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창 34:3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1
살면서 누구나 사는 데 따른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다. 이는 에둘러 있는 것이 굽어져 남겨진 사연과 굽혀진 마음으로, 꺾이고 부러진 여러 질고를 의미한다. 한 마디로 뒤섞여 복잡한 사정이다. 질병과 근심과 걱정과 고생이 뒤섞인 것이다. 오늘 본문을 읽다보면 야곱에게 끼치는 복잡한 사정이 겹치고 덧대어져 가히 참혹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느 날 저의 딸 디나가 ‘그 땅’으로 구경을 갔다가 세겜에게 끌려가 강간을 당한다. 저는 그 땅의 권력자인 하몰의 아들 세겜이었다. 자신의 힘과 권력을 이용해 욕정을 채우고 디나를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한다.’ 야곱이 디나의 봉변 소식을 듣고 잠잠하나 괴로웠다. 그의 아들들은 모두 목축을 위해 들에 나가 있었다. 저들이 소식을 듣고 근심하고 심히 노하여 돌아왔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이고, 행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몰이 아들 세겜의 마음이 디나로 인해 연연해하는 것을 알고 잡아두고 있는 디나를 아들 세겜의 아내로 삼겠다고 나섰다. 그러면서 서로가 좋을 대로 통혼하고, 함께 거주하며, 땅을 서로 매매하고 거기서 기업을 얻으라고 후히 마음을 쓰듯 권한다. 이는 모두 하나님이 금하신 일로 옳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때에 야곱의 아들들은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는 ‘할례’를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려는 수단으로 꾀를 내었다. 즉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되 자신들의 성별되고 구별된 영적인 일을 자신들의 보복과 앙갚음을 위해 이용한다.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14).” 하고 저들로 그 조건을 받아들이게 회유한다. 그러자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비롯하여 ‘그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 그렇게 저들이 표피를 베고,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인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성읍의 남자들을 도륙한다.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데려온다. 그뿐 아니라 야곱의 아들들은 노략하고 보복하였다.
야곱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시므온과 레위에게 일러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30).” 하자, 저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1).” 하고 반문한다. 그러게, 저들이 잘못한 게 무엇인가 싶다. 사람의 편에서 이는 정당하였고 당연한 행위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두지 않고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하면 말이다. 사람으로 사람들의 땅에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데 있어 저들의 보복은 정당하였고 이를 뭐라 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한데.
먼저는 ‘그 땅에’ 호기심을 가진 디나의 문제다. 다음은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데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당면한 일에 몰두한다. 이때 우리의 대책이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성스러운 예식을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도용했다. 그 고통을 이용해서 살육을 벌였다. 자신들 또한 감정을 충족시키는 데 전념하였고 이를 죄로 의식하지 못하였다.
이에 오늘 시편 57편의 시적배경이 되는 의미가 상대적으로 느껴진다. 다윗이 지은 시로 저가 사울을 피하여 굴에 숨어 있을 때에 지은 것이다. 그 형편과 사정, 억울함이나 고통스러운 우여곡절에 대해서는 야곱의 것과 다를 게 없다. 한데 이를 대처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2).
다윗은 연마된 시련 가운데 주를 의지하는 데 숙련된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스스로 주 앞에 다짐하여 이른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7).
단지 그렇다는 마음의 각오 정도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진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주를 찬송한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8-9).
상당히 대조되는 일면의 상황이다. 모든 우여곡절은 어쩔 수 없는 처지를 담보로 우리를 꺾고 비틀고 뒤섞어 옴짝달싹은 못하게 한다. 마치 오늘에 이르러 그런 것 같지만 예전도 그러했고, 예전에만 그런 것 같지만 인류가 거듭되는 동안은 여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를 두고 성경은 일러 우리에게 지혜를 촉구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나는 요즘 이처럼 성경의 의미를 시적으로 운율을 두어 그 마디마디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럼 여기서는 두 가지 약속이 드러난다. 첫째는 염려하기 전에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 둘째는 그 모든 일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 곧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높이시고, 도우시며, 붙드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할 일은 오직 하나, 주를 의뢰하는 일.
어제는 오전 일찍부터 설교원고를 작성하였고, 아이 일로 마음이 쓰였고, 혼자 점심을 먹고 멀리 돌아 산책을 오래하며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오후께 우연처럼 마주하게 된 말씀이 시의적절하였으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 왜 이렇게 마음이 어려운가 했더니 말씀이 먼저 알고 계셨다. ‘아픈 아이’로 단정 지어, ‘어쩔 수 없는 일’로 대하고 치워두는 나의 태도에 대하여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이 구절을 분절로 나누어 묵상하면,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먼저는 ‘삼가’ 곧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가 우선이다. 나는 저 한 영혼을 대하는 일에 정중하였나? 하고 되묻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 작은 자’라 하심은 내가 행여 막대해도 되는 상대쯤으로 저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무슨 말을 하다 무시하고, 듣는 둥 마는 둥 가벼이 듣고 마는 정도에서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취급하지 않았던가? 아무도 이를 눈치 채지 못할 수 있으나, 주님은 일갈하신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곧 그러한 나의 마음을 주께 아뢰지 아니하겠나?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덧붙여 주의 가르침을 일깨우신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2).
여기서 아흔아홉 마리를 둔 산은 교회다. 안전하다. 이에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밤을 지새운다. 교회의 역할이고 나의 사명이며 주를 아는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의 이유다. 이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3).
이미 안전한 주의 백성들보다 잃었던 한 영혼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진술과 묘사로 각각 묵상해보자.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곧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게 한다. 이를 분절하여 묘사하면,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늘은 하나님의 존엄과 권위다. 그 뜻은 많고 적음이 아니고, 더 귀하고 모자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일본작가 하루끼의 소설 제목처럼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점점 더 그 지경은 심화될 것이다.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한낱 놀이에 의해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좀먹고 있다. 나는 잘 모르나, ‘리니지’라는 게임을 보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 기술의 하나다. 게임을 해본 사람의 90%가 물론 가상의 세계라는 단서를 달지만 사람을 죽이면서(그것도 멋지게, 고난이 기술적으로) 쾌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오늘 야곱의 아들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리니지 게임의 한 장면으로 중첩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저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으로 율례라 하는 거룩한 고통의 행위를 감수하면서도 곁을 두려한 것인데, 시므온과 레위는 나름 정의의 이름으로 저들을 살육하고 도륙하였다. 더불어 그의 형제들은 노략하고 저들의 것을 빼앗았다. 그 지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반영될 겨를이 없었다. 묻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누구를 생각하다 누구 엄마의 지금 심정이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이해는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게 ‘그래도 되는’ 일은 아니다. 이를 오늘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중에 주를 신뢰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1).
이는 우리 성도의 기본적인 자세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따른 의무와도 같다. 내가 한 아이, 한 영혼을 대하는 일에 있어 우리의 교회의 사명도 그와 같다. 저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그 가족들마저 진저리치며 어려워하는 ‘문제’이나, 그러니 먼저 주의 뜻을 구하려는 의지가 결여된 이상 저들의 날들은 ‘리니지의 세상’이다. 가상현실에서가 아니라 실제상황이다. 인간성 상실의 시대다. 그러한 때에 다윗의 기도가 다시금 우리의 자세에 바른 교정을 이루는 것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2).
저는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이루어 가실 하나님이시다. 그러함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7-8).
내가 나의 영광, 쾌감 또는 어떤 보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드는 모든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러려면,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9).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길은 감사와 찬송으로다. 아니, 그런 지경에 어찌 감사와 찬송이 가능하겠나 싶지만,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3).
그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신다. 다시 말해 내가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주께 의뢰하는 것뿐이다. 곧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4).
이와 같은 끔찍한 상황, 더는 어찌 손 쓸 수 없을 것 같은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5).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이런 게 아니겠나? 그러할 때에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6).
억울하고 위태로운 상황이 늘 빈번하게 우여곡절로 겹쳐지는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7).
나를 주께 양도하고 의탁함으로,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8).
그리하여 오직 주만이 찬송을 받으시기를.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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