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 25:23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시 48:9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이 땅이 생겨나기 전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우리의 출생의 비밀이 있다. 그 이유와 목적이 뚜렷하다. 오늘 본문으로 이를 다시금 확신한다. 곧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이에 따른 확신이 주어질 때 우리는 오늘의 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때론 의연하지 못하고 앞서 조바심을 내며 하루 일에 부르르, 몸서리 칠 때가 있으나 우리는 앞서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주의 택하심을 따라’ 존재하는 의미를 가졌다.
가령 어제는 그야말로 설교가 죽을 쒔다. 말씀을 전하면서도 내가 뭔 소릴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훼방하는 마음이 들락거렸다. 여느 때보다 설교원고도 길었지만 마치 수험생 노트처럼 빼곡하게 메모하고 밑줄 긋고 서로 연관 지어 설명하려던 것이 뒤죽박죽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설교를 하면서 그만,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화상으로 드리는 가운데 누가 자꾸 왔다 갔다 하고, 문가 쪽에 누가 온 것처럼 신경이 쓰이고, 여하튼 무슨 말을 어떻게 전했는지 모를 정도로 간신히 예배를 마치고 앉았을 때의 허탈함이라니! 그래서 그런지, 날씨 탓인지, 오후 내내 의기소침하였고 왠지 모를 감정, 어떤 슬픔 같은 마음이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아침,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시 48:9).
하는 시편의 한 구절이 마음을 쥐고 흔들리지 않게 해주시는 것 같다.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나 같은 것이 어찌 이 영광스런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겠나?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엉터리로 모자라한다 해도 나의 이 부족함을 개의치 않으시는, 그의 인자하심이 더 높고 깊고 크시다는 위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11:4).
나의 나 됨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나의 이야기를 다 아시고 이를 계획하시고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어제는 다소 우울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아주 고질적인 의문점 ‘이 길이 맞나?’,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데 따른 회의와 갈등까지도 주는 다 알고 포용하시고 이끄시는 것이었으니,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0:2-3).
개인적으로 나는 이처럼 시편을 묵상하고 읊조리며 음미할 때에 위로를 얻는다. 그럼에도 다시 아침이 오고 새벽에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시는 것이었으니, 내 안의 영적인 적에 대하여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곧 우리를 쥐고 흔드는 것은 단지 이 땅의 일로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이를 바로 알지 못할 때, 오늘 에서의 경우처럼 잠시 배고픔에 성마른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5:32).” 하고, 자신의 엄청난 신분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로 사는 것이 우리의 한계일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에 연연하는 것을 주께서 원치 않으신다. 이 한 날의 일은 그날로 족할 뿐이다. 이 모든 것 위에 계신 주님, 이를 세례요한은 잘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하는 아주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바울 또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아, 이와 같은 고백이 부디 나의 것일 수 있을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 곧 그럼에도 죽기 살기로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이 나타나게 하려 함인데 세례요한의 진술을 여기에 이어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요 3:31-32).”
그러므로 나는 땅에 속한 삶으로 전전긍긍할 게 아닌 것이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시는 주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6-7).” 이를 어찌 임의로 내가 노력하여 얻을 수 있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겠나? 오늘 ‘에서와 야곱’ 두 인물을 두고 저들이 태에 있을 때부터 하신 말씀의 의미는 더욱 선명하여지는 것 같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하시고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신 말씀을 우리는 영적인 존재로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분명하다.
곧 그날그날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고, 곤고할 때도 있고 형통할 때도 있나니 우리는 주를 경외함으로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으로도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곧 이 모든 일을 두심으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것은 이 땅으로의 일로 전부가 아니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설교하기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이 뚜렷한 양 갈래의 길, 에서의 길과 야곱의 길로 나뉘 것이었으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7-8).”
저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름 믿기 싫어서 소위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하여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아니할 뿐 하니라 할 수도 없다니! 상대적으로 아니하고 싶은데 아니할 수 없고, 할 수 없는데도 이를 하게 하시는 존재로 산다는 것. 아무도 눈치 알지 못하고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 일을 두고 혼자 씨름하듯 마음이 어려워 시큰둥하다가도 말씀 앞에서 꾸중과 함께 위로도 얻는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곧 오늘의 내가 나로 씨름하는 이 일이 귀한 것이었다. 누구로 속상하고, 어떤 일로 마음이 쓰이고, 나의 나 됨으로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 도리어 복이었고 은혜였다.
누가 물었다. ‘목사님은 왜, 어떻게 그렇게, 매일, 일찍, 하루도 빠짐없이 묵상글을 쓸 수 있어요?’ 사실 이 질문은 내가 스스로에게도 가끔 던지는 질문이다. 혹시 강박적으로 자신의 의로 삼으려는 것은 아닐까? 어떤 희생이나 헌신으로 여겨 ‘억지로라도’ 행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우습지만 마치 숙제가 밀린 아이처럼 어쩔 수 없이 그리 행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저런 나의 질문과 같이 저의 질문도 그런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한참 망설이다 대답한 적이 있다. ‘죽지 못해 쓴다.’ 늘 어떤 기쁨으로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사는 것만은 아니다. 죽지 못해 쓴다는 나의 대답은 역설이었고, ‘살고자 하여 쓴다’는 말이 더 옳을 거였다. 죽음으로 찾아올 평안에 대하여는 가끔씩 고대하는 바이다. 단지 이런저런 고충으로 죽고 싶다는 의미 정도가 아니다. 더는 이 땅에서 바라고 의지할 게 없는, 어떤 한계의 즐거움과 행복을 바라면서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다.
누구의 질문에 나의 대답은 어찌 전달이 되었을까? 이후에 나는 묻지 않았으니 알 길은 없겠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데서는 서로의 공통된 어떤 바람, 우리에 두신 소망이 있을 테니 그것이 단지 이 땅에서의 일로 전부라면 더는 말해 무엇하겠나? 에서는 에서의 길을 가고 야곱은 야곱의 길을 간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에서는 에서이고 야곱은 야곱이었다. 내가 주를 믿는다는 것,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나는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 나의 존재의 이유와 오늘의 가치와 나의 됨됨이를 모두 알았다. 그리하여 누가 뭐라 하든, 어떤 이가 죽음의 기로에 서서 생의 의미를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 저의 남은 모든 날들을 감히 단언하여 말해줄 수 있었다. 이를 어찌 알 수 있겠나?
우리는 굳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이 자신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고 증명하며 살지는 않는다. 내가 정말 나인지, 혹은 내가 아닌 다른 누가 나로 사는 것인지,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확인하고 어떤 생체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굳이 말을 안 해도 내가 나인 것을 아는 일처럼, 내가 주의 택하심과 예정하심에 따라 주의 자녀로 이미 창세 전에 그리 예정하신 뜻대로 오늘을 살고 있음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아주 유치한 표현이지만 사는 것으로 살며 증거 되는 것이었다. 굳이 누구에게 내가 나인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그리하여 심지어 그 부모가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고 말고의 의미처럼 의미없음도 없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 25:28).” 그러니 우리의 사랑이란 게 참 너무 어설프다.
한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의 참 사랑은,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아 2:8, 17).
저는 태산을 뛰어넘어 나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다. 날이 저물 때에 저의 품에 안으며 안전히 나를 보호하신다. 저의 사랑은 그 어떤 환경과 여건을 능가한다. 오늘 나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초월하신다. 나의 죄와 허물도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다시는 용서할 수 없는 것 중에서도 나를 보호하시고 돌보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신다. 그러니 누가 내가 어째서 이처럼 죽어라 하고 묵상글을 쓰는가? 하고 묻는다면 이 글 따위를 위한 글이 아니고, 이 시간 따위를 위한 시간이 아니다. 경건을 위한 경건의 모양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강박적인 신앙의 표출도 아니다. 다만 그리하게 하시는, 그렇게 나로 주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이의 뜻을 따라 나도 나를 다 이해할 수 없는, 더는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의당 그러한 존재의 이유 전부다. 하여,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욥 23:3-6).
이와 같은 욥의 진술과 같이 맹목적인 주의 사랑과 그 인자하심으로 나는 오늘도 하루의 생을 더 연장하면서 주의 은총을 누리고 배우며 기회를 더한다. 이 기회는 주의 구원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나도 자라게 하시는 이의 은혜로 말이다. 내가 이룬 게 아니고, 나의 행함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얻어진 것, 그리 된 것,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8-10).” 이것 때문에 오늘도 산다. 살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앎으로 영원히 누릴 주의 복된 날들의 소유자로 그 예비 된 것들을 일체 준비하게 하시려고. 고로,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시 48:1).
나에게 이처럼 말씀과 말씀의 자연스러운 연관성과 한 목소리를 듣게 하심이 복이었다. 비록 말씀 전하는 일도, 누구를 온전히 주 앞에 세우는 일도, 여느 교회 어느 목사의 존경 받는 인물로도 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나보다 더, 누구보다 더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심은 오늘에서가 아니라 이미 저, 창세 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바 된 주의 사랑이었다. 이를 오늘 시편의 노래로 음미한다면,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
(2, 8).
오롯이 주의 관심은 영원이었다. 이 하루, 여기에서의 이 날을 위해 나를 지금 두신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를 알고 주께 고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9).
그리하여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14).
누가 이를 막을 수 있겠나? 부정하고 한사코 외면하며 멀리하고 산다해도 그 생이 다만 고달플 따름이고,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12-13).
이것으로 오늘의 나의 사명이었다. 그리하여,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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