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

전봉석 2021. 10. 22. 05:2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창 36: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59:16

 

 

<코로나19>로 인한 ‘세 가지 수칙’이 나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서로 간의 ‘거리두기’는 우리의 너무 지나친 밀착이 주는 부정적인 요소를 해소한다. 가령 연애시절에는 애틋하였던 사이가 부부사이가 되면서 하나둘 허물어지는 것은 너무 속속들이 모든 게 밀착되고 들러붙으면서 생겨난 폐단이다. 막말을 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하고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어느 일정한 거리가 허물어지면서부터다.

 

두 번째 수칙으로 마스크쓰기는 그야말로 나는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너무 말들이 많다.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뱉어낸다. 오죽하니 주님도 일러 말씀하시길,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막 7:16).” 이에 말을 좀 적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 또한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도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조금은 자제하고 덜 먹는 게 낫다. 식탐과 탐심은 심리적으로 죄의 한 뿌리다.

 

세 번째로 손을 자주 씻는 일에 대하여, 자신이 하는 일에서 어지간하면 손을 떼거나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특히 안 믿는 자들과 같이 섞여 사는 데서 어쩔 수 없이 같은 데 손을 대곤 하는데, 이에 손을 자주 씻음은 곧 기도로 말씀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일이겠다. 요즘은 그야말로 내남없이 돈 버는 일에 다 같이 손을 댄다. 주식이나 부동산에 눈을 돌려 돈을 불리기 위해 혈안이 된 세상이다. 누가 노년에 남편이 죽고 저의 유일한 즐거움이 어디 땅 보러 다니며 이를 샀다가 저를 팔았다가 하며 이익을 남기는 것이라는데 저 또한 성도다. 눈만 뜨면 장세를 살피고 주식이 어떤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판을 읽느라 혈안이 된 것은 믿는 자라고 다를 게 없다.

 

오늘 본문에서 에서가 야곱을 떠났다. 서로의 재산과 종족이 많아지면서 그리 된 것인데,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이와 같은 거리두기와 말하기를 더디 하는 일과 손절을 하는 것은 혈육 간에도 일정부분 유익한 것 같다. 누구와 대화를 하며 이것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고 또 강조하기도 하였다. 너무 밀착되면 이는 서로에게 좋지 않다. 양떼 가운데 염소를 같이 풀어두는 것도 서로 엉기듯 몰리기를 잘하는 양들의 속성과 들이받고 치받기를 잘하는 염소의 특성으로 양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안다는 것은 여간 공들여야 하는 게 아니다. 그 마음의 중심으로나 알 수 있다. 한데 너무 붙어 있거나 뒤엉겨 있는 것들로 인해 그야말로 그럴 짬이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롭다는 이유로 어려워하는 것은 같이 있으면서 느끼는 외로움이 몇 배는 더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외롭지 않고 어찌 책을 읽고 글을 쓸까? 외롭지 않고 어찌 하나님과 독대를 하며 이와 같이 말씀 앞에 자신을 앉힐 수 있을까? 결국 우리의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오늘날의 코로나 사태도 그 교훈을 무거운 값을 물며 학습하게 하신 것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도 저가 궁지에 몰려 사울에 쫓겨 원수들을 피해 고통 가운데 있음으로 이와 같이 주옥같은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59:16).

 

피할 환난을 모르고 주의 인자하심을 바랄 일 없이 사는 게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우리에게 환난이 유익함을 진술하였는데,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곧 어려움이 없이 어찌 주의 이름을 부를까? 누가 말을 하다 저의 서러움에 눈물지을 때 나는 일정 부분 눈물의 정화작용을 믿는다. 이를 말 하고 털어놓으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도 어느 정도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하면서도 이를 자꾸 글로 쓰라고 권하는 것은,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7).

 

하고 저가 속으로 웅얼거리고 말았더라면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 유익이 전하여질 수 있었을까? 말이란 왜곡되기 일쑤고 와전하기 쉬워 여기서 아, 한 말을 저기서 어, 하고 받음으로 그 뜻을 전혀 다른 게 되는 것을 자주 느낀다.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토로하며 자신의 서러움을 또는 말 못하고 있던 것들을 털어냄으로 풀어버리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마치 한 잔 술에 시름을 달래고, 어디 훠이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좀 나아지는 것 같은 착각도 그래서다. 그런저런 게 모두 유익한 것도 있겠으나 일시적인 것은 학습되는 무기력과 왜곡된 성향의 옹고집을 낳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말끝마다 글을 좀 쓰시라, 하고 권하는 것인데….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이게 그러니까 억지로는 안 된다. 사람의 지혜로는 어림없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그러다 보니 권함은 내 자유지만 저의 행함은 주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절대적인 것이다.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의 희생이나 헌신을 ‘무엇을 위하여’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일렀다. 가령 이만큼 위하고 섬긴 것을 두고 저는 왜 안 주나, 하고 서러워한다면 앞서 행한 일이 빛을 바랜다. 그러다보니 매번 자신만 손해인 것 같고 그것이 부당한 요구에도 당당히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데까지 길들여버린 것이다. 아무리 남편이고 자식이라 해도 자신이 좋아서 그리 행하고 그리 행함으로 유익하면 그만일 텐데, 사람이 또 어디 그런가? 번번이 자신만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 같고 저들 시중드느라 억울한 마음마저 생겨나는 것이니, 그래서 우리 주님도 말씀하기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 이를 명심하게 하셨다. 족한 줄 알지 못하고 다고 다고 하는 게 죄의 특성이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잠 30:15-16).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게 죄의 특성이고 보면 우리 안의 어떤 만족도 이만하면 충분해, 하고 만족하는 것은 없다. 당장은 이것만 있으면 더는 바랄 게 없을 것 같지만 더, 더 바라는 것이 한도 끝도 없어서 어제는 모질지만 나는 적당히 거리두기를 권하기도 하였다. 이게 누구 때문인지, 저들의 요구가 너무 심한 것 같다고 하소연하지만 실은 자신이 그리 만든 일이다. 곧 저들이 못되게 구는 것이 아니라 그리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자신을 그리 취급하는데도 이를 마치 희생이고 헌신인양 여긴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여러 어려움 가운데 대부분의 것이 실은 자신으로 인한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밖에는 끊을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엔 저들의 못된 습성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허용하는 저의 나약함이 문제다.

 

사랑받고 싶어서, 그리 해야 외롭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므로 모두가 행복할 거라 여기는… 이 모든 게 옳지 못한 까닭은 그로 인하여 감사보다는 원망이 앞선다. 문제를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자책하는 게 아주 몸에 뱄다. 나 때문이 아닐까, 내가 그래도 이래야 하지 않나? 하는 강박적인 희생강요가 스스로에게서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도 문제가 크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게 한다. 뭐라도 대접해야 할 것 같고 더 큰 은혜를 구하려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할 것 같다. 말로는 감사한데 속으로는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그러게, 사랑도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러니 누구의 유행가처럼 ‘습관적으로 사랑을 한다.’ 그리고 그리 한 것에 따른 나름을 보상을 기다린다. ‘빈말’이라도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그게 또 서럽고 서운하고 불안한 것이다. 성경은 일러,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0-21).

 

곧 우리의 약함 곧 나의 미련함이 도리어 주 앞에 기쁨이 된다. 어린 아이 같이 말도 안 되는 것에 기뻐하고 소망을 두고 이에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는 것,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3:19-20).

 

나름 좀 확신하는 것에 다들 걸려 넘어지게 돼 있다. 이를 알면서부터 바울은 자신이 예전에 알던, 그 화려했던 자신의 경력과 자랑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고,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8-9).

 

이 놀라운 진술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연약함-남들로 인정받기 어려운, 돈벌이가 되지 않을, 성공하기는 애 저녁에 그른 것을 두고 도리어 크게 기뻐한다고 한 것이겠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왜 바라지 않겠나? 남들처럼, 남부럽지 않게, 보란 듯이 살고 싶은 마음이야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누군들 없을 수 있겠나? 한데 그보다 더 큰 보물을 보잘것없는 땅에서 발견한 농부와 같이, 그럼 모든 것을 팔아 이를 소유함이 옳다. 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자식도 품안에 자식이고, 가족도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살면서 살수록 거리두기와 일정한 말을 절제하며 자주 자신의 손을 씻고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나는 누구의 서러움을 동조한다. 같이 긴 한숨을 쉰다. 저가 울 땐 나 또한 울컥하다 이내 안정제를 삼킬 정도로 마음이 어려워진다. 안 됐다. 불쌍하고 안쓰럽다. 누군 믿는 사람에게 맡긴 모든 주식을 돌려받지 못해 소송까지 가면서 마음고생이다. 누군 어렵게 얻은 자식 하나로 이게 점점 애물단지로 변해간다. 당해낼 재간이 없다. 막 대하는 데도 속수무책이다. 또는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도망치는 수단으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한 것이 이게 더 큰 지뢰밭이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그러고 어찌 사니? 하고 안타까워하다 나는 저를 붙들고 기도한다. 주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아니면 이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니 누구에게는 아무리 일러 권하여도,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별 수 없는 일이다.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사는 꼴이나 사는 날까지 살아야지 별 수 있겠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대체 뭘 믿고 어떤 예수를 꿈꾸고 있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복음과는 거리가 좀 멀다. 오후께 천천히 걸어서 집에 오는데 검은 옷차림의 아리따운 여자가 다가오더니 ‘유월절 잔치’에 초대한다고 손을 내밀었다. 서른 중반? 저에게도 가정이 있고 나름의 일상이 있을 텐데, 사거리에 서서 젊은이의 팔을 끄는 음녀가 연상되었다.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잠 7:8).” 나는 저를 무시하고 가는데, 뒤에 따르던 누가 오던 길을 멈추고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들 참, 요지경으로 산다. 사느라 사는 데 따른 열심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 돈돈거리면서 눈이 벌개가지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영혼이나 그나마 가족에게조차 사랑 받고자 자신의 모멸감을 꾹꾹 눌러가며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습성을 따라 사는 일에서나…. 아.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시 59:8-9).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라 해도, 나는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10).

 

저들의 결국을 우리는 볼 것이다. 때로는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요동치는 먼지와 같이 날려갈 것 같지만 우리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다. 그러므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3-4).

 

주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서 말이다. 나는 점점 이 사실이 너무 든든하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내 소원에 따라서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루에도 죽 끓듯 하는 나의 소원이 나로 질리게 할 게 뻔하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 것은 오늘의 결심과 다짐이 곧 무너져 주를 배척하기 일쑤이다. 그런 ‘나를 위해서’가 아닌 것에서 나는 이제 안도한다. 오직 주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하실 수도 없는 것이어서 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