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창 38:26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시 61:4
어찌 보면 정상적이지 못한 경우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을 엎으신다. 오늘 본문 다말이란 여인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과 모압 땅의 룻과 함께 특이한 경우로 여겨진다. 바울의 지적과 같이 저들은 곧 우리의 본이 된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오늘 본문을 살피면 유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다말은 첫째 아들인 엘의 아내이다. 한데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다. 그러다 풍습에 따라 후사를 보지 못한 다말을 둘째인 오난에게 준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에게 자신의 씨를 주기 싫어 형수에게 들어가서 땅에 설정을 하고 이를 하나님은 악하게 여겨 저도 죽이신다. 셋째 아들 셀라에게 주어야 하는데 유다는 꺼림칙하여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셀라가 좀 더 장성할 때까지 수절하라 이르고 친정으로 보낸다. 그러는 동안 유다는 아내를 잃었다. 이 일로 슬픔을 피해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가 사는 딤나로 갔다. 그 소식을 들은 다말은 딤나로 가는 길에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동침하고 임신한다. 그 증표로 담보물을 받는데 도장과 그 끈과 저의 지팡이로 한다.
후에 다말이 임신한 소식에 행음한 것으로 여겨 저를 죽이라 이른데, 그때에 다말은 시아버지에게서 받은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보이며 그이의 씨인 것을 알린다. 이때 유다가 깨닫는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 38:26).” 후에 유다에게서 얻은 다말의 아들 베레스가 예수님의 계보에 이름을 올린다.
일련의 상황은 다말이 그 위치와 자신의 사명을 얼마나 귀히 여겼는가를 알게 한다. 단지 한 사람의 아내 또는 어머니로서의 역할 그 이상의 의미를 저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룻의 고백을 들어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겠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 1:16-17).” 곧 저들은 진정한 축복의 기원과 그 통로를 붙들었다. 이는 여리고 성의 라합도 같다. 단지 자신들의 안위와 생명을 연명하기 위해 그와 같은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저들은 그 이상의 축복을 알았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하는 룻의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 곧 이 땅에서의 정도가 전부가 아님을 저들은 영적으로 이미 잘 알고 붙들었던 것이다. 뒤집으면 영원한 형벌의 의미를 바로 알고 있었던 것이 된다. 하여,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7-9).
어릴 때 나는 아직 천국을 사모할 수 있는 이해를 알지 못할 때 성경의 이야기도, 천국에 대한 약속도 믿어지지 않았다. 한데 그 어린 마음에도 지옥을 두려워하였고 그곳에서의 영원한 시간을 상상하다 몸서리치곤 하였다. 그때 주일학교 교사인 누가 어린 나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알고 해주었던 말이 지옥을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이 곧 천국 백성인 것을 설명해주었다. 계시록에 기록된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살피면,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계 14:9-11).
곧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는 어찌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이는 둘째 사망이다(20:6). 성경은 이를 다스리실 때에 그 원인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막 3:29-30).
우선은 더 이상 사하심이 없다. 영원한 죄가 된다.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한다. 그 원인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으로 주의 뜻을 거역하는 데 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계 14:11).
이를 바로 알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오늘 본문의 다말의 선택이고 라합의 기회이며 룻의 놓아버릴 수 없는 축복의 자리였다. 온전히 주를 섬긴다는 것은 막연한 어떤 축복을 사모하는 것보다 돌이킬 수 없는 영벌의 고통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이다. 이 땅에 살면서 복을 바란다고 할 때 우리의 생각이 미치는 정도는 한정되어서 사람들의 그것 이상을 꿈꾸지 못한다. 곧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즉 오늘 우리의 기도의 소원은 어떤 면에서 이 한계를 넘지 못한다. 목사가 되고, 누가 기도를 부탁할 때면 저의 기도의 소원의 대부분이 '여기'에서의 문제나 소원 그 이상을 넘지 못함을 자주 느낀다. 그 이상의 것을 꿈꿀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래서 성경의 지혜로운 여인들, 특히 오늘 다말의 선택을 보면 저가 단지 아이를 얻고자 하여 또는 저 일개 집안의 계보를 잇고자 하는 정도에서 그리한 게 아님을 짐작한다. 그 이상의 소망이 다말에게는 있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정도로 저는 악착같았다. 결코 놓을 수 없어 물고 늘어지듯,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그 엄청난…. 이를 나는 오늘 나의 묵상글이 되기를 소원하고, 설교원고 한 편을 작성하는 일로 생각하며, 누구 한 영혼을 두고 그 일로 주께 아뢰는 정도로 여긴다. 즉,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사 31:4).
곧 오늘 본문의 다말의 악착같음은 ‘여호와의 강림’과 같다. 하나님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를 위해서 어떤 수모도 심지어는 죽음으로도 나를 향한 사랑을 대신 하심인데,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5).
나는 늘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새 힘을 얻는다. 내가 뭘 잘해서가 아니라, 기를 쓰고 어떻게든 무엇을 이루려는 노력으로가 아니라, ‘최소한 이것’만은 지키려는… 이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어떤 소중함을 두고 산다는 것. 왜냐하면 내가 알고 붙든 이의 능력은 구원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행위대로가 아닌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붙든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오늘이 어떠하고, 그 지경이 어느 정도여서 이 땅에서는 내세울 게 없이 비루하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9).
이 놀라운 구원 사역을 다말은 알고 있었다. 감히 말하지만 룻은 알고 있었다. 민족을 배신한 간사한 여인으로 비춰진다 해도 라합은 알고 있었다. 그 구원이 결코 이 땅에서의 연명과 얼마쯤 더 얻는 정도의 축복의 정도가 아니었던 것을 말이다. 이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이를 위하여,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4-5).
이를 알고 묵상하면 할수록 무엇이 중요한지, 그것을 위해서면 그 어떤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제는 글방 카페에 두 편의 글이 올라왔는데 하나는 아들의 심리치료 과정을 서술한 것이고 하나는 앞서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쓴 것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또는 이러한 감정으로 휘둘리고는 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당연하고 어쩌면 마땅한 일이겠으나, 그 이상의 소망에 대하여 오늘 말씀을 알게 하신다. 이것은 그리 호락호락한 문제를 위한 게 아니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3:8).
이 한 구절의 말씀에는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형벌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생명책에 그 이름을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까지 그 값을 다하신 것이고, 이내 짐승에게 경배하는 ‘기록되지 못한’ 자들의 삶에 대하여서이다. 누구에게 문자를 넣어 어느 것이 귀하고 소중한지, 단지 이 땅에서의 혈육 간의 정이고 남부럽지 않은 삶으로가 전부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지, 어쩌면 우리는 다말과 라합과 룻과 같이 선택해야 한다. 저들이 붙든 게 무엇인지, 그저 단순히 이 땅에서의 안위나 연명에 고작 그리한 게 아님을. 그리하여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 예수님의 질문에 우리는 답을 해야 한다. 저에게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10).
이에 오늘 시편의 기도를 같은 목소리로 아뢴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1-2).
이러할 수 있는 게 능력이고 권세이고 충만한 은혜였다. 곧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3-4).
이를 알면 알수록 나로 알게 하신 이 귀한 진리를, 먹잇감을 물고 으르렁거리며 놓지 않는 사자와 같이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버려지는 수모를 겪고도 스스로 창녀의 몰골을 하고 다 늙어 슬픔에 젖은 유다에게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말은 알고 있었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5).
당당히 저는 자신에게 주신 기업을 물고 놓을 생각이 없었다. 곧 오늘 우리도 다를 바 없이,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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