있어!’ 하고 장담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늘 같으면 이는 사이비종파의 궤변이나 이단의 회유가 분명하다. 한데 여전히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요구하신다.
아브라함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았다. 그동안 저의 삶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왜 이와 같은 요구를 하시는지는 당장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부당하고 답답해도 ‘하나님이시니까!’ 하고, 저의 믿음은 그만큼 이제 달라지고 성장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바로 다 알고 순종하는 게 아니다. 문제를 납득하고 이해해서 푸는 게 아니다. 다만 저는 나의 하나님이시니까!
겹겹이 쌓인 구름과
그의 장막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욥 36:29).
엘리후의 말이 옳다. 우리가 어찌 다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나? 한데 거기까지, 그럴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셨다. 그리고 그 속에 숨겨두신 놀라운 축복의 비밀이 있었다.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
(시 105:39-40).
종종 우리 개인의 체험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증명된다. 이러한 개인적인 간증이 많으면 많을수록 저의 신앙은 풍성하다. 믿는다고 하면서 딱히 고백하고 회상할 게 없는, 있어도 그저 우연 같은, 운 좋은 경험 따위가 전부인 신앙은 각박하다. 그런 이의 신앙은 뜬구름 잡듯 자기만족에 겨워 믿는다고 믿는다. 그런 것도 믿음으라고, 교회도 가고 역술인한테도 가고, 남들처럼 누림과 즐김을 감사로 여기고 축복으로 삼으면서, 죄의 홀림과 유혹에 무방비상태로 벌거벗은 영혼으로 산다. 자신만 모른다. 안 믿는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알 리 없고, 믿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도 저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조롱거리로 산다. 그때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요동을 친다.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
(사 8:8-10).
우리가 기를 쓰고 애를 쓰며 죽어라 하고 산다 한들 삶은 허망하여서 시쳇말로 그러다 한 방에 훅, 간다. 누가 어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있겠나? 누가 묻기를 다시 태어나도 나로 살겠나? 했을 때, 나는 나로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는 내 안에서 끊임없는 혈투로 얻어지는 고백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디가 아프거나 힘들다. 이제는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아프단 소리가 지겨울 정도로 말이다. 솔직히 나는 나로 사는 게 참 어렵다. 지겹고 싫다. 감사는커녕 원망이 더 크다. 그럼에도 허투루 이런 소릴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가운데 주의 은혜가 크다. 돌아보면 나를 어찌 위하고 다루셨는가를, 새삼 감사할 것들뿐이다. 이상하지? 오늘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는 점점 이상한 사람이 되어간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사 65:1-3).
가만히 다시 묵상하면 그게 나였다.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하나님이 싫었다. 저를 구하지 않으려 고개를 저으며 살았다. 한데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곧 나의 인생에서 내가 물어볼 수 있는 상대가 하나님뿐이었다. 또한 나는 저를 찾지 않았으나,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기어이 내 앞에 먼저 걷고 계셨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아버지!’ 하고,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부르기 무섭게 대답이 되셨다. ‘내가 여기 있노라.’ 나는 종일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이었다. 또한 나름의 ‘동산에서’ 내가 만든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나로 만족할 수 있는 것으로, 저 하나님이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감히 지금도 입을 열어 말할 수 없는 숱한 부끄러움과 염치없는 죄를 지으며 살았다. 그런 나에게 먼저 대답이 되시고, 먼저 길이 되시고, 먼저 동행을 하셨던 이가 곧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욥 11:9).
오전에 누구와의 긴 대화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두신 참된 신앙의 고백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 45:1).
주의 살아계심과 저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말로다 이를 표현하고 고백함으로 주의 자녀인 것을 안다. 이를 알아야 하는데 이를 한사코 외면하고 부정하고 살 때는, “네 쫓겨 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4).” 하늘 끝까지 쫓겨 갈 수 있다. 간당간당 하늘가에 걸려 사는 게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주가 이끄실 것이다. 한데,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1).
그와 같은 삶이 지속될 때 우리는 생의 고달픔으로 죽기만을 간청하며 살 수도 있다. 사는 게 지옥이라, 죽는 이만 못한 삶도 있다. 그게 어디 삶인가? 미숙한 아이와 이기적인 남편과 사방을 포진하고 있는 어려운 현실들의 구질구질한 목숨들이 매달려 있는 일상에서 악, 소리 나고 윽, 소리 나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죽지 못해 사는 게 나을까? 그리 사느니 죽는 게 나을까?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애 3:3, 17-18).
그러니 이러고 어찌 더 살겠나?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 걸까? 하는 마음에 하나님이 오히려 반문하신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 50:2, 59:1).
굳이 누구의 이야기에서가 아니라 우리 생의 전부는 다를 게 없다. 다들 겉만 번지르르하지 그 속은 문드러진 걸 잘 안다. 마치 시치미 떼고 괜찮은 척 하나, 안간힘을 쓰며 죽어라 버티며 사는 꼴을 누가 모를까? 저만 그런 게 아니다. 어느 생인들 다를 바가 없다.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누구 앞에서 허세를 떨고 허풍을 친들, 생이란 게 고작 거기서 거기인 걸 이쯤 살아보니 알 것도 같다. 하면 우리 생의 가장 귀한 복은 무엇일까?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묵묵히 주를 신뢰함이었다. 욥의 고백과 같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또는 다니엘의 친구들 같이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 건져내시리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는 믿음이었다(단 3:17-18).
현실은 간혹 말도 안 되는 결과로 우리를 속일지라도 그 또한 대수로울 것 없다. 내 몸이, 내가 추구하고 애쓰던 것이 나를 노엽게 할지라도… 말씀의 원리는 간단하였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어찌 우리의 노여움이 찬송이 되게 하신단 말일까? 나 어릴 때 그렇게 싫었던 것들이 모두 주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발판이 되게 하셨다. 오늘에 이르러 누구를 위로하고 격려할 때 나의 연약함이 저에게 주를 찬송하는 수금과 비파가 되게 하실 줄이야! 그리고 남은 노여움은 하나님이 금하셨다는 것?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즉 오늘 본문의 시험,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저에게 하신 약속을 굳건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오늘 이 말씀은 이루어진 지 오래다. 이 작은 땅덩어리 어느 마을 귀퉁이의 나에게까지 ‘네 씨가 크게 번성’하게 하신 것이다. 곧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8).”
우리 앞의 수천 년이 하나님의 하루도 아닌 것을, 우리에겐 수천 년 전의 아브라함이나 곧 어제의 그로 내 곁에 있는 자이었다. 앞으로의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주의 재림의 그날까지도 우리는 모두 같은 동시대의 인물로, 어느 가까운 날에 우리는 서로 낯설지 않게 인사를 나누며 서로 말씀 많이 들었다며 반가이 마주할 것이다. 아, 그러하니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 45:1).
나의 이 초라한 묵상글이 나로 하여금 주만 바라며 살게 한다. 누가 물어서 나는 답하기를, 하루하루의 나의 이야기가 모여 주일 설교원고가 되고 하나님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 여김으로 오늘 한 날의 또 이와 같은 시간이 참으로 복되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 45:6).
다를 억울함을 토로하고 스스로의 자괴감에 괴로워들 할 때,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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