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출 35:35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 108:13
하루하루가 마치 지뢰밭을 건너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확진자가 나오고, 언제 어디서 걸렸는지 알지도 못해 그 지점을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 위를 뛰어노는 듯 철딱서니 없는 일로 마음이 팔렸다. 나름 늘 나의 동선은 단순하여 정해진 시간에 그 위치도 동일한 편인데 그럼에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안개 속을 걸어가는 것 같다.
차마 누구의 일을 입에 담아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다. 서럽게 우는 모습을 앞에 두고 나는 억장이 눌려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적으로도 성경적으로 이혼을 만류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이혼 사유가 되고, 그로 인해 우울증을 잃고 심한 고초를 겪는 데 대해 어찌 위로를 해야 할지. 부부의 속사정을 어찌 남이 다 알 수 있겠나만 나는 속으로 자꾸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쩌면 좋을까, 하고 생각을 모았다. 그렇다고 이혼을 권유할 수도 없고 만류할 수도 없고, 무조건 참고 살라 할 수도 없고 딱히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청하라고 말해줄 수도 없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안개 속 같고, 딛고 걸어야 하는 발밑이 온통 지뢰밭이라,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시 108:11-12).
주께 아뢰고 주의 도우심으로가 아니면 살 길이 없다. 그럼에도 저이는 온통 자기 문제에 함몰되어, 연방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알면서도 뭘 어찌 해야 할지 우왕좌왕 하는 꼴이었다. 이미 저의 말에 답이 있었고 어찌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내 앞에서 울고불고 서러워한들 내가 뭘 해줄 수 있겠나? 결국 그것은 하나님 앞에 풀어놓지 못한 서러움이고, 이는 그만큼의 무게를 고스란히 자신이 이고 지고 가야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감각, 그 분별력을 상실한지 오래다. 그럴 여유가 없다. 조용히 하나님 앞에 앉으라 권했던 것을 채 일주일도 행하지 못하고 생활에 쫓기고 있었다. 일은 꼬이고 꼬여 친정부모와 그 외조부 외조모 일에, 남편과 아이와 시댁의 일에, 그 와중에도 안 믿는 사람들-아이의 불안으로 함께 어울리는 학부모 모임도 챙겨야 하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듯도 하다. 다 끊고 보다 단순하게, 하나님만 바랄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권하여도, 이건 이래서 그만둘 수 없고 저건 저래서 자신이 챙겨야 하고 그러니 어쩌겠나? 주께 내려놓고 맡기지 못하는 만큼은 자신이 지고 끙끙거리며 사는 수밖에. 그 삶이 고역이라. 죄책감과 어떤 불안이 날마다 목을 조이는 듯하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 116:3-4).
아니면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나? 어떤 이의 도움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요령인지. 다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울 따름인데, 그걸 알면서도 누가 누구에게 자신의 등짐을 얹으려 하는 것인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5-6)
어째서 이와 같은 사실을 경험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잊고 당장의 일에 연연하느라 경황이 없는 것일까? 같은 말은 되풀이 되었고, 말끝마다 서러움이 밀려와 꺼이꺼이 울곤 하였다. 그러니 그 앞에 앉아 나는 지긋이 저이를 본다. 저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여서 천연덕스럽게 다들 괜찮은 척 하고 살 뿐이지, 도긴개긴이고 그 밥에 그 나물이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위하고 누가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77:2).
다른 도움에 돈을 대면 주를 향해 두 손을 들 리 없다.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을 바라면 하나님이 거드실 때 손을 내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저는 당장 이혼할 궁리를 하는데 나는 주께 묻기를 어찌할까 하다 기도를 위해 한두 달 별거를 해보라 권했다. 아이도 있으니 멀리 떨어질 수는 없고, 친정에 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까운 데 오피스텔이라도 하나 얻어 어디 혼자 생활해보라 일렀다. 실상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거였다. 아무리 어쩌니 저쩌니 해도 남편의 그늘과 함께 기거하는 데서 오는 위로가 적잖은 것을 곧 알 것이다. 경제적인 독립은 물론 심리적인 독립도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아이 양육권을 줘도 걱정, 안 줘도 걱정인데… 어디 한두 달 실전처럼 살아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그를 미워하며 그것만으로도 기도가 막혀 외롭기만 한 일이니까!
막상 닥쳐보면 곰을 피하다 범을 만나는 꼴일 테니. 저도 안다. 스스로 얼마나 의존적이고 자기의지가 박약한지, 내가 보기로도 모든 문제의 대부분은 실제 저로 인한 것이지 남편의 문제도 자식의 일도 아니다. 저들은 저들대로 두고 하나님 앞에 내어맡기고 자기 할 일만 하라고 권하지만 그게 또 어디 말처럼 그런가? 그러니 이혼은 낭만 같고 혼자 살면 모든 게 평화로운 것 같은 착각으로 눈이 자꾸 돌아가는 것이니까! 기도를 위해 분방을 허용하신 것처럼, 집안에서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하니 한두 달 그리 떨어져 있어보면 알 일, 내가 보기엔 한 달도 안 돼 그 일이 또 짐덩어리처럼 두 집, 세 집 살림을 하게 되는 꼴이 될 테지만… 그러니 어쩌겠나? 차라리 미움과 서러움으로 저주를 마음에 품고 사느니, 이를 주께 아뢰지도 못하고 고할 겨를도 없이 쫓기듯 사는 삶에서 좀 벗어나는 수밖에. 부디 이참에 주께 아뢰고 주님만을 바라며 살 수 있기를. 그러나 그 귀한 것을 잃기 전에….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38:6-9)
나 같은 사람한테 풀어놓고 꺼이꺼이 울어나 본들? 나 또한 한 시도 주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면서! 나는 저이에게 종종 말하기를, 이처럼 새벽마다 일어나 묵상글을 쓰는 것은 살기 위한 것이다. 주 앞에 앉지 않으면, 말씀으로가 아니면 위로 받을 데가 없는 것을. 마치 나는 저절로 그리 뚝딱,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기는 저에게 나의 이 말이 통할 리 없나보다. 목사님은 다르신 것 같아요! 이런저런 말을 들었지만 그리 믿겨지지는 않아요! 하는 소리를 칭찬으로 들어야 할지 욕으로 들어야 할지. 나는 바울을 들어 말해주었다. 오죽하니 그 훌륭한 사도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저의 절규가 그저 빈말이었겠나? 오랜 경륜과 그 깊은 영성으로 날마다 주를 전하고 바라고 증거 하는 삶으로 충만한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러한 고백이 한낱 허풍이었겠나?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우리는 날마다 죽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다윗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노아도 그 어떤 주의 사람도 사람으로 살면서 완전하고 완벽했던 생은 없다. 저들 또한 주의 긍휼하심으로 살았고, 주의 도우심으로 위로를 얻고 새 힘을 받아 ‘날마다 죽었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엄연히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아니면 ‘우리들 식구가 우리의 원수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10:36).” 자신이 의지하고 의존하는, 가까운 사람이 곧 영적으로는 원수다.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고마운 것들이 저주다. 축복일 수 없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등지게 한다.
저이에겐 자식이 원수다. 스스로도 말하길 자식이 우상이란 걸 안다. 그 남편이 고초라. 목회자고 뭐고, 그 얼굴에 황금 바르고 산다한들 모욕과 수치를 주는 사람과는 살 수가 없다. 겉은 멀쩡한 것 같아도 모두가 그 속은 문드러져 썩은 악취가 난다. 그 고약한 냄새를 자신만 모르는 듯하니, 그런 것들이 일선에 나서 정치를 하고, 목사를 하고, 가정에서 굴림하고, 사회를 쥐락펴락 하는 것이다 보니… 사람 그러다 한 방에 훅, 간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그 소중한 것을 잃기 전에 정신 좀 차리시라.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홀연히 모든 게 일장춘몽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을. 자식도 이 땅에서나 자식이고 부부의 정도 다 이 땅에서나 애달픈 것이지, 다음 생을 어쩌고 하는 따위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사명은 주를 송축함이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2-5).
너는 어느 쪽인가? 하고 묻는 세상에게 당당히 말해야 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고 같이 사는 사람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너는 그리 가라. 나는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고 그 심지가 곧은 사람으로 주 앞에 나아가야 한다. 반드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그러니 하나님 편에 설 것인가, 사람들과 같이 세상을 곁에 하고 살 것인가, 너는 선택하라.
저가 나를 어찌 보기에, 우아한 백조로 아나? 나 또한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주저하고 갈등하며 이리저리 그 마음은 요동치며 사느라, 오죽하니 정신과 약은 점점 늘고, 마음은 짓눌려 숨을 고르는데 이를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행여 나를 너무 크게 보는가? 내가 저에게 너무 가식적인 모습으로 우아를 떨었나? 하는 우려가 오후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살기 위해 이처럼 묵상글을 쓴다 해도, 꾸역꾸역이라도 나를 말씀에 묶어두지 않으면, 어떤 위인인지 내가 더 잘 아니까. 하다못해 글을 쓰는데도 억지로라도 장 수를 늘리고, 아침에 알람을 울려 새벽에 일찍 눈을 뜨는 일에도 순탄하게 자발적이지만은 않다. 더 자고 싶어 한 번을 허용하면, 오늘은 글을 쓰기 싫어 하루를 허용하면 그것이 곧 나를 지배할 것을 나는 잘 안다.
나야말로 의지박약자이고 사람 중독자이다. 사랑에 연연하고 연애예찬론자였다. 웃기는 소리 같겠지만 지금도 가끔씩 산책을 하다보면 어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니 난 이제 주 없이 살 수 없다! 단 하루, 한 순간 아차, 싶으면 모든 게 허사다. 자식도 아내도 친구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한 번 허용하면 두 번 세 번 나는 분명히 연거푸 나를 허용할 것이다. 누구보다 사람 좋아하고, 저들을 의존하고, 저들로부터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사람이다. 이를 아무리 고백해도 저는 내가 전혀 그럴 사람 같지가 않다고 한다. 아뿔싸!! 행여 나의 지금 모습이 그처럼 가식적이었나? 혹시 과장되었나? 거짓으로 꾸며진 허상은 아닐까? 나는 오후 내내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이처럼 묵상글을 쓰는 것도 비공개로 숨길까? 행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처럼 기를 쓰고 뭔가 하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나는 이제 너무도 바울처럼 바울의 고백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런데 그게 어디 내 마음 같아야 말이지. 돈도 있었으면 좋겠고, 몸도 좀 안 아팠으면 좋겠고, 내 곁에 저처럼 이상한 사람들(?) 말고 옛날처럼 잘나가고 뽀대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고, 남들에게 인정 받고 멋지게 목회하는 목사(?)가 되고도 싶다. 그럴듯하고 멋드러지게 교회도 좀 번듯하니. 그러나 나의 이 모든 생각이 얼마나 추하고 한심하고 하나님을 우롱하는 짓거리인지 이제는 안다. 나도 바울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하고 감히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그러나 내가 아는 나는 하나님께 늘 송구하고 죄송하고 면목이 없어, 한 영혼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데, 어찌 나를 그처럼 위대하게 보는 것인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0-11).
더는 뭘 위해 살겠나? 이제 주변 곳곳에서 확진이 생겨나고, 언제 어디서 딛고 선 발 맡이 쩍 갈라져 가라앉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여전히 무엇을 위해 살려 사는 것일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생을 우리는 지금 어찌 살고 있는지. 아, 이 날을 다하는 날 동안 주를 바람으로 주를 영화롭게 할 수 있다면.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출 35:35).” 우리의 맡은 바 한 생의 삶이란 천국에서의 영생을 준비하고 예비하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아이들은 학교에 간다. 옆 반에서 확진자가 나오고, 같이 뛰어놓던 친구가 다음날 양성판정을 받고 격리되는 현실에서도 음성판정을 받은 아이들은 다시 또 책상에 엎드려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 삶이란 그리 낭만적인 게 아닌 것이다. 누구는 확진이 되었는데도 몸은 보살필 생각도 않고 당장 택배 일을 못할까, 그 기간을 어찌 살까 하고 생계를 걱정한다. 사업을 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 난관에 봉착할지 모르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퇴직을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이는 남은 날들을 무얼 하며 살아야 할까? 살아야 하는 궁리에 골머리를 앓는다. 모두가 하루하루를 사는 일이 고역이라. 어느 생도 고상하고 우아함으로 채워질 수는 없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유일한 출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그러니 나는 저이에게 말하였다. 그렇듯 애쓴다고 애써도 더욱 더 꼬이는 게 인생이라면 언제까지 인생 좀 나아질 날을 바라며 꾸역꾸역 살 것인가? 주를 바라라. 성심을 다해 주를 의지하고 주만 바라시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 108:13).
나는 일련의 사태를 두고 또는 나의 고질적인 형편과 사정을 두고 더는 연연해하며 끌려 다니기 싫다. 몸이 어디가 아프면, 마음이 또 어쩌면, 자식 일로 또는 아내와의 관계로… 쓸데없이 씨름하고 애쓰고 수고한들?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는 되는 게 아니었다. 자, 이제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출 35:29).” 어쩔 것인가? 남들이 무엇을 택하고 어느 쪽으로 모여 가든지 나는 주를 바람이여!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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