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전봉석 2022. 1. 10. 04:28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 26:12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시 138:3

 

 

이와 같은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는 것이 복이다. 곧 내 안에 주를 생각함이 있어 두려워할 줄 알고 의뢰함으로 값지다. 오늘 시인은 이를 찬양한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8).

 

그 어떤 두려움보다 주의 외면을 의식할 수 있는 것,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곧 주를 경외함이란 그 어떤 가치보다 값진 것이어서,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곧 내 안에 두시는 경건함과 두려움, 이를 가지고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감사가 나온다.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 잠이 물러난 자리에서 이처럼 주 앞에 앉는 것… 오늘은 아이들 넷이 새로 오고, 누구를 생각하고, 저의 어떤 일에 같이 마음을 쓰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때론 이 번잡스러운 마음으로 주가 나를 단순하게 하심이니, 주께 아룀으로 실제 모든 문제는 주를 향하게 한다. 하여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날들로 채우시려는 것,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

 

단조로운 나의 생활을 나는 사랑한다. 복잡하고 번잡스러웠던 생활을 돌아보면 주를 향한 마음이 뒤로 밀려났을 때이다. 그땐 늘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과 이래저래 마음을 써도 닿을 수 없는 일들뿐이어서 어쩜 그리도 어렵기만 하였던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고, 가까이 하고 멀리해야 하는 일과 사랑 사이에서 지쳐나던 시절도 있었다.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그처럼 끝도 없는 미로 같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였는데,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7-8).”

 

곧 하나님을 뒤로 미루고 사는 것과 앞으로 모시고 사는 것은 다르다. 마치 햇살을 등지고 걸을 때와 앞으로 마주하고 걸을 때의 차이 같다. 나의 어둔 그림자가 늘 발 앞에 밟히고, 길게 드리워서 항상 그 길 위로 걸어야 하는 일과 항시 발 뒤에 있어 때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걷는 때도 있다. 그 확연한 차이를 이제는 안다. 우리가 주를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말씀으로다. 이 두려움은 경탄에 가깝고 환희와 기쁨의 그것이다. 곧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하는 야곱의 고백과도 같다(창 31:42).

 

늘 돌아보면 어딘가(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혼자 멀리 달아나듯 당도하곤 하였던 저수지에서나 그 새벽에 느끼곤 하였던 고즈넉함이 이제는 다르다. 일찍 눈을 뜨고 잠이 달아난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 앉는 일,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 1:5).

 

곧 이제 나의 간구의 대상은 뚜렷하여졌다. 막연하게 기다리곤 하였던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 아니다.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4:14).

 

곧 오늘 내가 상대하는 대상은 이제 뚜렷해졌다. 더는 허공을 찌르며 달려가야 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아니다. 나름 애쓰며 수고하여야 했던 일들에 대하여, 이제는 누구의 그런 모습에서 주의 살아계심을 알게 된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

(9:32).

 

내가 수고하고 애쓰던 것에서의 놓여남이다. 나로 늘 걸려 넘어지게 하던 것으로부터의 평탄함이다. 나의 의식과 몸은 현실로 돌아오면서 불안이 또는 염려가 알 수 없는 답답증으로 나를 억누른다 해도,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나의 구주되심을… 이 크고 두려운 위엄 앞에서,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욥 37:22).

 

곧 오늘의 바른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그 복잡하던 삶을 단조롭게 하였다. 더는 무엇을 좇아 추구하며 살지 않아도 되고, 그 사랑을 갈구하느라 헛된 길로 달음질하지 않아도 된다. 이를 위하여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레 26:13).” 하시는 오늘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 것,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45).” 이에 그 엄위하심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사 8:13).

 

온전한 두려움이 바른 자유를 선사한다.

 

티벳 어느 서원에 하루 두 번 걸식으로 수행하는 탁발승들이 있었다. 전날 비가 잠시 퍼붓고 갔다. 평소대로 저들은 일렬로 줄지어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저만치 불어난 물에 멈칫거리며 물길을 건너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평소대로 승려들은 그 옆을 지나쳐 스스럼없이 물을 건너는데, 한 승려가 대열을 벗어나 그 여인에게로 갔다. 그리고 뭐라 묻고는 그녀를 넙죽 엎어서 물을 건네주었다. 다른 승려들은 모른 체 평소대로 마을을 돌고 걸식으로 얻어온 식재료를 서원에 내려놓으며, 묵언을 풀고 앞서 있었던 일을 두고 그 승려를 수군대는 것이었다. 이를 알고 그 승려가 말하길, '자네들은 아직도 그녀를 등에 업고 있나?’ 하고는 허허롭게 지나갔다. 어떤 일은 여전히 등에 얹힌 채 우리를 짓누른다.

 

무엇에 연연하며 산다는 것, 또는 이것으로부터 놓여난다는 것, 어쩌면 이 일은 참 두려움으로 그 무게가 비워지는 것이다.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단 10:11).” 하실 때, 다니엘이 다니엘일 수 있었던 것은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하는 그 부르심의 무게가 아니었을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눅 1:28).” 이와 같이 진정 두려워할 줄 아는 일이란,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30).” 곧 우리가 받은 은혜의 무게이다. 다른 그 무엇과는 상대가 될 수 없는… 남들의 시선이나 어떤 평가나 기대나 어떤 희망에서조차,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서 있는 자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이 환상으로 말미암아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

(단 10:16).

 

그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주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었으니,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와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11).” 곧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겸사겸사 어쩌다 오가는 사이가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근심이 더함으로 자유로워지는 일, 나의 단조로운 사고와 생활패턴을 나는 이제 그리 이해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번잡스럽던 오만가지의 마음 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어쩌면 나는 누구에게 그처럼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살았던가보다. 저의 하나를 위해 나의 아홉을 내주어야 비로소 하나의 사랑이 되는 것으로 여겼던, 나의 수고와 애씀을 돌아보곤 한다. ‘아직도 여인을 등에 업고 있나?’ 하고 누가 묻는 것 같다. 자식들 일에 또는 앞날에 대해 그 끝도 없는 염려와 근심과는 전혀 다른 참 두려움,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마 28:5).” 비로소 얻은 참 자유의 세계.

 

어제는 그렇게 말씀을 증거하며 나는 마음이 평안하였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으로,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 1:17-19).” 이에 주를 경외함이란 참 두려운 일인데, 그 두려움으로 더욱 확고히 되는 안정과 평안이 있다. 어떤 날은 죽을 쑤고, 어떤 날은 전하는 자로 내가 먼저 주가 더하시는 영광을 누고는 하는 설교다… 말씀을 전하는 일이란 참으로 희한하고 놀라운 체험이다. 준비를 많이 했다고 얻는 게 아니고, 모자라서 덜 전하였다고 거스르는 게 아니었다. 어찌 그런 차이가 나는가 나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는 마치 내가 살아온 날을 두고, 그때에 어찌 주가 나를 돌보셨는가? 하고 되묻는다고 얻을 수 있는 답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한참은 또 그렇게 송구하여 얼굴도 들 수 없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존 뉴턴, 새찬송가 305장, 1-2절)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던 저를 돌이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세우신 이의 이 놀라운 은혜는 참으로 귀하고 두려운 일이다. 우리가 주 앞에 선다는 일은 욥의 고백과 같이,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욥 13:21-22).

 

이 놀라운 심정은 주의 은혜를 받은 자로는 모두의 것이다. 그 앞에 서면 두려움뿐이다.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8-9).” 내가 그토록 자부하였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다.’ 말씀을 전하다, 전하면서 나의 송구함이 죄스러움으로, 죄스러움이 추하고 더러울 뿐인데, 이를 또 없던 것처럼 귀히 삼아 주시는 것이니. 이 은혜는 어떤 조바심과 같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어떻게 전하여 알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사 6:5).

 

가끔은 내가 아는 언어로 어찌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한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주다, 또는 어제와 같이 말씀을 전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확실하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 난데없는 조바심 같은. 그럴 때 나의 무능함으로 주을 바라다보는 시선이랄까?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 3:5).

 

사는 날 동안 우리는 이야기 속의 인물로 그 결말을 알 수 없는데,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나로 알게 하시는 그것,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신 바로 그것, 희미하나 분명한! 어렴풋이 알겠으나 확실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렘 5:22).

 

그리하여 시인은 찬송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 2:11).

 

그렇지, 바로 그 엄연한…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렘 33:8).” 나는 비록 어눌하고 변변찮아 제대로 알릴 수도 전달할 수도 없는 진리를 두고, 반드시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9).” 하시는 말씀을 바로 붙드는 일이었다. 사역이란 내가 무얼 어떻게 하려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게 하신 이가 하시는 대로 나를 주께 가만히 내어두는 일이었다. 존 뉴턴도 이를 깨닫고 더 송구스러웠고 감격스러웠던 게 아닐까?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305장 3-4절).

 

‘어노인팅 찬송가 2집’에 실린 이 찬양을 여러 번 되돌려 들으면서 주의 말씀이 이루신 것에 대해 새삼 감사와 찬송을 하게 되었다.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6:63).” 어쩌면 나의 이 사소한 감동과 변변찮은 이야기들이 모여져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아주 작은 불씨라도 되기를, 그리하여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 26:12).

 

하신 이 말씀이 이루어질 것임을. 하여,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시 138:1, 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