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창 33:20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 56:13
거기, 지금 처한 곳에서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이 복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이는 성경의 가장 귀한 핵심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우리에게는 참으로 쉬운 일이고, 언제든 어떠하든지 가장 위로가 되는 일인데, 그처럼 ‘나의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란 누구에게는 불가능한 일인가보다. 주 앞에 처음 나오는 자나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자나, 우리 주 하나님은 기꺼이 저를 맞이하신다. “잔치에 오소서(마 22:4).” 하고 우리를 보내셨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 79:9).
이것이 우리에게 더하신 가장 귀한 은혜인 것을.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성경의 여느 인물들 가운데 주를 떠나지 않았던 적이 누가 있던가? 하루에도 몇 번, 외면하고 부인하고 잊고 지내다 ‘목마름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우리보다 더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주님이시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엄연히 저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죽으심으로 제 갈 길로 떠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이 은혜 고마워, 즉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은혜 위에 은혜였다. 가령 다윗의 경우 주께 죄를 범하고 이를 시치미 떼고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셨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 12:13).” 하고 이 모든 일순간의 일은 주의 긍휼하심이었다. 우리 하나님,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고치시고 사랑하신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호 14:4).
오늘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 돌아왔다. 저는 그곳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창 33:2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곧 나의 하나님,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기까지,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 56:13).
하는 이와 같은 고백을 가지고 산다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일까? 누구와 이야기를 하다, 어떤 일에 한계를 느낄 때, 더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어제는 그와 같이 무력감을 느끼고 아이와의 대화에서 가만히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아이엄마와 얘기를 좀 해야 할까? 저이도 지쳐 정신과 약을 의존하고 산다는데, 나는 도통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하는 게 없어 심한 무력감에 빠진 것 같았다. 이에 그저 습관처럼 말씀을 끌어다 그 구절의 말씀 앞에 앉을 때,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 3:12, 14, 22).
돌아오기만 하면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하신다. 그런데 다들 사는 데 찌들어 자식인데 자식을 대하는 일에 지치고, 부모인데 부모를 마주하는 일이 힘에 겨워 서로의 반목이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아이는 뚱한 표정으로 왔고 퉁명스런 말투로 같이하다 돌아갔다. 요즘 어떤 게임에 빠졌는데, 그 게임을 모르니 뭐라 설명을 하는데도 지난 일주일에 5만원이나 그 게임에 썼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녀석은 먼저 눈치를 알고, 자신도 다 컸는데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하고 말을 세워하는데, 뭐라 이른들 들을 것 같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 나는 목사로 저를 어찌 대해야 하는지, 주춤한다. 그 일로라도 아이엄마와 어찌 통화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 막연하여서 주를 바라본다.
누구는 교회에서 그런 일(?)을 위해 성경공부를 시키고 오랜 시간같이 대화하며 교육한다는데 나는 대체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속상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꼴 같아서 나는 오후 내내 의기소침하여 우울하였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모자라고, 이 일도 못하고 저 일도 못하는 주제여서, 그런 나에게 주의 말씀이란, 우리 모두는 순간순간 배교의 순간을 겪는다. 우리 주님은 이를 알고 계셨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 16:32).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순간 더딘 약속을 뒤로 하고 집에서 기르던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세우려 하고,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로 대신하려 하였다. 이삭은 순간 축복에 앞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먼저 찾았고, 야곱은 이에 스스로 축복을 가로채기도 하였다. 모세는 의욕을 잃고 미디안 광야로 은둔하고, 다윗은 한가로이 거닐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였고, 베드로는 먼발치께서 주가 잡히심을 보다 세 번씩이나 저를 모른다 배교하였다. 주를 따르던 제자들은 하나 같이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옛 생활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주는 먼저 찾아오시고,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 28:9-10).”
우리의 이 한계에 대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 그럼에도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6-8).”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주만 바람이라니. 때론 우울하고 막연하여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되나? 싶은 것인데,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가만히 귀를 모르고 좌정하는 것이니,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온전히 주를 바람이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2-5).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는 일이다. 돌아보아 내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어디서 잃었는지, 내가 놓아버린 ‘처음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렘 31:21).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순간 아이를 마주하고 대하는 일에서, 저를 생각하고 주께 구하였던 마음이 싫증이 나기도 하였다. 헐겁게 입고 내려온 탓에 갑자기 추워진 바깥 찬바람에 나는 그만 아이를 돌려보내고 서둘러 올라왔다. 다시는 게임을 안 하겠다는 아이의 하나마나한 약속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그런 마음이겠구나. 아이엄마의 며칠째 이어지는 침묵은 그의 심신도 심령도 지친 것이다. 그로 인한 아이의 예민함은 병적이라 어찌 감당이 안 되는 것이어서, 누가 뭐라 이르거나 더는 다가갈 수 없는 지점에서 아이는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고 사는 것과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듯이 아이엄마도 점점 더 한계를 느끼는 것은 아닐까?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시 9:13).
어떤 실의 또는 실망은 주가 더하시는 마음이 아닌 것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의기소침하여 우울하였고, 침울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되뇔 뿐이어서, 이때 지혜자는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전 8:9).” 그러니 때론 그냥 두는 것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일 수도 있을 텐데. 차라리 저 모자가 좀 떨어져 살아보는 것도 나을 텐데, 녀석을 엄마 곁에서 떨어뜨려 어디 기숙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잠 21:2).”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주를 바람은,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시 35:22).
부디 일차적으로는 아이엄마가 아이로 인하여 주와 더욱 가까운, 주를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와야 하는 것일 텐데. 나는 이어지는 생각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에 우리로 깨닫게 하시기를,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호 5:13).” 이를 알고 주께 나를 아룀이었으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 14:30).” 주밖에 내가 부를 이름은 없다. 나는 주 앞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이처럼 오늘 아침에도 말씀뿐이다. 말씀으로 새 힘을 얻고 말씀으로 주께 의탁하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 56:1, 4-5).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0,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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