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전봉석 2021. 10. 18. 05:23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7-28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예배 전에 아이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두운 표정과 시무룩한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은 또 엄마 이야기를 했다. 죽고 싶다는 말도 했다. 엄마의 침묵에 대해 그리 말한 것인지, 엄마와 대화하면서 그리 말하였다고 하는 소린지, 곧 예배 시간이 되어 묻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같이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느끼는 감정은 있고 이를 소화하는 능력은 어려워한다. 입장을 바꾸어 내가 곁의 엄마나 가족이라 해도 지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아이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됐든 엄마의 기도와 전폭적인 하나님께로의 신뢰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문제일 거였다.

 

무슨 일인가를 상세히 옮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게 말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누가 아픈 것인지, 누가 온전하지 못한 것인지, 우리는 서로를 두고 가늠할 수는 없다. 가까운 가족끼리도 그렇고 먼발치의 남의 일도 그렇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해결될 것도 아니고, 다만 주님의 마음이려니… 시무룩해하는 아이가 마음에 걸려 ‘어찌할꼬!’ 하고 주의 뜻을 살피는 일은 또한 주가 두시는 것이려니…. 어렵겠다, 서로가 참 어렵겠다, 하는 생각만 계속 이어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여들었다.

 

고향에 다다를수록 야곱의 마음도 그리 복잡하였던가보다. 두 떼로 나누었다가 선물을 앞세웠다가 자신은 맨 뒤로 남겨져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담판이다. 이에 하나님의 사람이 물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대답하였다.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말하였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7-28).”

 

아이 일을 두고 먼저 모호한 말로 글을 시작했지만 실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교회가 처한 일이고 사람마다의 개인적인 일이다. 국가의 문제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 결국에 길은,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야곱은 옛사람이고 이스라엘은 새사람이다. 야곱은 창조되었고, 이스라엘은 조성되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를 쥐고 흔드는 것에 대하여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결국은 믿음의 문제가 남는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실 때에 얼마나 이를 붙들 수 있는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실 때에 그 믿음의 정도와 진정을 어디에 두고 살 것인지. 의당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약하다.’ 우리 정신으로는 어림이 없다. 이에 덧붙여 오늘 말씀은 그 비결을 알리신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그럼에도 이를 맡기고 내려놓기가 쉽지가 않다. 나의 의지로는 아무래도 불가능하다. 나는 그럴 때 가만히 주의 말씀을 다시 더 되새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먼저는 우리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께 ‘주시는 자’이다. 그렇다면 ‘다 올 것이다.’ 이 또한 예수님도 아버지를 믿으심이었다. ‘오면 받아주고 안 오면 받아줄 수 없다’는 의미로가 아니다. ‘올 것이다.’ 그리 돼 있는 단정적인 의미다. 이는 결국 ‘올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서로가 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그럴 것이란 계획이 아니라 확정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두시는 사명으로,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종합해볼 때 이 모두를 주는 알고 계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10).” 그러니 앞서 이르시기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9).” 곧 우리의 행함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이를 붙들고 신뢰하지 않으면 어찌 이 모든 날들에서 주를 바라며 살 수 있을까? 그러니 나도 모르면서 아이를 대한다. 어떤 일을 두고 마치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마주한다. 저보다 뭔가 더 나은 게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는 말씀 앞에 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 46:3).

 

하시고, 또 일러 이르시기를 거듭 두려워하지 말 것을 일러 새 힘을 돋우신다. 여기는 애굽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당면한 과제이고 끌어안고 사는 풀리지 않는 응어리다. 야곱으로는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로밖에는 안 된다. 주를 의지하는 일이다. 그러하니 성경은 이르신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민 14:9).

 

오늘 우리가 처한 어떤 어려움, 그 노여움으로 우리는 주를 찬송한다. 곧 우리의 먹이라!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이를 두고 씨름할 가치도 없는 것을, 아이에게 지치는 엄마는 입을 다물고 며칠째 침묵한다. 아이는 엄마와 한 번도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며 극단적인 소릴 해댄다. 나는 아이를 어찌 다루고 이해하고 설득시킬지, 알 길이 없다. 내 곁에 산적해 있는 모든 문제들도 다를 게 없다. 한데 ‘이는 우리의 먹이다.’ 별 거 아니다.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성경은 일관되게 거듭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신 1:29).

 

끝도 없이 거듭 강조하심은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2).” 이는 단정적인 결과다. 그리 될 것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리 된 것을 두고 이르시는 말씀이다. 하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23).” 곧 우리는 저의 몸이고 저는 아버지의 뜻을 아시고 이를 믿고 이를 행하실 뿐이면, 그 몸은 이에 따라 움직일 따름이다. 팔이 다리에게, 다리가 눈에게, 눈이 손에게… 거듭 서로의 반문과 반목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8-19).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말씀은 엄청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을 두고 하신다. 하여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이어지는 말씀으로도 우리는 교회이며 그의 몸인 것을 거듭 강조하신다(20-21). 결국은 야곱이 하는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로 조성하신다. 이에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사 44:2).

 

나를 만들고 나를 지으신 이가 나를 도우신다. 나는 육신을 입고 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자로도 산다. 그런 나, ‘내가 택한 여수룬아!’ 하고 주가 나로 이르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심이다. 내가 택하여 선택한 길을 가는 게 아니다. 여느 인생도 그와 같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이들과는 다른 의미다. 주께서 앞서 만족하심은 그래서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5).

 

그저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묵묵히 주를 따름이다. 노아의 방주 짓는 일도, 모세의 그 험한 광야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이끌어 앞서는 일도,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맹랑한 주를 의뢰함도 모두가 어린 아이 같이 주를 바라고 주만 따름이었다. 이에 주님은 오히려 이를 감사하시며,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1).

 

나는 이를 시적으로 읽는다. 그 안에 숨은 함의를 묵상한다. 오늘도 야곱의 긴 여정에서 저 나름은 꾀를 내고 나름 주의하여 대비한다고 하면서, 이내 모두를 앞세우고 외로움에 자신을 두고 하나님과 독대하였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창 32:24).

 

결국은 그 많은 소유도 가족도 자신을 따르는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는 밤새 주와 씨름한다. 결국,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5).

 

결국 우리로 불구의 몸으로 온전을 이루신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7-28).”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받았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8).

 

과연 그러한지. 그러하여서 더는 연연하지 않고 오직 주만을 바라며 살고 있는지. 이내 그럴 수 없자, 야곱은 남은여생을 절며 주를 의지하였다. 이스라엘로의 삶은 온전치 못한 삶으로 여겨질 수 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은 미숙하고 맹목적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일, 매우 뛰어난 사리분별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감각으로 주신 생을 무난하게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렇게는 야곱으로 족하였다. 옛사람은 죽었고 새사람으로 산다. 살아서 사는 동안에 불구된 자로, 그 살과 피를 나뉘며 사는 일은 고단한 것 같으나….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오늘 말씀은 여기에 나를 앉히시고 되새기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23).

 

우리로 주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심을 강조하신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고, 우리로 ‘살며 사랑하며 배우게 하시는 일’이었다.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

(사 27:12).

 

이에 오직 주를 바람이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1: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