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 37:5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시 60:11
보면 자식의 여러 문제는 부모로부터다. 물론 상처 없이 자라는 자식이 어디 있겠으며, 자식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 않고 자식을 키운 부모가 또 어디 있겠나? 서로는 서로를 동반의존하고 이는 어렵지 않게 중독으로 이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의 관계는 매순간이 처음이다. 모든 게 생소할 아이의 성장도 그렇지만 부모로서의 자신들 또한 그 나이, 그 시절은 모든 게 처음인 셈이다. 그러니 서로에게 가장 주의할 것이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훈계, 억압하는 일이다.
은희경의 소설, 어느 대목인지 기억은 없는데… 딸은 늘 아버지와 어색했다. 어느 날 고향에 내려가 며칠 좀 쉬고자 했는데 역시 아버지와의 시간은 어려웠다. 잠깐 들러 인사를 건넨 것으로 하고, 일찍 집을 나서자 한사코 아버지도 배웅을 하겠다며 따라나섰다. 저만치 버스가 오고 뒤늦게 서둔 아버지의 손에는 20키로 쌀이 들려 있었다. 딸은 도망치듯 버스에 몸을 싣고, 아버지는 버스 안에 쌀을 실어주고 돌아선다. 덩그러니 놓인 쌀을 보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마음을 다한 것이고, 딸은 딸대로 망연자실할 뿐이다.
서로는 서로에게 모든 게 처음이고 모든 게 마지막이다. 부모자식의 일도 그렇고 남들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어린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으며 자란다. 그로 인해 열 명의 형들에게 미움을 사고, 기어이 저런 사달이 난다. 형제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뻔하다,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다. 어쩌면 서로는 서로의 삶으로 삶을 이어간다. 서로가 서로를 위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그 위함이 그릇될 뿐이다. 나름 마음을 다했으나, 20키로 쌀가마를 건네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망연자실할 때가 있다. 더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그러면서도 마음이 가는대로 그리 행하는 것이 중독이다.
설교원고를 정리하고, 누구에게 추천하였던 <사랑이란 이름의 중독>을 꺼내어 앞머리 글을 읽다 밀어두었다. 은연 중에 몸에 밴 것, 일찍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죄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굳이 죄로 여겨지지 않는, 습관 같은, 중독이 된 죄가 의외로 크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를 사랑으로 여기고,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더러는 희생이나 헌신으로까지 자신을 정당화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아픈 아이’와 점심을 먹고 양지바른 곳에 앉아 달달한 커피를 홀짝거리며 아이의 여러 말을 듣다 생각하였다. 쉼 없이 떠드는 아이의 말에 나는 그저 말하고 싶은 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것으로 다였다. 갑자기 또 무슨 유튜브에 꽂히고, 헬스에 열중하다, 그러느라 막무가내로 요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려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병적인-죄적인 모습의 한 단면을 보는 것처럼 착잡하였다. 뭐라 한들? 뭘 어찌 할 수도 없는.
어느 아버지는 아이를 세워두고 몇 시간째 같은 말을 반복하며 또 시킨다. 나름은 훈육인데 아이는 고역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분이 다 풀릴 때까지 아이는 혼잣말을 하거나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다른 생각에 열중한다. 곁에서 이를 보며 아이엄마는 정당하게 만류하지 못한다. 쩔쩔매며 아이를 안타까워하고 그러는 만큼 남편을 원망하기도 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건강한 관계로 순기능을 할 때도 있지만 병적인 관계로 역기능을 할 때도 더 많다. 이를 다만, 자신들만 모른다. 아버지는 모처럼 온 딸애가 다 저녁에 집을 나서자 안타까울 뿐이다. 뭐라도 주고 싶은데 가진 게 쌀가마뿐이다. 딸애는 며칠 좀 쉬고 싶었을 뿐인데 역시나 불편하고 성가셔서 얼른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서로에게 나을 거라 여겨 집을 나섰을 뿐이다. 그리고 서로의 사이에 남겨진 20키로 쌀 한 포대, 저걸 어찌 들고 가라고….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저 복잡 미묘한 감정을, 그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느라 마음이 어렵다. 돌아보면 나 역시 그러했고 여전히 그러하다. 나는 지금도 서른한 살의 딸과 스물여덟의 아들이 처음이다. 50대 중후반의 나이로 사는 몸도 마음도 처음인 것처럼, 어찌 대하고 위하고 사랑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런 것을 아이들이 어릴 때는 어쩜 그리도 막무가내였는지. 자식들이 맞닥뜨려야 했을 망연자실은 또 얼마나 될까? 소설 속의 아버지처럼 또는 누구의 이야기처럼 몇 시간씩 아이를 세워두고, 또는 터무니없는 쌀가마를 건네는… 우리의 사랑법은 너무나 서툴다. 죽을 때까지 반복될 시행착오다. 그 가운데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크게 자리매김하여, 아이의 터무니없이 길어지는 말에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뒤엉겼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따사로운 햇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때로 그 사랑은 폭력이 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이 되기도 한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창 37:5).” 그 결과로 아버지 야곱은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35).” 자신의 사랑의 결과였다는 것을 알았을까? 우리는 뒤늦게 운다. 사랑이 때론 지옥보다 잔인하다. 지옥에는 위로가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 5:25).
우리는 그렇게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시 60:11).
오늘 시편의 시인의 간곡한 바람을 되새겨본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1).
이 놀라운 진리 앞에 나는 망연자실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또는 매순간 어쩌면 앞으로도 거듭 되풀이 될 이 숱한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생각하다 아이를 그만 돌려보냈다. 족히 한 시간은 그렇게 앉아 있었던가보다. 얼굴이 따갑고 오후 내내 화끈거렸다. 씩씩하게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나는 늘 눈물겹다. 앞으로도 살아서 걸어 가야 할 길이 애처로워서 말이다. 저는 언제까지나 아픈 아이로 살아가야 하는 일이나 나름은 정상이라고 여기고 사는 내 곁의 숱한 정상인들보다 낫다. 같은 죄를 되풀이 하고 살아가면서도 이를 괜찮다고 정상이라 여기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더 슬프다. … 그렇게 우리는 모두 곧 죽는다. 어느 날 우리가 죽은 것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이미 죽어서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사랑하며 관계중독으로 살고 있다. 돈, 일, 자기 의, 만족함 등.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속에서 산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2:13-15).
자신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이기시었다. 우리의 모든 죄 때문인데, 이를 모르고 살고 있거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되풀이 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스스로 다 안다고 여기며 지혜가 있다고 여겨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고전 3:18-20).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시행착오로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서로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망연자실하게 만들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누구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게 저의 이야기 아니라 내 이야기였고, 어떤 사연을 듣다 나도 그러하여서 다를 게 없었음을 깨닫고 운다. 야곱이 애통해하며 운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운다. 그 울음은 자신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였던 시행착오의 결과이다. 그 고통은 차라리 지옥이 더 나을 것이다. 같은 고통 중에도 사랑으로 인한 고통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오늘 시편은 이에 한 줄기 빛을 내리쬐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 60:12).
우리가 우리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두고 씨름하고 애쓰는데 그게 역기능을 하여 저 끔찍한 결과로 슬픔이 될 뿐이니,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 2:6-7).
말씀 앞에 앉아 하나님의 지혜로밖에는 이 총체적난국을 헤쳐나갈 길이 없음을 고백하고 안도한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2-13).
말씀 앞에 가만히 머리를 조아리고만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누굴 사랑한다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억압하지 않고, 차라리 가만히. 제발 가만히 모든 것을 멈추고 가만히, 주를 바라고 신뢰하며 주만 의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오직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으로 분별하며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여 알아볼 수만 있다면…. 곁에서 아이가 계속 말을 하였다. 나는 솔직히 무슨 말인지, 아이 말에 열에 여덟은 못 알아듣는다. 뭘 또 사겠다고 하고, 누가 어떻다는 소리고, 어떤 것을 새로 해보고 싶다는 말이고, 누가 그래서 뭐가 어떻고,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다는 것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나는 다만, 주를 신뢰함으로 그 곁을 지키고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목사님은 저를 믿어주시죠?’ 하고 물을 때의 아찔함! 내 앞에 20키로 쌀 한 포대를 내려놓은 것 같이, 이걸 어찌 들고 가라고! 나는 어떤 말로도 아이를 설득할 수 없다. 믿긴 내가 저 애를 어떻게? 다만 주를 믿는다. 주가 오늘도 내게 맡기신 양이라 여겨 먹이고, 치고, 먹이는 일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4-5).
부디 말씀만이 우리를 이끄시고 돌보시기를. 그래도 약속을 지키려고 매일 다섯 장씩 성경을 쓰는 아이에게 그럼 됐다고 하고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하나님이 하신다. 솔직히 우리의 이 모든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내 삶도 내 삶이 아니다. 나의 지혜도 나의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다. 다만 주께 아뢰는 것뿐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시 60:1-2).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 그 가운데 사랑마저 중독이 되어 서로를 마비시킨 이 몹쓸 사랑것들에 대하여,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4-5).
가만히 오늘도 말씀 앞에 앉아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나 됨에 대하여. 우리 모두는 ‘아픈 사람’으로 무엇보다 의원이 필요함을 깨달을 뿐이다. 누구에게 일러 부디 신랑을 잘 설득하여 정신과 약을 좀 먹게 하라고 일렀으나 것도 허사인 것을 잘 안다. 순순히 들을 리도 없지만, 행여 그리 감정을 인위적으로 다스린다고 해도 회복될 영혼의 문제는 그런 약물로가 아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
그럼 이 모든 게 허사임을 잘 알면서, 알면 알수록 더욱 더, 그리하여 주께 고한다. 주께만 바랄 뿐이다. 다른 더 좋은 수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고작 여기까지다. 그러하오니,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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