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 26:2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시 49:7-8
어떤 일에 있어서 서로 말 하여 속엣 이야기를 들추고 기도를 부탁하는 사이는 깊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나 아무나에게 깊은 말을 하지 못한다. 육신의 병듦은 물론 영혼의 병듦에 대하여 이를 들추는 일은 수치이고 수모다. 그리 여겨 서로는 다만 겉을 보고 안다. 그리 아는 게 전부이고, 그 전부는 얕다. 그러나 성도의 서로 문안함은 단순한 왕래가 아니다. 성경은 일러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좋은 게 좋은 사이로 지내는 것은 쉽다. 이는 성격의 문제로 성향의 차이도 있다. 사람마다 다르니 그 속을 누가 알까. 좋을 때야 서로가 천사라. 물고 빨고, 간 쓸개 다 빼줄 수 있는 것처럼 굴다 ‘남의 이야기’로 부담을 느끼면 그 사이는 소원해진다. 친구도 겉을 핥는 사이는 그 정도다. 남과 다를 게 없이 겉과 겉이 왕래할 뿐 그 속은 서로 모른다. 하물며 교회 안에서의 일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이상의 관계인데, 점점 서로는 이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니 겉으로 보여주는 친절과 관심 정도면 족하다. 더는 다가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드러내지 않은 것을 알려고 하면 일순간 감정이 상한다. 심지어 자신이 드러내어 말한 것도 더는 아는 체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를 때론 모욕으로 느낀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이의 일이란,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시 49:12-13).
오늘 본문에서 이삭은 그랄에 머물며 저들과 어울려 산다. 서로가 좋은 사이는 적당히 견제하고 같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다. 호락호락할 때 상대는 덥석 문다. 짐승 같이 언제든 돌변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라, 이삭은 우물을 파고 그곳 사람들은 이를 빼앗아 자기들 것이라 한다. “…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 26:19-22).”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이란 이와 같아서, 누구라도 다를 게 없다. 때론 각별하고 남다른 사이에게서 이와 같을 때 깊은 수렁에 빠진 듯 회의가 또 환멸이 밀려든다. 시편 69편을 정리하다가,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시 69:2).
하는 구절을 두고 한참을 묵상하였다. 어떤 일 혹은 외로움으로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문득 둘러보고 말을 걸 수 있는 상대가 없을 때, 또는 그 정도로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말문이 막혀 선뜻 입을 뗄 수 없을 때,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주밖에 달리 누가 내 속을 알아줄까?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호 12:5-6).
참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내 그 속을 주밖에 말할 데가 없다. 목사가 되고 누구의 말을 들어주는 일은 예사고 저에게 일러 뭐라 말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이에 나는 늘 ‘학자의 혀’를 달라고 기도한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전에 같으면 여기서 저기까지, 선을 긋고 더는 아랑곳하지 않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 대하여… 그러니 나는 성경으로 하시는 말씀에서 할 말을 얻고 취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곧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하며 주만 바라보게 하신다.
아니면 속이 뒤집혀 살 수가 없다. 더욱이 마음을 주고 애써 신경을 쓴 사람에 대해서는 그 서운함이 더하다. 특히 교회를 이루어 가는 데 있어 그 영혼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일은 ‘아무나’와의 관계가 아니고, 주가 곁에 두신 일이라. 때가 되면 지나가게 둬야 하고, 내가 그곳을 떠나오기도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그 일이 순조롭기만 하겠나? 두고 올 마음이 쓰이고, 서로에 대한 정도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잘 떼기 어려운 일이어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은 우리를 이끄신다.
곧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저는 오늘도 날 위해 중보자가 되심이다. 이를 사람과 사람 사이로 가능한 사이가 성도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이는 서로의 관심의 문제도 취향이나 성격의 일도 아니다. 같은 주를 바람으로 그 말씀을 함께 받은 자로서의 것이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쓰이고 생각이 저 혼자 머물기도 하는데, 더는 그 마음을 다할 수 없을 때 이는 참 서글픈 일이다. 서로가 내 맘 같지는 않아서 뭐라 일러 가르친다고 될 일도 아니어서, 왜 오늘 시편은 그처럼 모질게 표현하시는가, 알겠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어쩌면 그래서 나의 고질적인 엉거주춤함과 우유부단함은 오랜 상처로 인한 자기 방어의 하나로 기제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어디 영원하겠나?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9).
부질없는 것이어서 늘 비우고 또 비워야 하는 것은 내 속이다. 그 마음에 어떤 기대나 바람을 가져서는 영락없다. 이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하고 모래를 쥐고 있는 일처럼 헛되다. 성경은 기도하게 하시려고 우리로 피곤하게도 하심이었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시 69:3).
곧 기도에는 인내가 필요하고 인내에는 오랜 외로움이 따른다. 사람으로 누구에게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 속 시원하게 고백하고 나면 행여 그것이 나의 수치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어 돌아오기 일쑤다. 그렇듯 오늘 창세기의 사건, 이삭과 그랄 사람들 간의 반목과 불신에서 우리의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를 시인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시 69:4).
때론 억울하고 때론 서러워서, 나는 병적으로 정 드는 일을 꺼린다. 누가 애완동물을 싫어하냐고 물으면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까닭도 정들까봐 두려워서다. 정들면 지옥이라. 하물며 사람에게 정을 주었다가 이를 떼려 할 때, 이는 참으로 쓰리고 아픈 일이어서 참 싫다. 그러니 주께 아뢰기를,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시 86:3-4).
외로움이 더하여질 때 주를 바라고 주께 호소할 수 있다는 데서 힘을 얻는다. 참 이상한 구조이기는 한데 사람에게 너무 기대하고 정을 주면 하나님과 소원해지고,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구할 때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더는 기대할 게 없을 때이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다’는 시인의 호소는 누구에게 흠뻑 마음을 다하다 더는 다가서기 어려울 때 드는 마음이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이 동행을 하다 한 사람은 이 길로 한 사람 저 길로 향하여 갈 때, 장차 받을 환난을 예감하기도 한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 3:4).”
그럼에도 다시 시도하고 또 다가가고 그리 거듭 거절을 당하다보면 비로소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주께서 얼마나 간 쓸개 다 빼버리고 우리 곁에 오시려 애쓰셨던가? 사람의 일로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을 두고 어찌 주께서 그리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주의 마음으로가 아니면 어찌 이 배반의 땅을 저주하지 않으셨을까? 이내 스스로를 내어주기까지, 그렇게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시 69:5-7).
이번 주일은 아버지가 오시는 날이어서 설교원고 준비를 다음에 해도 되는데, 나는 정해진 날에 늘 하던 대로 본문을 출력하고 관련 성경을 찾으면서, 그 구절들을 음미하다 마음이 먹먹하여지기도 하였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행여 나의 무능함과 옹졸함으로 누가 되레 아플까 하여, 그럼에도 그런 나를 대신하시는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라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결국은 주를 바라고, 주를 바람으로 한 영혼을 돌보고, 그 영혼을 생각함으로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만 대하지 않는 것이었으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나는 일찍부터 교회에서 자랐다. 싫든 좋든 내 곁에는 믿는다는 사람들이 늘 곁을 같이 했고, 저들의 배신과 어처구니없는 돌변으로 당황하며 자라왔다. 부친이 목사고 형제들이 모두 먼저 사역의 길을 걸으면서, 싫어서 도망치듯 멀리 달아나도 가는 곳마다 여기저기 믿는다는 사람들이었는데… 저들의 위선과 이기심과 의리 없음에서 나는 번번이 안 믿는 친구들을 더욱 선호하였다. 최소한 저들은 위선은 떨지 않는다. 말을 에두르지 않고 싫으면 쌍욕을 해대고 떠나도 되었다. 한데 이건 믿는 자로서 서로들 가식은 다 떨다 어떤 위기, 어려움 앞에서는 내남없이 자기 잇속을 차리는 것이었으니. 그래서 난 지금도 은연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더 경계하고,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을 더 꺼려한다. 과도한 친절과 공연한 마음씀을 그래서 두려워한다.
오늘 이삭과 그랄 사람들과의 일련의 일들을 읽고 묵상하며, 고작 나는 아직도 어떤 아픈 기억에서 씻은 바 되지 못한 것을 목격할 뿐이다. 하여 말씀은 경고하셨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창 26:2).” 한데 훗날에 그 아들 이삭이 근심거리가 되었으니,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34-35).” 그래서들 생을 다 기구하다 하는가. 결국은 세상이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시 49:6-8).
과연 우리는 이를 알고나 그리 열심히 사는 것일까? 참 다들 애쓴다. 그러니 그렇다 한들,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9).” 아, 이 한계, 이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더러는 짐승만도 못한 게 사람이라,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0).
생의 허무함 앞에서 다시 한 번 묵상하여도,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2-13).
그러니 저만 모른다. 결국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14).”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겠으니,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18-19).
어처구니없는 우리 사람의 한계여,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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