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출 22:20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 95:1, 6
반복되는 일상이 삶이다. 일일이 거론할 것 없는 가운데 예배가 드려진다. 우리의 책임은 주께 순종하는 것, 마음에 두어 생각나게 하시는 ‘착한 일’을 실천해야 한다. 곧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는 추상적인 어떤 개념이 아니라 실제의 것이다. 오가는 말 한 마디에서 누구를 생각하는 일에까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이때 우리의 기준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이때 우리는 자기검열에서 말씀으로의 기준이 돼야 한다. 대체로 자신을 두고 ‘그럴 수 있지’ 하는 것들은 ‘그래도 되는 것’들이 아니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을 ‘이 정도는’ 하고 스스로 허용하는 선이 ‘그럴 수 있지’ 하는 것들이다. 좀 늦을 수 있지, 애가 못할 수도 있지, 어쩌다 무단횡단을 할 수도 있지… 하는 허용의 범위가 늘어간다는 것은 그 삶이 헐렁해진 것이다. 그런 자에게 기도란 요구뿐 경청하려는 인내가 없다. 자기 말만 하고 들으려하지 않는 자는 기다림을 모른다. 저에게 신앙이란 믿음을 기반으로 하지 못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우리의 신앙은 온통 기다림의 결정체다.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요 11:40).”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으로밖에 달리 길이 없다. 이는 막연하여서 노느니 장독 깬다고, 그러느니 자신이 일을 벌인다. 결국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하나님을 바라는 일보다 쉽다. 오늘 본문의 여러 말씀 가운데 단호한 몇 구절의 말씀에 오래 머물게 되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출 22:20).” 나에게 ‘다른 신’이란 우선하여 위하는 일의 총체다. 아이 일이 먼저고, 가정을 돌보는 일이 우선이며, 나의 취향과 기호를 따르는 모든 행위의 동력이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된다. 실제 우리는 매순간마다 숱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누구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이 일을 우선할까 저 일을 우선할까 하는… 인생은 온통 순간의 선택들로 점선을 따른다. 그때의 기준이 말씀이 돼야 한다는 것,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 95:1, 6).
오늘 시편에서 그 단서를 얻었다. 오라! 하고 청유형 동사로 시작하는데, 이는 오지 못하고 있는 데 따른 부름이나 청유다. ‘여기’에 서보면 ‘저기’를 보게 된다. ‘그때’가 어땠는지는 지금이니까 알 수 있다. “오라 우리가” 하고 부르는 동반형 관계의 ‘나와 나’는 ‘그래야 하는’ 어떤 당위를 내포한다. 그래야 하는, “여호와께 노래하며” 노래는 즐겨 다루는 화두다. 생각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고 마음이 가 있는 마음이다. 대중가요의 성공여부는 대중의 관심으로 갈린다. 예전에 광고카피나 작사 일을 곁다리로 하며 돈을 받을 때, 나는 어떤 곡을 받고 이를 수 없이 들으며 ‘그때의 사람들의 관심’을 기웃거려야 했다. 광고카피는 그 제품을 만져보고 뜯어보고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두고 오랜 시간 궁리를 거듭하였다. 곧 그 대상은 구매자들, 대중의 관심이다!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할 때의 ‘노래’도 온전히 ‘여호와의 관심’에 초점을 맞출 때 가능하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당신의 자녀의 구원이다. 이는 저의 사랑 때문이다.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은 특히 이를 강조하였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다시 말해 귀가 없으니 듣지 못하는 것이고, 입이 없으니 말을 못하는 것과 같이 사랑이 없으니 사랑을 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른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이는 곧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여기서 또 믿음이 사랑을 받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여호와께 노래하며” 할 때의 여호와의 관심은 우리의 구원인데, 그 구원의 반석-기반이 되는 것을 즐겨야 한다. 한동안 작사나 광고 일을 할 때, 나는 대중이 즐거워하는 것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는 데 엄청난 시간을 쏟곤 하였다. 당시 그렇게 한 곡에 가사를 입혀 주면 30만원을 받았는데 ‘그때’는 결코 적잖은 돈이었다. 내 이름을 걸고 할 거면 저들과 한 팀을 이뤄, 저가 뜨면 같이 먹는 방식이었다. 아니면 나처럼 프리랜서로 건당 돈을 받는 일인데 나는 후자를 택하였다. 곧 나는 늘 저들과 어울리면서도 저들의 ‘우리’에는 속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때 순수문학을 하겠다며 곁다리로 하는 대중적인 일일 뿐이라고 여겼다. 나름은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곧 ‘나’와 ‘너’가 ‘우리’로 묶여질 때는 엄연한 동지애가 따른다. 같은 소속, 같은 부류로 속한다. ‘우리’가 ‘여호와의 관심’을 중심에 두는 까닭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곧 그 구원의 반석,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삼하 22:47).
즉 우리의 구원의 반석은 하나님이시다. 순간 베드로의 고백이 떠오른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물으실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7, 68).” 하는 대답을 근거로 하면, 우리의 반석은 구원인데 그 구원은 여호와의 관심으로 이를 즐거워하는 일이 말씀을 반석으로 하는 ‘우리’의 특별함이다. 곧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할 때, 이를 즐거워할 줄 아는 게 능력이다. 가령 내가 그때 작사 일에 좀 더 즐거워할 수 있었다면 저들 무리에게 '우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어땠을까? 혹은 광고카피를 쓰는 일에서도 몇 번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로만 참여했던 이유는 이상하게도 그 일이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그때 내게 곡을 주던 기획사 대표이면서 작곡자 선배는 늘 그게 불만이었다. 너도 좀 즐겨, 즐겨야 가사가 살지! 하면서 나를 종종 다그쳤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길 지나치게 관찰자로만 있으니까 가사는 좋은데 와 닿지가 않잖아! 하고, 몇 번을 지적을 받은 기억이 난다.
다시 오늘 시편으로 그 기억을 가져다 대비시켜 묵상하면, 즐김은 곧 경배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할 때, 즐긴다는 것은 거기에 미친다는 소리와 같고 미친다는 일은 자신을 거기에 ‘굽혀 경배한다’는 소리와도 같다. 함께 손을 들고, 소리 지르고, 어깨를 들썩이며, 미친듯이 눈을 감고, 흥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그땐 몰랐는데, 이상하게 나는 저들이 왜 그러는지 그게 별로 와 닿지가 않았다. 마치 혼자만 술에 취하지 못한 사람이 맨 정신으로 취한 척 하는 것처럼 시늉만 내고 난처해 하는…. 여기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는 매우 자발적인 행위다. 즐거움의 표출이 흘러넘쳐 저절로 감춰지지 않는,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동참을 의미한다. 어째서 그런가? 시인은 말하길,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믿는다는 일, 그 “앞에 무릎을 꿇자”는 경의를 표하는 것이고, 애정을 다하는 일이며, 그 어떤 사랑보다 더한 사랑의 이벤트 같은 것이어서, 마치 청혼을 하며 무릎을 꿇고 결혼 반지를 바치며 받아주기를 고개 숙여, 경배하는 말 그대로 사랑의 행위다. 하다못해 대중적인 작업을 할 때도 그런 지적을 받아가면서, 나는 저들의 자발적인 즐거움이나 흥에 겨워 미친 것들처럼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하면서 같이 들썩거리고 심취하여 작업을 할 때는 물론 공연장에서 난리를 칠 때, 나는 그게 하나도 신나지 않았고 오히려 어색하고 괜히 창피하여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다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하였다. 누구에겐 무릎 꿇는 사랑의 구애가 누구에겐 낯간지럽고 어색한 일이기만 한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을 소소히 참견하시면서 이럴 땐 저렇게 하고, 저럴 땐 이렇게 하고 하시며 일일이 관여하시는 데서 하나님의 즐거움을 본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출 22:1).” 뭘 이런 데까지 일일이 관여하실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즐거우신 것이다. 우려와 염려가 있어 ‘광야 40년간 근심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어렴풋이 어떤 마음이실까, 알 것 같다. 그리하여 단호하신 것,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18).” 즉 말씀 아닌 다른 기준은 죽여야 한다. 하나둘 허용이 늘면 심지어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9).” 당시에도 그와 같은 몹쓸 짓들이 난무했던 모양이다. 미성년 모양의 ‘아이돌 인형’을 세관이 통과시키지 않은 것은 합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기사로 접하면서, 세상 참 요지경이다 싶었는데.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20).”
이를 받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물론 각자의 몫이겠으나 ‘수치와 숭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다. 유난히 어떤 일에 심취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저의 안에 내재된 결핍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온통 SNS로 자신의 의사표시를 공개하는 세상이라, 어떤 논쟁을 보면서 하찮다가도 저의 완고함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이 간다. 낄 데 안 낄 데 다 끼면서 말참견을 하는, 소위 대중평론가라는 사람들의 주장을 보면 역으로 저의 수치를 알 수 있다. 저가 죽어라 하고 욕하는 것은 실제 그 속의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다. 곧 수치심은 자신이 숭배하는 게 무엇인지 감출 수 없게 한다.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 97:7).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사 47:7).
두 곳의 말씀이 한 의미를 가리킨다. 이를 오늘 시편으로 다시 묵상하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곧 오늘 우리의 숭배는 수치를 벗고 난 데서 나타나는 증거다. 곧 우리가 숭배하는 것은 자신이 숭배하는 것, 우상이 무너질 때 자신의 어리석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 수치심을 견딜 수 없어 다시 또 숭배하는 것이다.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저가 들른 혹성 가운데 술주정뱅이가 있던, 저의 고백과 같다. 어린왕자가 물었다. 왜 그렇게 술에 취해 있는가? 그러자 술주정뱅이가 말했다. 술이 깨면 부끄러우니까 깨기 전에 다시 술을 마신다. 우리의 수치심도 같은 맥락에서 숭배의 대상을 찾는다.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사 44:16-17).
이와 같은 모순의 날들을 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모순에 빠지는 것이 ‘그럴 수 있지’ 하는 자기허용이다. 자기 스스로를 기준으로 할 때 그 기준은 줏대가 없어 바람에 쓸려 다니는 안개와 같다. 짙은 날에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다가도 해가 들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는, 이는 바람에 이리 쓸렸다 저리 쓸렸다 하는 것이 대중의 관심이고, 유행이고, 그 앞의 숭배다. 내가 그때, 그렇게 대단히 신앙이 좋거나 믿음 생활을 잘하던 시절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어줍고, 낯설고, 부끄러웠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무리 아이라도 본능적으로 자기 엄마를 향해 팔을 벌리고 운다. 여러 명의 비슷한 여자들을 세우고 저들이 손뼉을 쳐대며 ‘오라’고 해도, 아이가 뭘 안다고 결국은 제 엄마한테로 향하듯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오늘 이 두 구절의 말씀에서 오라, 하는 청유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이 ‘우리’였구나, 하는 데 감사와 영광을 올린다. 아무리 ‘오라’ 해도 올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2).
우리의 이 자발적인 흥에 겨움, 즐거움을 주체할 수 없는 이유는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3).
곧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7-8).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셨으니, 이제는 내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칠 수 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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