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전봉석 2021. 10. 14. 05:29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5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

 

 

은혜가 나를 좇는다. 내가 서는 곳에 은혜도 머문다. 야곱을 보면 이를 알겠다. 상대적으로 에서는 은혜를 구하나 그 틈을 메울 수 없다. 간격이 멀어 그 속에 결핍뿐이다. 은혜란 용서다. 더는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렘 50:20).” 이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어떤 누구라도 주 앞에 설 자격이 되겠나? 한데 우리로 주 앞에 서고 온전히 주를 바랄 수 있게 하심이 귀하고 엄청난 일이었다. 오늘은 야곱을 통해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하심을 본다. 상대적으로 에서의 초라함은 눈물겹다. 애써 그 부모의 마음을 알고 아내를 다시 얻은 것이 이스마엘의 딸이었다.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창 28:9).”

 

혼자 가만히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본다. 아버지 앞에 무릎 꿇은 작은 아들이 있고 아버지의 손은 저의 등을 감싸고 있다. 이를 지켜보며 둘러선 자들의 표정이 마뜩찮은 듯하다. 불빛 뒤편으로 서 있는 이가 큰아들이 아닐까? 저는 어둠에 몸을 숨기고 이를 훔쳐보듯 함께 하지 못한다. 탕자는 아버지의 품에 얼굴에 묻고 아버지의 다리를 붙들고 있다. 탕자 등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손이 오른손은 어머니의 손 같고 왼손은 아버지의 손 같다. 확연히 여성과 남성의 손으로 느껴지게 그 차이를 둔 것을 본다. 아버지의 얼굴은 온화하고 밝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2).

 

정작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은 없다. 어떤 말을 할 때에도, 누구의 말을 들을 때에서도, 무슨 일을 두고, 이를 어찌 마주하면서도 우리 안에 수시로 들어차는 것이 간사함이다. 거짓으로 비위 맞추어 남을 속이는 꾀가 간사다. 지나치게 붙임성이 있거나 아양을 떠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는 누구라도 자기 이익을 구하는 데서 생겨나는 자동발생적인 언사다. 누구한테 배우거나 익힌 것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다. 마음을 바르지 못하고 꾀를 부리는 데 능숙하다. 한데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을 수 있다니! 그 비결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

 

주 앞에 토설해야 한다. 아뢰고 고하여 차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실을 주 앞에 아뢰는 것이다. 이는 서로를 대하는 데도 전혀 다른 용기와 담백함을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은연중에 자신을 덧대고 포장하여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방어한다. 열에 아홉은 나머지 하나를 숨기기 위해 지어낸 표정이고 괜한 말들이다. 우린 결코 순박하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다. 꾸며 스스로의 의를 내비친다. 행여 무시당할까, 또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수치를 의식하는 것이다. 시편은 이 또한 솔직하게 표출하며 그 원인을 알았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

 

속에 쌓아둔 말은 썩는다. 자신은 괜찮다고 하지만 그 입에서는 악취가 난다. 선한 말을 하는데도 의로움이 없다. 간사 때문이다. 남을 위하고 칭찬하는데도 선을 느낄 수 없다. 간사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가 어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속에 둔 말이 뼈를 썩게 하고 종일 괴로움으로 신음하게 한다. 이에,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4).

 

마치 고름을 짜내듯 주께서 이를 짓누르신다. 한 다리 건너 누가 결국은 조현이었다. 강박이나 우울이나 하며 다소 수위를 낮추어 말하더니 결국은 다시 또 병원에 강제 입원을 시키고 말하였다. 들어보면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던 것을, 다들 쉬쉬 하며 감추고 괜찮은 척 굴었으니 더는 저의 횡포에 일상이 어려워진 것이다. 연대를 차석으로 들어가고 나름 명석하던 아이가 숱하게 먹여대는 약물과용으로 지능이 낮아졌다. 이성적인 판단이나 서로의 신뢰는 붕괴되었고 악의와 불의와 표독스러운 적개심만 남았다. 점점 더 하는 짓이 미운 네다섯 살 아이의 터무니없는 생떼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언동으로 그 부모에게도 위협적이다.

 

나는 그 이야기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것은, 그럼에도 그 부모나 직계가족이 ‘종교인’이라 하여 목사라서 멀리한다. 그런데 참 우습지? 그 일로 무당을 찾고 어느 무속인을 찾아 엄청난 값을 주고 부적을 사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증세는 깊어져 더는 주체할 수 없는데, 명색이 배운 자들이요 돈들도 있는 집안이라 내로라하는 병원이며 이름 있는 의사를 찾아 떠돈다. 어디 시설 좋은 병원에 입원했다 해도 어쨌든 폐쇄병동인 것을. 들어가 있을 때는 안도하다 나오면 다들 불안해하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 귀하디귀한 아들 하나가 졸지에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가 된 것이다. 모친은 눈물로 호소하며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고 부친은 억하심정으로 ‘쳐 넣은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니 물리적으로는 자신들이 먼저 죽을 몸인데, 남겨질 아이로 인해 잘 사는(?) 딸애에게 해가 될까 하여 걱정이 또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다리 건너(!) 나는 저들의 소식을 들으며 가만히 주의 이름을 되뇐다. 직간접으로 연결이 된 누구에게 안산에 있는 조현병 전문의를 소개하고 병원 사이트를 링크하여 보냈다.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저들은 기도를 원하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 같아 나는 이만치 떨어져 있을 뿐이다. 저들 눈에는 나 또한 다를 게 없이 비루할 테니, 한데 나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그런들 저들이 듣기를 하겠나? 더 나은 시설과 내로라하는 이를 찾아가고, 뒤로는 어디 용하다는 무속인을 찾아 전전긍긍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누구 ‘용한 목사나 교회’를 수소문하기도 한다. 풉, 그러니 누가 나를 소개하는데 이를 어찌 용하다 할 수 없고 뭐라 말하기 궁색하니 얼버무리는 모양인데… 나로서는 됐다.

 

주의 뜻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나의 앓음과 심약함으로 주의 이름을 붙든다. 마치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버지 품에 안겨 그의 두 발을 꽉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렘브란트의 그림 속 모습처럼 종종 저가 나인 것을 나는 참으로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다 저 뒤 불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은밀히 훔쳐보는, 분명히 큰아들일 게 분명한 이의 표정을 한참이고 들여다보며 그 심정을 헤아리다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 오늘 본문에서 에서의 나름 그 마음씀이 눈물겨운 것처럼 은혜 밖은 어둡고 음습할 따름이다.

 

이내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한다. 한 곳에 유숙하려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누웠다. 형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채긴 했으나 낯선 길을 떠나는데 어찌 두려움이 없겠나. 그런 그가 두려움과 떨리는 심정으로 잠들었다 꿈을 꾼다. 저의 꿈에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다.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다. 자세히 보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한다. 또 자세히 보니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 계신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막연하게 삼라만상에 깃든 어떤 기운이 아니다. 실체다. 그 부모와 부모의 부모에게도 하나님이셨다. 저가 이르신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이어 조부에게 하신 약속과 동일한 말씀으로,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지금 저의 처지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그러자 더욱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 놀라운 약속은 나에게도 하신 것과 동일하다. 아브라함의 것이고 야곱의 것이고 이제 우리 모두, 믿는 자들의 것이다. 나는 누구의 소식을 들으며 나의 비루함과 누추함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주 날씨가 좋아서 어디든 가고 싶었는데, 문득 영화관을 떠올렸다. 밀폐된 공간이며 어둠의 장소에 소란스런 소음이 가득한 곳으로 은연중에 피하며 살게 된 곳이다. 간 길에 정신과에도 들를 겸 큰 용기를 내어 점심시간 것을 예매하고 여유롭게 갔다. 핫도그로 요기를 하고 텅 빈 영화관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밖에 손님도 없는데, 하여 뒷문을 열어두면 직원이 와서 닫고 열어두면 와서 닫고 하여 이내 어둠 속에 갇히었다. 별로 어렵지는 않았으나 굳이 끝까지 이겨내고 싶지는 않았다. 중간에 나와 그런 이야기도 담당의에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걸어서 교회로 왔다. 피로감이 몰려와 좀 자고 싶었지만 그러느라 오후가 다 갔다.

 

천천히 걸어 일찍 집으로 오면서 ‘아픈 아이’에게 전화를 넣었다. 언제부턴가 유일한 친구다. 빈둥거리며 게임만 하는 것을 새로 산 보드를 들고 운동을 나가라고 했다. 녀석은 이제 내가 전화를 하면 성경을 어디까지 썼는지 묻지도 않은 말부터 한다. 너무 많은 약물과 오랜 시간 방치로 인해 지능은 낮아지고 조울증은 심해졌고 감정폭발은 느닷없었다. 그러던 게 세상 누구보다 온순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오직 주만 바라는 친구가 되었다. 물론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엉뚱한 데 기웃거리지 않고 교회를 믿고 주 앞에 내어맡긴 결과다. 열 몇 개씩 먹던 약물은 하나로 줄었고, 혹시 몰라 안정제를 중간에 한 알 먹기도 한다. 예의바르고 겸손한 청년으로 누가 저를 조현으로 보겠나? 물론 가끔은 가장 만만한 엄마에게 화를 내고 성질을 부르기도 하지만, 이제 더는 욕을 하거나 횡설수설 저 혼자 말을 떠벌여대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하는 환청이나 환각도 없어졌다.

 

누구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물론 세상적으로 좋은 병원, 훌륭한 의사도 필요하나 우리의 의사, 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저마다 다들 자신들은 괜찮다고 여긴다. 의학적으로도 20대 전후 30대에 조현이 오는 확률이 높다. 의학은 확률 싸움이고 분포하는 숫자가 증명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데 아랑곳하지 않는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와 돌아온 아들 외에 네다섯 명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으면, 이상한 아버지에 염치없는 망나니 아들일 뿐이다. 한데 렘브란트는 음색의 조화를 의도적으로 저 둘을 밝게, 그 표정과 손끝까지 설렘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이 묘사하였다. 그림으로 액자에 담긴 것을 사고 싶은데, 나는 어디서 다운받은 핸드폰 사진 한 장으로도 족하다. 가만히 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성경의 한 대목, 탕자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다. 은혜 안의 이와 은혜 밖의 사람들이 갈린다. 오늘 본문의 에서가 보이고 야곱이 누구인지도 알겠다. 한 다리 건너, 누구에게도 이러한 말을 들려주고 싶은데… 가장 난감할 때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을 마주하는 것이다. 주의 은혜밖에는 달리 답이 없다.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사 29:18-20).

 

그 날이 오기까지 아이들만 고생이라. 죽어라 하고 기를 쓰고 어른이 된들, 그 부모의 족적을 따라 걷는 게 전부일 테니. 돈돈거리는 부모와 같이 돈돈거리며 살고, 새로 뽑은 차로 또는 늘려간 집의 부유함으로 삶의 성공을 가르고 행복을 처분하는 것이니. 비록 한 다리 건너지만 내 곁에 나름은 참 부유하고 많이 배웠고 지금도 남부럽지 않을 저들의 속을, 나는 불쌍히 여기며 주의 이름을 되뇐다. 어쩌겠나? 결국은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인데,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사 42:16-17).

 

같은 은혜 같은 아버지가 계신데 누구는 밖에 누구는 그의 품에, 이 말도 안 되는 ‘거역의 사이’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나? 오늘 시편은 말한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6-7).

 

그리하여,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8-9).

 

그러므로 우리 소원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0-11).

 

곧,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2).

 

결국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