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전봉석 2022. 1. 11. 05:17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 27:28-29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시 139:1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것은 거룩하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것으로 마땅히 드려진다. 이는 죽음으로 그 값을 대신할 것이다. 이에 오늘 본문은 다소 해석이 어렵다. 사람이 서원하여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저를 죽여 제물로 삼는 것에 대하여, 곧이곧대로 해석할 것은 아니지만 그 문자의 의미를 파악해야 할 필요는 있다.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7:28-29).”

 

결국 사람이라 해도 무를 수 없고 죽일 수밖에 없다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따라 실은 입다의 딸이 죽었다. 저는 전쟁에 앞서 자신의 승리를 가장 먼저 반기는 자를 제물로 바칠 것을 서원하였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0-31).” 그런데 그 승리를 알고 가장 먼저 춤을 추며 즐거워한 것이 저의 딸이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34).” 이에 저는 끝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었다(39).

 

이렇듯 내용을 읽고 해석하는 데 있어 먼저는 그 뜻을 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신 사람을 짐승과 같이 제물로 죽여 바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이에 사람의 것을 동물로 대속하여,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출 13:13).” 즉 다른 이교도들과 같이 사람을 그 우상의 제물로 바치는 데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반대시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21).” 한데 입다의 딸의 경우 그럼 그 죄를 입다가 인정하고 저로 대속하였으면 될 터인데….

 

이는 함부로 서원하여 거룩하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그만큼 혹여 그러하였더면 이를 인정하고 죄로 용서를 구하면 되었다(레 5:4-10).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5-6).” 이를 무리하게 해석하여 곧이곧대로 받거나 그리 행하는 것은 주의 뜻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여 스스로 지는 어려움이 된다.

 

어제는 교회에 후원하고 헌금으로 바친 이들에게 기부금영수증을 발급하여주었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유형의 가치뿐 아니라, 무형의 가치까지도 포함하여 넉넉히 채우고 흔들어 넘치게 하였다. 가령 5만원씩 매월 후원하는 친구가 있는데 저에게는 그 배로 계산하여 정산한 금액을 적었다. 이는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어서 물심양면으로 저의 마음 씀을 보탠 것이다. 누구는 이것에 정색을 하고 얼마를 냈으니 딱 그 금액만큼만 요구하여 그리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에 있어 나는 그 가치의 값을 고려한다. 우리가 드리는 헌신의 값어치는 정산하여 딱 그 금액에 맞는 정도 이상이라 생각한다. 이를 오늘 묵상하는 거룩함의 값으로 그 목숨을 바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을 헤아리게 된다.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시 139:1).

 

하고 시인은 우선 그 전제를 분명히 하는데, 이는 나의 값이 실제보다 분명히 부풀려져 주의 은총을 입은 데 따른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2-5).

 

즉 주가 원하시는 것은 실제의 것 그 이상의 것이다. 내가 저이의 금액을 곧이곧대로 정산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것이기에 가능하다. 이를 불법적인 마음으로 부풀려 악용하려 한다면 이는 엄연한 잘못이겠으나 저가 교회를 생각하고 주의 종으로 목사를 위한 것에 대하여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바로 그 가치의 값어치를 어찌 저울에 달아 딱 얼마, 하고 그 금액을 측정할 수 있겠나? 진정한 거룩은 예배자의 마음으로다. 누가 내게 밥 한 끼를 사는 것, 교회에 어떤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 단지 그것이 돈이 아니어도 그 이상의 값어치로 충분하다. 이는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확장하고 그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진정한 예배자로의 사명이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시 79:1).

 

당시는 바벨론에 의해 교회가 함락되고 주의 백성들이 탄압당하는 것에 대한 시인의 탄원이다. 이를 괴로워하고 통회할 수 있는 자는 아무나가 아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24).” 곧 우리의 예배는 단지 일요일 하루, 지정된 교회 자리에 가서 드려지는 행위로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마땅한 행실로 삶을 바탕으로 한다. 이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3-4).

 

우리가 주 앞에 선다는 일, 이를 서원하여 거룩하게 함은 이를 교회로 인정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하는 모든 것이다. 이를 환산하여 그 금액을 측정할 수는 없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가령 누가 나를 찾아왔다. 또는 저가 나의 무엇을 위해 마음을 썼다. 이를 계산하여 어찌 받을 것인가? 저가 나를 생각함이 주의 종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섬기는 마음으로라면 이 모든 행위는 거룩하다. 같이 밥 한 끼 먹는 것, 차 한 잔 나누는 것, 심지어 자신의 일을 고백하고 그 마음을 의탁하는 모든 것이 값어치 그 이상의 가치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거룩이다.

 

이것을 나는 성도의 경건으로 본다.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저절로 그리 여겨지는 마음이 값진 것이나 마음으로 한정할 수 없고, 행위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사도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여전히 어떤 얄팍한 양심을 운운하고, 법과 원칙을 운운하는 따위가 되레 가증스럽다. 특히 나는 요즘 정치 판의 이런저런 말들을 혐오한다. 정작 저가 저의 말의 가치를 알기는 하고 하는 소린지. 입바른 예의범절보다 진심으로 다하는 무례함이 더 낫다. 이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즉 우리는 우리 자체로 거룩하다. 이는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심을 알고, 이를 귀히 여김이다.

 

그런 점에서 누가 찾아올 때 저가 이곳을 하나님의 전으로 알고 그 마음을 조심하는 것은 마땅하다. 가령 어제는 네 명의 아이들이 수업을 하겠다고 하여, 앞서 불러 어찌할 것인지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잠언(성경)을 같이 읽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이를 적용하는 글로 쓰는 것에 대해 아이들의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느라 애가 탔다. 처음엔 기대를 가지고 왔다가 끝에는 그런 소리에 실망했는가… 나는 그들 마음을 알 수 없으나,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 있으려니 하고 그럼에도 할 의양이 있으면 수요일부터 오라고 하고 돌려보냈다. 즉 굳이 안 해도 된다는 소릴 덧붙이면서 말이다. 내가 더는 글방으로가 아닌 교회를 글방으로 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교회는 글방일 수 없으나 글방이면서 얼마든지 주의 전인 것과 오늘 나의 하루가 주가 주신 한 날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는 글방일 수 없다는 말은 더 이상 돈벌이를 위한 행위로써, 학원으로 운영되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과연 아이들이 하겠다고 올 것인지, 그건 이제 내가 알 바가 아닌 것도 보내셔도 주의 뜻, 안 한다 해도 주의 뜻으로 삼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기부금이나 헌금 헌물에 대한 섬김의 이해도 같다. 정작 저는 어떤 마음으로인지, 그건 저의 몫이고! 나는 주의 이름으로 받고 주의 마음으로 고마워한다. 가령 퇴근하고 아이가 와서 사는 점심 한 끼도 나는 주의 종을 섬기는 마음으로라고 받는다. 이는 내가 우대 받는 의미가 아닌 주의 이름으로 돌림이다. 왜냐하면 나는 갚을 길이 없다. 또는 세든 건물 주인이 이런저런 배려나 마음 써주는 일에 대하여, 이는 무형의 섬김이다. 정작 저가 아직 알지 못하고 하는 일이다 해도 교회를 이곳에, 교회가 교회로서 함께 할 수 있께 함이 복되다. 가령 건물을 새로 개조하여 임대사업을 확장할 때 저의 속에 자신들의 이문을 우선하였다면 얼마든지 우리를 내보냈어야 한다. 최소한 서너 칸은 더 낼 수 있고, 그럼 칸칸이 드는 수입이 그 이상일 텐데. 한데 저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대로 있으라' 권하였다.

 

그렇듯 저도 알지 못하는 마음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은 거룩이다. 아직 그 귀한 사실을 알지 못함인데, 그것은 우리의 기도의 몫이다. 여기 이처럼 교회가 교회로 있을 수 있는 것, 어떤 주인을 만나 얼마를 덜 내고 더 내고 하는 정도 그 이상의 가치로써 값어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환산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주의 마음으로 산다는 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지. 그 한 영혼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회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고로 나는 이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교회 안에 거함이라 이해한다. 물론 저들은 알지 못한다 해도. 이를 아직 알지 못함과 그리하여 인색하게 굴며 박해 아닌 박해로 교회가 핍박하는 경우에도 이는 하나님이 상대하실 일이다. 

 

다만 우리는 간단하다. 우리 안에 주를 모시고 산다는 일은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일로, 누굴 마주하든지, 저는 잠재적인 교회다. 저가 아무리 친절해도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저는 외인이다. 나는 저들이 우리에게 쓰는 마음과 배려를 모두 주를 섬김으로 해석하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나는 갚을 길 없고, 갚아야 할 몫도 내가 아니다. 다만 주의 축복을 빌어주는 일,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언행심사'로 저들을 대함이었다.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시 79:2-3).

 

이와 같은 참혹한 현실에서,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훼파되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끌려가는 실태를 보고하는 것이다. 아,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애 2:11).” 나는 이러한 마음,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기도 하는 일심(一心)으로의 마음이 헌물이고 헌금이고 기부이고 헌신이다. 함께 누구 일을 두고 기도를 부탁하고 중보하며, 서로가 떨어져 있어도 교회를 섬기는 마음으로는 그 모든 생각까지도 거룩하다. 꼭 같이 교회를 나오고 한 자리에 있어야 같은 성도가 아니다.

 

저들의 그러한 결말을 두고 애통하면서,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렘 7:33).” 그리 된 것에 대하여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일,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14:16).” 이는 죄의 결말이고 끝내 거역함의 결과이다.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19:7).” 이에 세상이 점령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34:20-21).” 아, 그러니 지혜자는 일찍이 우리의 분별을 강조하였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 8:34-35).

 

지혜란 본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사람으로부터 더해지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한다.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아니면 죄가 성도를 농락한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시 79:4).

 

자업자득이라는 말, 어쩌면 이보다 더 명징한 성경의 원리도 없는 것 같다. 결국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4)” 이것이 기본으로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겔 22:4).”

 

어제는 그렇게 또 은혜를 입은 것이어서 돌아보니 모든 게 다 감사할 따름이다. 누구에게 선심 쓰듯 내가 임의로 기부금영수증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주의 것으로 주의 마음이 주의 사랑으로 그 값을, 영광을 알게 하심이었다. 부디 나의 이 감격이 저들에게도 불순하지 않은 온전함으로 감사한 마음이 하나님께로 올려지기를 기도하였다. 그리고 아이들, 저 한 영혼들. 나는 주의 뜻을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사실은 주가 나를 나보다 잘 아신다는 것, 오늘 시편이 들려주는 말씀은 그러하였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139:1).

 

그러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7).

 

내게 주시는 마음이 주의 마음이기를, 누구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주의 사랑으로이기를, 이를 위해서도 주의 권능으로밖에는!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8-10).

 

이 놀라운 사실 앞에 나는 가만히 내어맡길 뿐.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그리하여 주께 드려지는 것일진대 이는 거룩하다 하실 주의 것이라. 이에,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4).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17-18).

 

하여,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