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전봉석 2021. 12. 27. 05:05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레 12:8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시 124:3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성경은 그럼에도 사람을 보호하신다. 성경의 언어는 ‘역설의 언어’고 ‘은혜의 언어’이다. 가령 사람이 더러운 것이나 부정한 것을 만지면 몸을 씻고 하루 정도 근신함으로 면하였다.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의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레 11:40).” 그런데 자식을 낳고는 남자이면 7일, 여자이면 14일이 부정한데 이는 몸의 유출로 인한 회복을 위하는 것이다. 즉 활동을 금함으로 틀어진 뼈마디를 바로 하는 시간이다. 각각 40일과 80일로 따로 구별하여 몸조리하게 한 것도 남아와 여아의 차별적인 사회적 풍토를 감안하여 산모를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진다. 다시 활동을 재개할 때는 속죄와 번제를 드리게 하여, 죄를 지어서라기보다 죄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처지를 감안해서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8).” 그 형편과 사정에 따른 처지를 고려하고 있다. 즉 사람이 이 땅에 나오는 일은 귀하나 그 몸에서 유출되는 것으로 행여 병균이 감염될까 하여, 산모의 산후조리를 위하고, 더불어 사회적 인식으로부터 여인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되새길 수 있겠다.

 

이에 시인의 기도가 성결을 향한 것으로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시 124:3).

 

곧 우리에게 성경은 이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권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없는 말씀으로 ‘우리’로 해당되는 자의 말씀이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그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심으로 감히 우러러 우리 임의로 마주하고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시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1).

 

하다못해 이 땅에서 대통령을 대면하는 일도 그 자격과 명분과 절차와 신분의 조사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것이야! 그럼에도 ‘우리’ 안에 주를 향한 마음은 간절하여서,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2).

 

어쩌면 우리가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어서 은혜를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은혜 아니면 용인될 수 없는 일이겠다. 하여 시인은 이를 알고,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3).

 

하고 죄악된 이 땅에서의 어쩔 수 없는 문화와 전통, 사람들의 그릇됨과 죄악됨에 대하여 보호를 요청한다. 곧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4).

 

하나님의 허용과 그 기다리심의 범주를 생각하게 된다. 결코 이를 묵인하거나 용인하는 게 아닌데 그럼에도 때를 두시는 까닭은 그것으로 우리가 주를 바람이다. 그렇게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이를 앎으로 우리로는 더욱 주를 바랄 수 있게 하심인데,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5).” 결국 우리의 악한 양심으로부터의 보호하심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22).

 

세상은 악하고 하나님을 저버린 생의 끝은 참담하다. 어떤 이의 죽음을 특정할 수는 없으나 그의 가는 길이 처참할 정도로 버려지듯 방치되었다. 일련의 상황을 열거할 수는 없으나 나는 어제 두 죽음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사람의 오고 가는 길이 이처럼 갈리고 홀가분하거나 번잡스러울 수 있는 것에 새삼 놀라웠다. 누구는 코로나로 인해 그 시신을 소각하여 당장은 장례절차 없이 병원 구석진 곳에 안치되었고, 누구는 상복을 입은 자식들의 배웅을 받고 떠났다. 서로의 죽음을 견주려는 것이 아니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겔 44:9).

 

어떤 영원한 구별 앞에서 몸서리를 친다. 이내 주의 자녀로 주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우리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히 6:9).

 

결국 ‘우리’의 무리에 든 자와 이내 ‘우리’ 가운데 들지 못한 자의 경우는 그 영원함에까지 영향을 미쳐 갈라지는 것이니,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17-20).

 

이와 같은 말씀의 깊이로 마음이 벅차고 감격스러운 것이 ‘우리로서의 복’이다. 살아서도 주를 멀리하고 그 생이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더니, 죽어서도 영원히 갈리어 이쪽과 저쪽의 가는 길이 확연히 다른 데 따른 사실을 본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7:19).

 

바로 이것, 성경을 앞에 두고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귀히 여기고 위하며 살아가는 것도 복인데, 죽어서도 그 영혼의 가는 길이 이처럼 확연하게 갈림을 두고 오래 묵상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이 큰 영광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값진 은혜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10:19-20).

 

하여 우리가 죽어서도 주의 보좌 앞에 서는 일,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4:11).

 

이와 같은 영광을 살아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 바로 익히고 배어 주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것이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실력이 되면서 동시에 천국을 누림의 정도였다. 나의 아주 유치한 상상력으로는 천국을 감히 헤아릴 수 없으나 천국은 우선 모든 것이 공평하고 또 공평하다. 그럴 때 가령 모두에게 고급 승용차가 한 대씩 주어졌다고 하자. 이를 받고 기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런데 누구는 이를 닦고 광 내고 실내를 구경하고 음악을 듣고 안락함을 느끼는 게 전부라면 누구는 그것을 운전할 줄 알아 천국 곳곳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는 기쁨도 있다. 그 차이, 천국은 좋고 좋은 곳인데 저마다의 그 좋음을 누릴 수 있는 실력에는 차등이 있다. 심은대로 거둔다 하심은 이 땅에서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천국의 삶이기도 하다. 누구는 올림픽에 참여하는 영광으로 즐겁고 좋은데 누구는 면류관을 받는 영광까지 누린다. 많이 가진 자는 많이 누리고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누린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3).

 

그러하기까지의 삶이란 그래서 누구는 믿는 자로 내세를 준비하며 영광을 사모하고 누구는 믿는 자로 이 땅에서의 삶으로 쩔쩔매며 안주하는 정도인 것이어서, 이를 위하여 오늘도 또 하루를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에 감사함으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6).

 

그렇게 우리는 성장하고 나아져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녀들로 거룩과 성결을 이룬다. 공교롭게도 어제는 각각 두 사람의 죽음을 소식으로 접하고 나는 이쪽과 저쪽의 갈림을 두고 생각하였다. 그 영혼들의 그 너머, 아직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느 세계에서 무슨 상황에 놓였을까? 상상하였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라하실지 모르나 ‘우리’는 그 이후의 사후생이 기다린다. 이는 성경에 계시된 것으로 추측이 아닌 엄연한 사실이다. 받아들이는 ‘우리’의 지혜가 있고 우리 밖의 다른 이해도 있다. 아무나의 이해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지혜의 비밀이다. 그저 막연하게 슬퍼하고 비통해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한쪽은 그렇듯 떠나는 길 또한 허망하여 황망하였을 텐데, 그 남은 자식들은 여전히 주의 섭리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에 '우리'가 저들보다 나음이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3:5-7).

 

누가 어떻게 죽어 어찌하고 떠났는가 하는 일에도 주목하게 되지만 저의 사후생을 두고 우리는 분명히 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2).

 

이 값진 은혜의 존재인 것을 아는, 소속감이 우리에게는 분명하고 이것으로 우리는 또 하루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는 단지 이 땅에서의 일로 결정될 게 아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3-15).

 

그저 이 땅에서의 삶으로 전부라면 아무렴 어떻겠나? 그 잠깐의 젊음을 위해 또는 노년의 노후생활을 위해 그처럼 애를 쓰고 수고하여, 지상의 방 한 칸을 마련하였다고들 하는데. 누구의 가는 길은 비참하여서 남은 재산으로 자식들은 또한 적당하니 다행일까? 과연 저의 그 너머의 생은 어떠할까? 우리는 사후생을 염두고 두고 사는 사람들이다. 정작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결과로써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곧 영생이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렇다면 얼마나 알고, 얼마나 알려고 나름 그 진정성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살고 있는지. 고작 몇 년, 노후 대책을 위해서도 피땀흘려 준비하는 것이면서….

 

하긴 사람의 가장 큰 은혜는 망각이고, 저주는 착각이다.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살다 기억은 소멸되고, 자식들은 건사하기 어려워 요양병원으로 모신 것인데, 하필 또 코로나에 걸려 외롭게 숨을 거두고, 한 주먹 재로 남겨져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방치 되듯 병원에 대기해야 하는 사후처리라니. 저의 영혼은 지금 허공 어디에서 후회하며 슬피 울고 이를 갈고 있을까? 남은 자식들만은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저도 부디 ‘죽은 거지 나사로’라고 보내어 알려주기를 간청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니 아직 산 자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알 리 없고, 죽어서야 기어이 알아야 하는 저 무지함에 대하여 우리는 안타까워할 따름이다. 뭐라 한들? 죽은 자가 살아나 예수를 전한다 한들? 아마도 악몽으로나 취급하고 말 걸? 그러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 11:40).

 

곧 이제 ‘우리’의 사명은 분명하였다. 살아서 사는 날을 다하는 동안 주의 살아계심을 알리는 것과 저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하신 나라에 대하여 사모함으로 오늘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채워가는 것이겠으니. 부디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생을 살면서도 어찌나 그 고집은 완고하여 천년만년 살 것처럼 기고만장한지….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 123: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