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전봉석 2022. 2. 13. 04:44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민 33:55-56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28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저들이 노정(路程)에서 진을 친 곳을 나열하고 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동행이 함께 하셨고, 그 역사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저들의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저들의 불신앙으로 빚어진 긴 여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저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일일이 다스리시며, 그때마다 불순종과 원망 불평은 끊임이 없었으나 그 또한 치리하시고 다스리셨다.

 

우리의 절대 능력자는 하나님이심을 새삼 알 게 된다. 우리가 저를 찾음이 아니요, 저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심이다.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욥 37:23).” 지금도 그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이끄신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애 5:19).”

 

그야말로 위협적으로 코로나 전염병이 창궐하여 주변을 위협한다. 때론 두렵고 때론 그로 인하여서도 경각심을 갖게 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나의 유일한 하나님’이 되심을 알게 하신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출 8:10).” 세상이 이를 알고 우리로 이를 잊지 않게 하신다. 이로써 우상, 하나님 외에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20:4-5).” 마음이 그때마다 허투루 쏠리고는 할 때, 믿음으로 나를 붙드신다.

 

이를 행함은 주의 법을 마음에 새김이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6).” 생활에서 이를 붙들어야 한다.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7:3).” 하나님은 이를 위해 광야를 예비하셨고, 단순히 저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벌하시고 하는 목적으로만이 아니었다.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민 14:34).” 어쩌면 오늘 우리의 고초가 우리 스스로가 자처하여 벌어지는 일이다. 이에 주를 더욱 바라고 주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시려고….

 

어제는 아이들에게 진지한 이야기를 하였다. 오고 안 오고, 하고 안 하고는 내가 취할 몫이 아닌 것이고! 다만 내게 두시는 시간과 맡기신 만남으로, 그 이유와 목적을 나는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더디고 어리지만 성경을 묵상하여 글을 쓰려 하였고, 주일이면 이제 그 부모와 같이 예배에를 간다. 억지로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으나 그리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의 만남을 두신 게 분명하였다. 희한하고 신기한 건 안 하겠다는 소리들은 없다. 굳이 누가 억지로 하게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 41:13).” 그것으로 일찍이 어려서 주를 섬기고 온전히 알아서,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 22:9-10).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귀하고 복되었다. 그러하기까지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돌리신다. 고통의 손아귀에 맡기기도 하신다. 외면하듯 얼굴을 가리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때의 막막함을 통하여 주를 더욱 찾고 알게 하시려고,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나는 이제 이것이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감사하다. 아이들의 저 마음 하나도 내 의지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나는 다만 이르고 주의 살아계심을 나의 삶에서 나는 어찌 체험하고 살았는지를 말해준다. 이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9).” 나의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오히려 감사를 알게 하시다니.

 

일일이 아이들에게 말해줄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저들 가운데서도 역사하고 계심을 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 성령으로다. 아이들과 수업을 시작하면서, 서로 대화의 물꼬를 트면서 우리는 이제 먼저 기도를 하고 잠언을 같이 읽는다. 아이들은 주시는 마음에서 한두 구절의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여 자기 이야기로 끌어간다. 이에 모든 것을 주가 행하실 것이다.

 

점점 더 세상은 요지경이 되는 가운데,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2-5).” 그런 가운데서 아이들이 오고 감으로 주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는 하는 게 없으나 나로 거기에 두심으로 이를 실현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코로나 이후 얼추 2년여 만에 대면예배로 직접 교회를 가는 아이의 가정이 이제 둘이나 되었다.

 

그 부모의 경직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이였다. 새삼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주의 뜻을 알겠다. 오겠나? 싶던 아이들이 오더니, 하겠나? 싶던 아이가 생활 가운데서 행하는가 싶더니. 그리 따르겠나? 했던 이야기가 아이가 그 부모를 그 부모가 아이와 함께 교회로 간다! 어느 아이는 6개월이 넘도록 유튜브로 또는 어디 이동하면서 차에서 틀어놓은 극동방송으로 예배를 대신하였다고 하던 것이… 오늘부터는 그 부모가 같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로 간다. 코로나 변종 바이러스 오미크론이 확산되고 모든 상황이 위협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때에 주의 자녀들은 주의 품으로 모여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용하게 때론 하는 듯 마는 듯 기척도 없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우리의 구함은 그 사소함까지도 주는 들으신다.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신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그럴 때보면 나는 다만 여기 있음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때론 광야에 흩어지는 소리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막 1:3).” 있는 듯 없는 듯 일심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어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잊히고 더는 아무 것도 아닌, 소리로 또는 대야로 발 씻은 물로 존재하였었음으로 족한 것이다. 드러나는 것은 예수요,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그것으로 충분하였다는 것. 어느 소녀의 ‘깨진 물동이’가 되어, 저는 가난하여 그것으로 조심스레 물을 길어다 나르는데, 그러는 동안 버려지고 아깝게 허비되는 물이었나? 싶던 것이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들에게 단비와 같이 물을 뿌리고 있던 것처럼. 솔직히 한편으로는 ‘이런 애들하고 뭘 하나…’ 싶어 그만둘까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였다! 이번 주일은 어떻게들 지키나? 하고 물었을 때, 저는 엄마랑 같이 교회 가기로 했어요! 하는 어느 아이의 말이 새삼스러웠다. 코로나 이후 이런저런 궁여지책으로 연명하던 예배가 비로소 교회로까지 가게 하는 놀라운 역사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 게 없는데 나로 여기 두심으로, ‘주가 일하시고 계셨다.’

 

때로는 정물이 되고 때론 기이한 달팽이 같이 느리고 더딘 진전일 뿐이지만, ‘주가 행하신다.’ 나는 성경을 알고 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이 읽음으로,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다만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22).” 내 안에 두시는 저 아이에 대한 ‘이상한 관심’, ‘괜한 마음쓰임’ 이를 감당하고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하였다. 솔직히 어제는 아이들이 오기 전에까지, 이제 그만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아이들이 소리 내어  성경을 읽고, 자기들의 생활 속의 이야기를 한 토막 연관 지어 글을 쓰고, 나는 이에 설명을 하고. 한두 줄 짧고 보잘것없는 글이고 어쩌면 하나마나한 소리 같은 말뿐이지만 표현하지 못한 것까지도 성령이 하신다.

 

자, 오늘 본문에서도 요단 서편 아직 들어가지도 못한 가나안 땅을 두고 제비를 뽑는다. 저들 땅에 있는 우상을 훼파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어떤 점에서 이보다 더 난센스가 있나? 아직 이루어진 일도 아니고, 승리 할지 패할지 알 수도 없는 일을 두고, 백성들은 어떤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들었을까? 그저 덩그러니 놓인 텅 빈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온갖 이방민족들이 저들의 신을 섬기며 차지하고 사는 땅이었다. 현실적으로도 상대가 안 된다. 불가능한 일들 뿐이다. 그러니 모두가 집단최면이나 망상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면 제정신으로 지금 그와 같은 대화나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것이다. 한데 그 차지할 땅에서는 하나님만 바랄 수 있도록 대비 하게 하시는 것이, 이를 요약하면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주변 여건이나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만 바라라는 것,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그러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3).” 다음은 이를 분명히 할 때 우상숭배를 금하라는 것.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4).”

 

결국 어제의 나에게도 아이들을 보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라는 것, 그리고 내 안에 드는 어떤 불만, 아이들을 바꾸고 변화시켜 보겠다는 어떤 기대, 이는 자칫 내가 세우는 우상으로 나의 공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곧 내 안의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것,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2).” 이는 나의 선입견이었고 하나마나인 것 같은 부정적인 생각었다. 그리하여 그만두네 마네 나 혼자 판단하고 내 속에 이미 기정사실로 단정 지었던 아이들에 대한 평가가 옳지 않았다. 내 안의 ‘가나안 족속’은 나의 편견과 아집이었다. 이를 모두 주께 맡긴다는 것은 내 안의 그 어떤 ‘악의 모양’이라도 만들지도 말고 상상하지도 말라는 것이었따.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 왜?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일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시려고!

 

주가 하신다. 주가 행하시도록 나는 다만 마땅히 생각할 그것만으로 족하였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내가 아이들과 얼마나 더 같이 할 수 있을지, 언제까지일지 나는 알 수 없고, 내가 정할 문제도 아닌 것이다. 다만 맡기신 이가 또한 다른 이를 위해 자리를 비우실 때까지… 불신과 고초의 광여 40년의 훈련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주는 바라신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0-12).

 

바울과 같이 그저 다만, 주신 상황 속에서 묵묵히 주를 바라는 일. 무던히 그 맡기신 일을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다 하는 것뿐.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하여 이 길 위에 걸어갔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22:4-5).

 

그러므로,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시 22:11).

 

이제는 내 안에 무엇이든지, 그것이 옳은 것이든지 그른 것이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 나의 이 사소함으로 주인에게 ‘추수 날의 얼음냉수 같았으면!’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그리고 이 주일 날 아침, 확진을 염려하고 양성 판정을 받은 아들과 가족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누구를 위해 기도하며. 이런 시국에 여러 모양의 생의 절박함으로 기도를 부탁하고 주가 주시는 마음의 평안을 바라는 누구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우리 믿는 자들의 마음에 주의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22: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