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창 23:19-2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46:10
아내 사라가 장사된 마므레 곧 헤브론은 롯과 헤어지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곳이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 13:18).” 후에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가 이곳에 장사되었다(25:9-10, 35:27-29, 49:30-31). 본래 그 땅의 의미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벧엘을 거치지 않고 헤브론으로 갈 수 없다. 벧엘은 가나안의 중심으로, 헤브론에는 아모리 족속은 물론 다양한 민족들이 살았다(14:13, 23:7). 그러나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면서 저들의 고향과도 같은 요충지가 된다. 야곱과 레아도 이곳에 장사된다(49:30-31, 50:13). 후에 다윗이 왕이 되고 헤브론에서 7년을 통치하다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겨 33년을 다스렸다.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나라가 확장되는 가운데, 중요한 거점이다. 오늘날에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거점도시로 흔히 가자지구라 하는 곳이 이곳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는 상징적인 땅이다.
어느 지역, 이 땅에서도 어디 한 곳에 정착하여 산다는 것은 매우 우연한 일처럼 시작되었다가 삶의 터전이 되고 모든 추억을 간직하며 확장된다. 어딘들 주의 손이 닿지 않으시는 곳이 있겠나만, 누가 어디에 산다 할 때 이는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단순히 지형적인 의미에서의 어느 지역을 떠나 주의 나라가 확장되는 데 있어 영적으로도 나는 어디에 기거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성경의 다음 진술은 그래서 가히 시적인 것 같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사 51:9-10).
궁극적으로는 모두 주의 나라요, 주의 땅이다. 개인적으로는 ‘나’, 우리 하나이고 모여서 ‘서로’가 되며 이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하시는 말씀으로까지 발전한다. 누가 어디 살고, 누구와 만나고, 어떤 일을 하고… 하는 이 모든 것에서 한 생이 가고 또 한 생이 와서 사는 그 모든 여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시는 일이다. 곧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7).”
곧 이 땅의 어디, 누구의 무슨… 하는 따위의 정서적인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누리고 살아야 하는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처소를 암시하고 이를 묵상하게 한다. 내가 지금 어디서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을 곳은 없다.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8).” 가령 누구와 멀리 떨어져 살아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나 늘 가까이 있는 것처럼 서로 교통하고 통일된 사이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늘 곁에 가까이 하고 살면서도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그런 사이도 있는 법이다. 이러할 때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는 우리의 자리,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 나의 터전을 묵상하게 된다.
가령 지금 이 시간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나 앉아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물음 앞에서,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하는 말씀에 앞에 선다. 종종 어떤 일이 또는 누가 나의 깊은 웅덩이가 되기도 한다. 그때에,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69:2).
이와 같이 암담하고 암울한 순간에도,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14-15).
하고 주 앞에 아뢰고 호소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는 일은 복되다. 아주 가끔은 ‘아이’와 같이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런저런 말을 하게 할 때에 나는 저의 세계에 다다를 수 없어 가만히 녀석을 본다. 맥락이 닿지 않는 말과 말 사이에서 나는 암담함을 느끼다가도 그리 마주하게 하시는 주의 뜻을 헤아린다. 최소한 일주일에 두 번은 아이와 같이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려고 한다. 어떤 대단한 의미를 두고 하는 일은 아니고, 내 곁에 두시는 영혼이며 저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를 뿐이다. 어제는 무슨 말 끝에, 나는 만나고 이렇게 대화하는 사람(노는 친구)이 목사님밖에 없어요, 하는 말에 가슴이 철렁, 하기도 했다. 아니면 혼자 집에 가 성경을 쓰거나 게임을 하거나 기르는 강아지와 같이 있는 게 전부다. 그러다 엄마가 퇴근하고 오면 저녁을 먹고 잔다.
저 땅, 마므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막벨라 굴 앞에서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마주하고 이를 위한다는 일은 이 땅에서 거저가 없다. 주께서 하시는 일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나 값을 물어야 하는 것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그곳에서 때론,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8:6-7).
이는,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42:7).
고통스럽고 부정적인 의미로 우리를 엄습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참 지혜, 그의 뜻을 알아가는 것, 그 값, 인생으로서는 누구라도 치러야 하는 일, 거기에서 진리를 붙든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어제는 그렇게, 창밖으로는 가을이 지나가는 비가 촉촉하고 내리고 있었다. 가만히 저기 좀 봐. 하고 아이의 말을 좀 끊고, 나는 눈길을 돌려 한참을 비가 내리는 거리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우연처럼, 어쩌다 나는 여기에 남겨진 듯 또는 우리가 서로 같이 있는 것 같으나. 카페 안은 휑하니 사람들이 없었고 나는 아이가 주문해준 달고 진한 커피를 혀끝으로 음미하다 마스크를 썼다. 순간 그와 같은 순간이 기이하고 진기하였다. 각각의 입을 틀어막고 마스크를 쓰고도 밥을 먹고 음료를 마시고 말을 하는 모습이 말이다. 나는 아이가 커피를 마시고 뭐라 말을 하느라 마스크를 내린 상태이면 손가락으로 가리켜 마스크를 바로 쓰게 하였다.
이런 날이 있고, 저런 일이 있고, 누구와 있다 또는 누구와 멀어지기도 하면서…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신 33:3).” 이렇듯 나로 하여금 말씀 앞에 앉히시고, 그것을 듣고 가져다가 또 누구에게 말하여 주기도 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27).” 나의 거점, 나의 요충지가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 즐기고 함께 하던 것이나 사람들에 대하여는 다시 주께서 어디쯤에서 서로 교차하게 하실까? 하는 생각은 하다가도 우리가 함께 거하는 게 아니라면… 하고 고개를 젓는다. 삼삼오오 모여 사람들은 이 와중에도 말을 하고 뭐라 일러 쉬지를 않는다. 입을 좀 다물 새가 없다.
종종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어제는 잠깐이었으나 아이와 같이 카페에 있으면서 지나온 나의 시간과 사람과 그 머물렀던 곳들을 떠올려보기도 했던 것 같다. 더는 인연이 아닐 것들에 대하여도,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욘 2:6-7).
물고기 뱃속에서의 요나의 회상이 마치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창밖을 보고 모처럼(?) 이런저런 생각에 떠밀려 다니던 어제의 한때가 중첩되었다. 그것도 결국 아이 때문에도 생각이 자주 끊기고, 서둘러 일어나야 했지만……. 나의 생에 주의 인자하심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가을을 타나? 어제는 괜히 마음이 멜랑꼴리하여서 아이만 아니면 한참 더 그러고 앉아 있었으면 싶기도 하였다. 이내 하나님은 내게 새 노래를 입에 두신 것이니,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 40:2-3).
이와 같은 말씀의 주인공이 모두 내 이야기 같다. 함부로 살았던 날들에 대하여, 또는 아무렇게나 굴며 멋대로 될 줄 알았던 시절에 대하여, 그 어리석음은 이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누군가 그리운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어디로 향하여 가는 마음은 저 혼자 허한 게 아닌가 싶다가도… 모두가 그럴까? 나는 자주 나의 지나온 날들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다 세상과 비교하면 문득 닥쳐오는 낙담은 여전하여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3).” 하는 부정적인 언사도 오늘 본문의 그 장소 마므레 상수리 수풀의 풍성함을 보고서였다. 여기서 헤브론은 정탐꾼들이 지나간 곳으로 에스골 골짜기가 헤브론 북쪽 숲이 울창하고 매우 비옥한 곳이었다.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23).”
그 좋은 시절, 허튼 보고로 부정적인 길을 따라 광야 40년을 배회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 돌아보면 늘 어떤 후회가 또 화가 난다. 일찍이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고 구하였으면… 말 그대로 내 좋았던 날들을 모두 허비하고 난 뒤에야, 이게 뭐람! 하는 심정도 얼핏 스쳐가기도 했던 것 같다. 아이 덕분에(?) 부슬부슬 내리는 창가 쪽 커피숍에서 마스크를 쓰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노래와 아이의 수다를 들으며. 그렇게도 오후 한때가 흘러갔다. 이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시 46:1-3).
오늘 아침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앉아 이제는 제법 찬 기운이 감도는 창가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주의 말씀을 읊조린다. 앗!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0).
하시는 말씀 앞에서 가슴은 먹먹해진다. 그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11).” 하는 말씀이 이제는 나에게 들려주시는 것이라 감사하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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