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전봉석 2021. 10. 16. 05:22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창 30:43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 53:6

 

 

인생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예전에 알던 누가 어찌 되었고, 무슨 일을 겪으며 살았다는 소식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어려웠을 시간을 생각하며 누구의 말을 듣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다. 누구는 이런 소원을 누구는 저런 일로 기도를 부탁할 때에 나는 위로의 말을 전하게 되는데, 어떠하든지 누가 우리로 주의 사랑하심에서 끊을 수 있겠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하고 성경은 되레 반문하신다. 이어 근거로는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사느라 사는 일이 참으로 다들 고역이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는 새 힘을 얻는다(롬 8:35-37).

 

우리의 이김은 주의 사랑하심에 있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이는 우리가 준비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다. 지혜자는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하고 주의 섭리를 단언하였다.

 

오늘 본문을 살피면서 야곱의 처신과 그 행적을 살피며 생각이 많아진다. 저를 둘러싼 여러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본다. 외형적으로는 저의 삶이 참으로 어지럽고 복잡한 것 같지만 이를 가지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토대를 삼으시고 계셨다. 곧 주의 원대하신 구원의 계획하심을 연상하게 된다. 곧 저로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고 그 후사를 주의 민족으로 삼으시는 것이었다. 이를 시편은 진술한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 53:6).

 

결국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말씀으로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이 우리로 그 말씀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하게 하신다. 헬라어로 ‘로고스’라 할 이 의미는 이성과 언어를 동시에 뜻한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어찌 알고 대면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여기서 중요한 진리 두 가지, 하나는 이 복음-그리스도의 영광이 가려진 사람들이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말씀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이를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는 일은 하나님을 마주하고 내 이야기 속에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알 수 있다. 누가 이런저런 일로 기도를 부탁하였다. 여러 사연들이 있는데 때론 죽은 자를 위해 복을 빌어달라는 소리도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당장의 현실적인 일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인데 이를 무슨 기원이나 바람 정도로 안다. 나는 그 너머의 ‘주의 놀라우신 섭리’를 간단히 설명하고, 기도는 그저 축원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마음속으로 원함.’ 이것을 기도로 안다면 이는 큰 오해다. 그럼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 일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일이다. 그건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그 오해는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데 있어 축원함을 기도함으로 혼용하여서다. 나는 되레 저에게 저의 어려움이 복이 되기를 바란다고 일렀다. 이를 알지 못하면 속량하심도 알 수 없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물론 우리의 연약함은 배고픔으로 또는 호기심과 어떤 희망을 담아 그 마음에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게 신앙이고 기도라고 여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따랐고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러다 자신들의 이상과 현실이 예수의 말씀과 닿지 않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그럴 때에 예수님의 관심은 저들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67).” 그럴 때에 우리의 대답은 무엇이어야 할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

 

곧 예수를 믿는다는 일, 주께 아뢰어 기도한다는 일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자신의 일과 자신의 의를 구하기에 바쁘지 정작 우리의 관심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도 먼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라가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니 누가 이런저런 일로 저의 사연을 들려주고 어떤 기도를 부탁할 때, 나는 선뜻 그의 희망을 축원하지 않는다. 어떤 문제, 그 사연에 가려진 주의 나라와 주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부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산 역사가 깨어나기를.

 

기도는 문제를 푸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인과관계로 알게 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찬양하는 일이다. 삶은 얼마나 고단한가? 그럼에도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이에 뜻을 다하여,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곧 우리는 ‘하던 대로’ 하는 것이 기도다. 당장의 문제로 함몰되는 게 아니다. 물론 우리도 사람이라, 왜 아니 두렵고 염려나 근심이 왜 따르지 않겠나? 그럼에도 묵묵히 ‘하던 대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누가 어찌 감사를 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그렇게 우리는, 하던 대로 하는 것이 기도다. 이 땅에 살면서 여러 어려움이 우리로 쉼 없이 공격하지만… 그리하여 누구는 믿었던 이와 그 가족에게 돈을 뜯기고 소송까지 가게 되었고, 누구는 죽어가는 가족을 두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엎드렸고, 누구는 고달프게 돈벌이의 지겨움으로 내몰리느라 주를 찾을 경황이 없고…… 그런 가운데서도 저들은 나와 마주치면 기도를 부탁한다. 나는 저들의 기도제목을 그대로 주께 아뢰지는 못한다. 어떤 이의 끔찍한 일은 가까이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 누구의 대수롭지 않은 일을 두고는 눈물이 먼저 앞을 가리기도 한다.

 

어제는 ‘아픈 아이’와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빗발울이 흩뿌려 나는 아이가 내릴 전철역에 가서 한참을 기다렸다. 늘 오전근무라 퇴근이 일정한데 이상하다 싶어 전화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 있었다. 화들짝 놀라는 아이를 진정시키고 괜찮다고 그냥 돌려보내고는 김밥을 한 줄 사들고 교회로 도로 올라갔다. 모두가… 아픈 것이다. 저들도 자신을 자신이 어찌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걸 두고 뭐라 나무란들. 아이는 미안하다며 버스에서 내려 다시 오겠다고 하는 걸 괜찮다고 하고 돌려보내고는, 새삼 알겠더라. 우리는 모두 약하고 상한 심령으로 살아간다. 마치 의로운 롯이 악한 무리 속에서 살며 그의 심령이 상하였던 것처럼,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

 

아이는 요즘 무료함을 달랜답시고 다시 오락을 즐긴다. 누군 주식에 빠져 그 재미로 산다(?) 누구는 새로운 취미로 골프를 시작했고, 어디 집이나 땅을 보러 다니며 이를 샀다 팔았다 그 가운데 이익을 챙기는 재미로 산다. 사니까 살아서 마주하는 것들이 온통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어쩌겠나?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그와 같이 우리는 무력하나 그러므로 더욱 다니엘과 같이 ‘하던 대로’ 주 앞에 기도한다. 새삼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무슨 일을 해결하고자, 축원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말은 이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로 기도하게 하는 것은 절박함으로였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비난하며

독주에 취한 무리가 나를 두고 노래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69:12-13).

 

그럴 때에 성경의 놀라우신 약속은 엄연하였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이와 같은 말씀으로 붙들리면 어찌 기도하지 않겠나(사 58:9). 또한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10)” 하고 이어지는 말씀 가운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 58:11).

 

이것으로 오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이는 영원히,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12).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당장의 어려움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 당하는 고통으로 끝이 아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다. 기어이 우리 주는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이다. 더는 쓸모없고 버려진 곳으로 여겨졌을 것을 두고,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하고 오늘 우리로 그 자리에서 일으켜,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12).” 이 놀라우신 뜻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는 너무나 조악할 따름이다. 아이의 입에 물린 막대사탕으로 전부가 아닌 것이다.

 

반드시 우리 하나님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11).” 이와 같이 엄청난 존재인 것을. 한낱 오늘을 먹고 사는 일로 전부가 아닌 것을 일깨우시기 위해서도, 오늘의 어려움과 곤고함을 허용하시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진술과도 통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해도 ‘우리 주의 자녀가 세상과 같이 정죄함을 당하게 하느니, 오늘 어려움을 겪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읽으면 ‘죽여서라도 살리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기도를 부탁할 때 저의 바람을 있는 그대로 주께 아뢰지 못하는 경우는 그 일을 통해 주의 나라와 주의 뜻이 저와 저의 가족들에게 이루어지기를… 이를 위하여서면 저의 기도대로가 아니라 주의 뜻대로 행하시기를… 나는 은연중에 구하고 있었다. 먼저는 저의 영혼이라. 주의 관심은 우리의 행복이 아니다. 오늘을 잘 사는, 꼬인 문제가 해결되어 한결 수월하게 살기를, 마음 편히 살다 오기를 바라시는 게 전부다 아니다.

 

이를 알 때 오늘 야곱을 둘러싼 번잡스러운 일들과 서로의 반목이 도리어 주의 놀라우신 민족을 이루어가는 데 있어 밑그림이 된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 30:43).” 곧 어느 훗날에 오늘의 시편은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53:6).”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다 해도,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 이와 같은 현실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한다 하여도, 어쩌겠나?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 저들은 본래 그러려고 난 자들이다. 하여,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5).

 

이를 누구보다 다 잘 아시는 우리 주께서 반드시 회복하실 것이다. 곧 우리의 결과, 기도 응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