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 24:16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시 97:11
우리를 부르시고 충만한 만족을 더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목격하게 된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출 24:16).” 이를 어찌 아무나 아무렇지 않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나?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1).” 이와 같은 <부름과 뿌림>의 충만을 누릴 수 있는 자로 사는 게 복이겠다. 빛과 기쁨을 우리 마음에 뿌리셨다는 것은 더는 내 안에 구주를 심으신 것이다. 곧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그 인자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3-55).”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삶이란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곧 그 세계에서, 그 세계로 사는 일. 우리의 날들이었다. 사람에게 연연해하지 않고, 세상이 주는 기쁨으로 기대하지 않으며, 자기 의를 부추기는 일체의 수고를 그만두는 것.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로 더는 살지 않는 것. 이를 위한 부르심이 영광스럽다.
지금은 그게 뭔지, 애매하고 막연할 수 있으나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를 확신하고 믿을 수 있는 길은 이처럼 말씀으로 붙들리는 것이다. 그렇게 주의 예비하심을 맛보는 일,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6).” 엘리야를 위해 로뎀나무 아래에서 물과 양식을 공급하셨던 것처럼,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 17:4).” 살며 사랑하며 이와 같은 체험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충만한 삶이고 영광스러운 부르심이겠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9).
우리가 상상도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은혜에 초대되는 삶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이와 같이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은 벅차오른다. 현실의 상념이 사라진다. 누구의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번잡하였다가도 그 모든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평안을 얻게 된다. 어제는 공연히 말씨름을 하다 그만두었다. 이런저런 일로 손위처남이 줌으로나마 드리는 예배에 같이하지 못하였다. 당연히 늙으신 장모조차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전화를 걸어 통화로나마 듣는 것으로 참여를 권하였다가 것도 못하게 되었다. 요즘은 노인들을 위한 스마트폰도 있으니, 하고 권하는데 들으려 하지를 않았다. 늙은 모친의 건강과 기거하시는 생활공간을 돌보는 일보다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 특히 일주일에 한 번 주일예배를 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 말하려는데, 그게 그렇게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이 말을 하는데 저들은 저 말을 하여서 더는 뭐라 이르지 않았다. 그럼 차라리 섬기는 교회에라도 나가게 하시던가. 코로나를 염려하고 생활공간은 늘 돌보면서, 정작 그 영혼이 기거함에 대하여는…. 아내에게 말을 하다 싸움이 될 거 같아 그만두었다.
아무리 일러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사회생활이란 명목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이 일 저 일에 다 쫓아다녀야 하고 그러느라 주일 예배는 이리 밀리고 저리 뒤로 쳐져서, 이를 뭐라 이르려하면 당장의 일에 우선이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7-20).” 자신들이 우선하는 것에는 뭐라 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어서. 공연히 말을 하다 언쟁이 되어 더는 그만두었다.
준비된 그릇 만큼 받는 법이다.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왕하 4:6).” 나는 종종 이처럼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속상해하고, 그것이 아내일 때 더욱 마음이 어려워진다. 서로 잘 안다고 여기는 것이 주는 한계이겠다. 점점 할 말을 못하는 사이는 먹먹할 뿐이다. 그저 일상의 일로는 주저리주저리 말을 잇기 잘하면서, 그래서 나는 가까이 하는 친구와의 거리도 멀어진다. 서로가 친하다는 것, 잘 안다는 것은 때로 큰 방해가 된다. 그저 농담으로나 말을 채우는 것을 가까운 사이로 여기는 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하시는 말씀 앞에 뜨끔한다. 서로가 이런저런 대화를 잇는 데 있어 더는 못하는 것에 대하여 답답할 따름이다.
그러니 뭐라 한들 자칫 막말로 듣기 일쑤고 그런저런 말을 피하려니 일상적인 말들 외에는, 특히 부부사이나 친구사이에는 더욱 긴밀한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함께 ‘그런 이야기’ 곧 말씀을 나누고 주의 살아계심과 우리의 삶을 두고 이야기하기란 그래서도 어려운 것일까? 어제 오후에는 아내와 둘이 있으면서 서로가 불편하여 말을 피했다. 나는 늙으신 장모의 예배를 걱정하고, 저들은 이 땅에 얼마 더 사는 일을 두고 씨름할 따름이니, 이러자니 저게 걸리고 저러자니 이게 걸리고… 하나 같이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일들로 우리를 잠식해버렸다. 당장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하는 저의 사정을 어쩌겠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하고 바삐 나가는 저들에게는 난처한 일이어서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니 더더욱 할 말이 없다. 서로가 뭐라하면 그게 오히려 다툼이 된다.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사는 게 다 그런 것을 두고, 그럼 주인 되신 우리 하나님의 어떠하셨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4:24).”
이를 두려움으로 받지 못할 때 더는 뭐라 이른들 다툼만 인다. 영광스러운 부름에 참여하지 못할 때 그 자리를 다른 이로 채우시는 것이었으니, 이 또한 두려운 일인데.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 본래 내 자리였을 자리에 다른 자로 채우신다! 이를 정녕 두려워할 줄 모른다면 무엇을 두려워하며 오늘을 사는 것일까? 누구 결혼식, 어떤 이와의 약속… 하필이면 그게, 딱, 주일이라. 안 믿는 자들이야 그 날이 공휴일이니 그럴 수밖에. 그 모든 게 피치 못할 사회생활이겠으니 이 또한 어쩐다? 주의 긍휼하심을 구할 수밖에. 부디 우리의 빈자리를 잠시만 비워두시라 청하는 수밖에. 돌아와 내 자리를 찾으려 할 때 이미 찼을 리 없기를. 예수님의 말씀이 야박하기만 하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6-27).”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신앙은 헐렁하고 믿음은 느슨하여진다. 사탄 삼촌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웜우드에게 이르는 말도 그래서 여유가 있는가보다. <적당히 우리의 정체만 감추면 된다!>하고 '사탄이 사탄스럽지 않은 문화'의 세계를 펼쳐간다. 모든 선하고 의로운 것 같고, 그럼 그게 왜 나쁜 일이겠나? 서로가 좋자는데. 특히 그 상대나 가족이면 더욱 더 필요한 제안 아닐까? 뭐라 단호하게 이를 수 없는 말을 두고, 나는 공연히 하나님 앞에서 서러웠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어설픈 웜우드의 말에 우리는 일리가 있다고 동조한다.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럴 수 있지… 당연히 그러니까, 그게 친구지! 하고 딸애가 토요일에 나를 핀잔하였다. 실은 전전 주 내 생일에 뜬금없긴 하지만 친구가 기프트콘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그것으로 케이크를 사다먹고 딸애는 그때도 당부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굳이 이를 기억하지 못했고, 친구의 생일을 며칠씩 지나서야, 딸애는 혀를 끌끌 차며 내 핸드폰을 빼앗다시피하여 어디 커피와 무슨 케이크 세트를 선물로 하여 카톡으로 대신 보냈다. 뒤늦게나마 축하한다는 말까지 덧붙여서. 그리고 뭐라 나무란 것이다.
그러게. 예전 같으면 내가 더 그런 일에 열심을 다해(?) 챙기고 그랬을 텐데…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하는 말이 아파야 하는데, 나는 그게 이제 이상하게 중요하지가 않다. 나야말로 나름 사회생활(?)에 능숙하였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때도 제한적이기는 했어도 친구라면 사족을 못 쓰고, 특히 선생과 어울리는 일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우선하여 저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는데, 그 일들을 챙기는 데 의미를 두고 살았을 때는 몰랐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는 게… 이상하게 어렵다. 어렵다는 말은 마음이 그리 자연스럽게 흐르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친구라도 서로가 하나님을, 서로의 삶에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문제나 형편에서도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말과 말의 관계가 아니면 대화가 길어지지 않는다. 늘 그 타령이 그 타령이라, 서로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는 소리로는 하나님을 마주하기가 어색하다. 그러니 서로 신경 쓰는 것도 예전처럼 ‘그런 일’을 두고 관심을 나누며 시시덕거리는 일에 대해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점점 친구가 없지! 하는 말에, 물론 일상의 소중함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또 서로의 관계, 사회를 떠나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게 신앙생활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아 아니라.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동안 어찌 사람을 돌보고 사람을 위하는 일에 대하여 소홀히 할 수 있겠나만, 결국 예수님도 변화산에 머물기를 바라던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이끌고 다시 일상으로 내려오지 않으셨던가? 그리고 맞닥뜨리는 일이란 게 자기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어 날뛰는 미친 현실이 아니었던가?! 결국은 현실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우리에게 우리의 원수가 우리 가족이라는 말씀은 어찌 감당해야 할까?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어제도 아내의 어쩔 수 없다는 항변 앞에 더는 뭐라 말하지 않았다. 더 말을 잇자고 들면 싸움만 될 것 같아서, 더욱이 그 일로 나는 또 친구와 통화를 하고 이런저런 시답잖은 말들을 나누어야 했던 일을 두고 어떤 답답증을 느꼈던 것처럼 아내와의 사이는 더욱 심각하게 여겨졌다. 서로가 점점 바라보는 곳이 다른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상하게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일까? 웜우드는 스크루테이프의 지시에 충실하게, ‘다 그러고 사는 거지 뭐!’ 하는 마음을 내 안에 슬쩍 끼워 넣는다.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이 어느새 ‘그래도 되는’ 마음으로 자리 잡을 때쯤, 전혀 대수롭지 않은 듯 ‘남들 다 그러고 살아!’ 하는 말이 점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일까? 가끔은 예전 생활이 그리울 때도 있는 것처럼. 그러다 누구의 어떤 일을 마주하고 저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하려 하면 나는 차마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내 꼴이 그 꼴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더러 뭐라 이르고 권할 수 있겠나? 너무 뻔뻔스러운 것 같아 입을 닫고 있으면, ‘너도 그런데?’ 하고 웜우드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찌른다. ‘넌 안 그래? 너도 더하잖아!’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당부하고 또 당부하시는 거였구나!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그 범사란 다 때가 있는 것이어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그럴 수 있지! 하는 기회가 영원무궁한 게 아니다. 오늘의 긍휼하심이 더는 허용되지 않을 날이 온다. 그 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 13:33).” 그러니 내 곁의 사람들은 물론 내 안에 이는 ‘그럴 수 있지!’ 하는 허용이 자꾸만 나의 발목을 잡는 것 같다. ‘그럴 수 있지’가 ‘그래도 되는’ 것으로 둔갑하는 것은 쉽다. 이는 마치 오래된 습관 같아서, 습관은 인격이었다. 영적인 우리의 수준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는 것은 ‘어쩌다 한 번’, ‘그러다 마는’ 정도의 ‘이럴 땐 이러고 저럴 땐 저러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인격이 우리의 운명이 된다.
그러니 왜 우리가 죄에 민감해야 하는지,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 27:7).” 익숙해진 은혜는 독이다. 귀한 줄 모른다. 흔한 은혜는 제 값을 잃었다. 맛을 잃은 소금 같이 밟힌다. 받기 어렵다. 그러니 나는 늙으신 장모의 주일 예배를 운운하는데 저들은 전혀 엉뚱한 현실적인 문제로 대꾸를 한다. 당면한 현실은 은혜는 이기지 못한다. 은혜는 또 주어질 거라 여기고 당면한 현실은 오늘 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은혜는 널렸고, 누구의 결혼식은 오늘 뿐이니까! 어쩌겠나? 하필 그날에 밭을 사서, 장가도 들고, 소도 넉넉히 샀으니 이도 훈련시켜야 하고… 그러니 은혜는 늘 또 기회가 있는 것이려니 하면서… 우리의 느긋함이 우리 영혼을 죽인다. 그러다 문득 나의 자리를 잃고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영생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극성인가? 도리어 한심한 환자로밖에 취급을 안 하니. 아, 아내가 제일 어렵고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가장 어색하게 됐다.
그저 사느라 사는 이야기로 끝이 없는데 그의 앞에 영생의 문제를, 우리 영혼을 두고 말을 하려니까 저도 내가 한심한가보다. 서로는 자꾸 할 말을 잃는다. 말이 길어지면 싸움이 되니까, 감정이 상하기 전에 자꾸 피하게만 되는데… 나는 이것으로도 또 괴로워한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시 62:11).
이는 내가 나도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인가보다. 입을 다물어버리자니 내 속이 탄다. 남 같으면 얼굴을 돌리고 말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으로 공연히 주 앞에서 입만 삐쭉거렸다. 그러니 참 나 혼자 애가 탄다. 그런들 뭐라 말을 하면 싸움만 하자고 덤비는 꼴이었으니,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
(사 10:19).
오늘 우리의 현실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를 다니고, 나름 신앙으로 산다고 하는데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한 듯하다. 내가 낫다는 게 아니라, 누구를 뭐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의 속에도 ‘에잇, 그럴 수 있지 뭐!’ 하고 돌아누워 방심하려는 마음이 더 크다. 전염병은 창궐하고 더 심각한 질병이 또는 재해가 우리에게로 다가오는데도 세상은 마치 노아의 때와 같이 안일할 뿐이다. 뭐라 하면 농담으로나 듣고 더 하면 화를 내기 일쑤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0).
그저 가만히 주를 바라며, 주만 바라며,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시 97:1).
슬픔이 또는 걱정과 어떤 염려가 나를 엄습하다가도 주께서 다스리시나니!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좌정하고 앉는다. 다들 어쩌니 해도,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7).
나 하나 바로 서자. 별 수 없는 일이다. 그물과 겉옷을 벗어던지고라도 주를 따라야 한다. 이에,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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