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창 24:12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 47:7
무슨 일에 있어 우린 ‘당했다’는 표현을 쓴다. 슬픔을 당하다, 변고를 당하다, 하는 것처럼 어떤 일은 예고가 없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 하고 돌이키면 후회뿐이다. 이를 두고 그저 우연으로 여기는 것도 옳지 않고, 지나치게 의미를 두어 자책하는 것도 옳지 않다. 성경은 엄연히 슬픔과 기쁨을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이를 두고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는 곧 흘러가듯 우연한 일도 아니지만 그 문제에 골몰하여 씨름할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어떤 억울한 일을 겪고 이를 두고 씨름하느라 누구는 공중에서, 누구는 길거리에서 데모를 하고 억울함으로 호소하느라 숱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본다. 더러는 신념을 갖고 제도적인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이고, 더러는 풀리지 않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를 여생을 그 일에 다하는 것인데…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일을 여호와께 맡기라.’ 하시는 부분으로 우리의 자세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살다보면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앙이 훌륭하다 해도, 어떤 일에 요동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우리는 결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지 않다.’ 그처럼 요동을 친다 해도 ‘우리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라.’ 그 뿌리가 든든하고 줄기가 튼튼하면,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고 낙엽이 요동을 친다 해도 이를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곧 요동하는 일 자체가 없을 수는 없으나 그것으로 신념을 삼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전부하여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곧,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 16:3).
성경의 일관된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위하여 그 배필을 구하러 떠나온 고향으로 종을 보낸다. 그럼에도 이삭을 데려가지는 못하게 한다. 그의 종은 맡은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주의 은혜를 구한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창 24:12).” 하여 일이 되는 걸 보면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을 본다. 주의 일에는 억지스러운 게 없다. 돌아보면 주께 다시 나오게 하신 일에서부터 가정예배로 먼저 가정을 세우시는가 하면, 교회를 이루시는 데 있어 글방이 교회 될 때에 어느 것도 그러려고 그리 된 게 없다. 순조로움이란 어떤 일에 탈이나 말썽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다.
물론 모든 일은 더러 갑작스럽다. 느닷없는 변고나 말썽으로 우리를 당혹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히 묵상하고 돌아보면 그 또한 그리 되려니까 그리 된 일이다. 종종 이를 순순히 받기가 어려워 우리는 낙담한다. 가령 길을 찾는 데 있어,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신 1:28).” 거기는 모압 땅이다. 그리로 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소요가 일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2:9).” 하시며 누구와 어떤 일로 다투고 분쟁하는 것을 피하게 하신다.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4-5).”
곧 우리의 자세는,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하심이다. 이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겔 21:26).” 주가 행하신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 28:26).
그리하여 주가 행하심이란,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28-29).
주가 이루시는 약속이시다. 고로,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119:89-91).
이와 같은 고백과 삶의 자세가 우리의 것이었다. 무슨 일을 두고 우리는 어찌 이를 감당해야 할까, 할 때에 예수님의 설교를 묵상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내일 일은 내일 하라는 게 아니다.’ 주격조사 ‘이’가 ‘내일’에 붙었다. 다시 보면, 오늘 일은 오늘‘이’ 하고 내일 일은 내일‘이’ 한다. 그러니 당연하고 분명한 진리 하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여기서 주격조사 '는'은 '너희' 곧 우리에게 붙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다.' 여기서의 '먼저'는 나중에 앞서는 우선순위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의 전부의 의미다. 곧 우리는 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 곧 준행해야 하는 전부, 그 일을 두고 평생을 자처하는 것이 우리 일이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래서 나는 어떤 일에 누가 평생을 걸고 씨름하며 투쟁하고 싸우는 것에 다소 우려하는 마음이 먼저 앞선다. 가령 애국이라는 덫, 자녀를 위해 희생한다는 덫, 지구 환경 지킴이나 동물보호 등의 사명감이라는 덫, 덫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명분보다 정교한 올무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재자들이나 매국노의 입에서 가장 많이 부르짖는 소리가 '~을 위하여'이다. 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사랑하는 자식을 위하여 하는 것처럼 '위하여'는 자신의 목을 베는 순간에도 거둘 수 없는 엄청나고 잔인한 무기다.
누구에게도 말하였던 것처럼 문제를 문제로만 놓고 씨름하면 그 문제는 거듭 파생하여 문제가 문제로 재생산된다. 정작 어느 순간이 되어서는 본래의 문제는 사라지고, 문제를 문제로만 여기는 자신이 가장 큰 문젯거리로 남는 경우도 그래서이다. 의외로 자주 우리 곁에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일순간의 억울함이나 분한 마음이 요동치게 하면, 이게 계속 알을 낳고 새끼를 치듯 문제가 문제로 재생산되는 것을 본다. 그러다 저의 삶은 그대로 흘러간다. 어느 교사부부의 예가 있다. 전교조에 가담했다가 부당해고를 당하고 이에 대한 제도적 법적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국회 앞에서 노숙을 시작한지 수십 년이 흘렀다. 저들의 청춘은 다 흘러 어느새 머리에는 서리가 허옇게 내려앉았고 다시 복직을 한다 해도 곧 있으면 정년퇴임이라. 저들의 길거리 위에서의 삶은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다들 나름의 판단으로 저마다의 의미를 두고 사는 일이겠으나, 성경은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배제하지 않는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6).
이를 가슴에 새겨 그 때를 바로 알 수 있다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어떤 일을 두고 그 일에 전념하는 것에 대하여 심지어 그 일에 자식을 두고 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닌 것을. 누구에게 말해주고 설명하는 일이란 쉽지 않다. 저들인즉 그러고 싶어 그러하겠나? 억울하고 분하고 또는 부당하고 잘못된 것이어서 그러니 자신의 남은 생을 걸고 그 일에 전념하는 것인데… 천하만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 외에 우선되는 것은 없다.
결국은 염려로 인함인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 이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하고 반문하시면서, 우리는 공중을 나는 새보다 귀하고, 들에 핀 백합화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하물며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데,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1).” 결국 스스로의 격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믿음의 문제인 것이지, 신념이나 무슨 의미의 차원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강조하시기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
이를 마음에 새겨 믿음으로 받기가 그리도 어려운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염려가 앞서고, 그 염려로 내일 일까지 끌어다 오늘에서 쩔쩔매며 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것까지도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곧 염려도 내 몫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는 말씀을 두고, 나는 문득 오늘과 내일의 간격을 생각하고, 그 무게를 지고 사는 일에 대하여도 하나님의 주권을 묵상하게 된다. 다시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하늘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를 돌보시는 일도 하시는데, 하물며! 하여 들의 백합화도 이를 알고 자신의 운신을 위해 길쌈을 하거나 수고를 하지 않는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28).”
하물며 주를 알고 주를 믿음으로 산다고 사는 주의 자녀들로서 ‘어떤 일을 두고’ 심지어 평생을 바쳐 씨름하고 다투고 자기주장을 드러내는 데 전념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오늘 아브라함이 종에게 이르는 말 속에서 진리를 깨닫는다. 종이 물었다.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그러자 아브라함은 확고하게 답하였다.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5-6).” 어떤 일에서든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아닌 걸 어찌 좀 더 다루어볼까 하여 요동치는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종은 비로소 누구에게 구하여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2).” 왜?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 47:7).
우리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시다. 천하만사가 주의 일이다. 저의 깨달음이 옳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창 24:48).” 이를 보고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 할 때에 리브가가 말한다.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58).” 이는 결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시 47:1).
이는,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8).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이란 그것이 슬픔이든지 기쁨이든지, 곤고한 날이든지 형통한 날이든지, 하나님이 이를 병행하게 하신 것으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심은 오직 주를 바라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지혜서는 일깨운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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