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창 31:23-2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 54:4
‘인간사는 새옹지마’란 말은 인생에서 길흉화복을 예측하기란 어렵다는 의미다. 곧 어느 변방에 새옹이 기르던 말이 한 필 있었는데 이것이 어느 날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노인은 낙담을 하였으나 달아난 줄 알았던 말이 며칠 뒤에 훌륭한 준마를 한 필 데리고 돌아온 것이다. 이를 또 아들이 좋아하며 준마를 타고 길들이려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노인은 다시 낙담을 한다. 그때에 변방에는 전쟁이 일어나 아들도 징집이 되었는데 다리가 부러져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20년의 세월을 보면서 그야말로 누가 우리의 앞날을 예측할 수 있겠나싶다. 사랑하는 한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도합 14년을 살고 자신의 품삯을 불리느라 6년을 더해 그 긴 세월이 순식간이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이시라.’ 곧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주신다’는 오늘 시인의 고백이 참으로 옳다. 어떤 어려움, 그 절박함 앞에서 우린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69:13).
이에 하나님의 응답은 엄연하여서,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 58:9-12).
어제 아침에도 같이 묵상하였던 이와 같은 말씀이 나는 참으로 좋다. 즉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그러니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는 때가 언제일까? 태평할 때야 누군들 여유롭지 못할 것이며 그 마음이 너그럽지 않겠나? 변방의 새옹의 사례와 같이 나쁜 일인가 하여 낙담할 때에 좋은 일로 돌아오고, 좋은 일인가 할 때에 나쁜 일이 터지기도 하는 것이니. 성경이 말하는 인생사 또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7:14).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심은 온전히 주만 바라고 주를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겠다. 이것을 억지스럽게 알고자 하여 역술가를 찾고 점쟁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면서 어리석은 길로 가는 것 또한 사람이다 보니,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의 역경이 오히려 주를 바라는 기회인 것을 알게 한다.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시 69:14-16).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에 다소 어리둥절하다. 올 10월의 한파는 64년만의 일이라 하니, 계절의 변화 앞에서도 우리는 속수무책이라. 전염병이 창궐하고 많은 사람들이 삶의 곤궁함을 호소하며 서로를 탓하고 있는 이때에 오늘 야곱의 일련의 사태와 그 소요를 보며, 그 흐르는 세월이 다소 허무할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누구보다 나는 이것이 크게 와 닿는 것이 87학번으로 신학을 했어야 할 때에 문예창작을 하였으나 97학번으로 편입하여 다시 신학 학부를 하게 되었을 때에 꾸준히 그 길을 갔으면 어땠을까? 잠깐 뭉그적거리면서 10년의 세월씩 훅훅 지나간 셈이었으니, 비로소 09학번으로 주의 강권하심이 나로 하여금 이처럼 꼼짝 못하고 다시 이 길에 세우신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은혜이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어떠하셨던가? 참으로 기이할 정도로 참고 또 참으시며 은혜 위에 은혜로 더하셨으니.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종종 나의 간증처럼 되뇌고는 한다. 그때마다 나의 어리석은 선택까지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게 하셨다. 돌아보면 그러한 세월이었음으로 오늘의 나 또한 가능하였다. 이는 마치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자신의 생을 돌아보는 진술과도 같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이란 그저 막연한 어떤 소원도 아니고 우연의 하나도 아님을 알게 한다.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함과 같으니라
(롬 4:4-8).
이와 같은 말씀을 가만히 되뇌다 보면, 이는 온전히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놀랍기만 하다. 나야말로 한 게 없고, 여전히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인데 이러한 나를 은혜로 거두심은 느헤미야는 말처럼,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느 9:31).
하는 고백이 내 것이다. 자신의 것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더는 무엇이 어려울까? 예레미야도 슬픔 가운데서 고백하였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 3:22-23).
나는 이처럼 아침마다 말씀이 새롭다. 어떤 날은 끙, 하고 연약한 몸을 이끌고 앉아 또 어떤 날은 마음이 어려워 끙, 하고 돌아눕고 싶은 심정을 가다듬고 앉아 이처럼 더듬어가며 이어지는 나의 생이 오늘 본문의 야곱의 날들과 비추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동일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동일하였을 이와 같은 신앙 고백을 두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이국땅에서 고위직을 수행하는 사명을 다하면서 다니엘의 신앙고백도,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단 9:18).
곧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할 때에 바벨론과 같은 이 땅에서의 삶이 가장 어렵고 곤란할 때는 주께서 주의 얼굴을 가리실 때이었다. 우리를 외면하시는 듯 주의 응답이 없는 날보다 암울하고 곤란한 때가 또 있을까?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
(시 69:17-18).
우리의 의지할 자는 하나님뿐이시라. 우리는 장차 알 것이다. 우리는 주를 거역하며 살았으나 주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범죄함을 기억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에 대하여,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시 25:7).
내가 어찌 이를 두고 주께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누구는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88:5).” 이러할 때 이보다 더 끔찍하고 불행한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은혜란 결코 보편적인 게 아니고 누구나 주의 긍휼하심을 따라 살 수 있으나 아무나 주의 긍휼하심 가운데 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누구는 그 삶을 스스로 지고 이고 생 고생을 하며 살아도 다 갚지 못하나 나는 그야말로 하는 것 없이 주의 은혜로만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주의하는 것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멸하지 않는 일이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말 1:7).” 곧 스스로가 태연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었다. 오늘의 이 모든 상황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인한 것인데, 이를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공로로 돌리는 경향을 종종 목격한다. 내 안에도 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 우리 몸을 중히 여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내가 나를 돌보는 일도, 내 곁에 두시는 이를 마음을 다해 위하고 기도하는 일도… 그것이 때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 같이 허무할 때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빠져 스스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사는 일일 때도 있느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시 54:1).
나의 구원과 나의 변호는 온전히 주께 그 전권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다만 주를 바람이 저는 나의 유일하신 대언자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어느 훗날 나는 주의 심판대 앞에 서서 죽어 마땅한 나의 죄로 인하여 영원 형벌을 면할 길 없으나 그때에 나를 변호하시며 대언하실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공의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를 절대 정죄하실 수 없다.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오히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한다. 그리고 오늘도 입을 열어,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아침마다 주 앞에 앉아 주께 아뢸 수 있는 오늘의 이 복이 은혜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엊그제 맞은 독감예방접종 탓인지 왠지 어지럽고 눕고만 싶고 속은 울렁거리지만, 여기까지 여기까지만 하고 이렇듯 한 자 한 자 주 앞에 아뢰고 고하며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이미 충분하였다. 오늘 시편의 진술과 같이 또는 야곱의 서사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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