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전봉석 2022. 2. 14. 05:22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에게 땅을 기업으로 나눌 자의 이름은 이러하니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니라

민 34:16-17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가나안 땅의 경계와 이를 나눌 각 지파를 분명히 하신다. 이는 모세의 마지막 책무이고 여호수아가 뒤를 이어 실행할 것이다. 므라바 사건으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는다. 저들의 불평과 원망에 자신도 화를 참지 못하고 므리바에서 돌을 두 번 내리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었다. 그럼에도 저는 마지막 소임으로 가나안의 경계를 정하고 이를 나눌 지파를 분명히 하고 있다. 후에 모세는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는 질서의 하나님을 본다. 가나안의 경계를 뚜렷이 하고,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는 너희가 제비 뽑아 받을 땅이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아홉 지파 반 쪽에게 주라고 명령하셨나니(13).” 우리의 행동반경은 뚜렷하고 이에 나누고 소유할 것 또한 명확해야 한다. 무질서와 우연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는 그 자체로 선물이시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가늠할 길이 없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때론 어려움 속에서, 고통 가운데서 참 사랑과 귀한 선물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겸손이란 내게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도우심이 절실한가를 아는 일이다. 오늘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나 상황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를 바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임을 입증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이에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자는 복이 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우리의 끝이 어떠할지를 아는 것이 지혜인 것이다.

 

노벨은 자신의 형이 죽었을 때 자신이 죽은 것으로 알고 오보를 낸 신문을 받아들고 깜짝 놀랐다. 그의 부고 기사에는 ‘다이너마이트 무기의 발명자인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 사망하다.’ 하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 충격으로 저는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게 되었고, 죽고 난 뒤 자신의 생애에 대한 평가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 고민의 결과가 노벨상이라 한다.

 

위트 있는 희극인이며 영국이 사랑하는 작가 버나드 쇼는 죽음을 앞두고 그의 묘비명에 이렇게 남기게 하였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문득 이들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모세는 그의 마지막까지 주가 명령하시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훗날 지혜자는 연거푸 강조했던 모양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모두가 예외일 수 없는 것을 두고 모두가 외면하고 혹시나, 하며 차일피일 미루는 게 죽음이다. 그러다 버나드와 같이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회고가 전부인 생이 될 수도 있다.

 

바울의 놀라운 설교가 적절하게 눈에 들어온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 삶의 경계가 뚜렷하고 그에 따른 행동반경이 분명한 것을 의미한다. 은혜 아래에 있다하여,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 오히려 죄에 더 민감하고 이를 멀리하는 것이다. 오늘의 이 모든 우려와 현실은 ‘에이, 설마’ 하는 자기 허용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많은 10대로 20대의 세대가 오미크론 확산에 주범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다들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면서도 실은 자신은 늘 예외이기를 바란다. 특히 젊음 세대들이 갖는 죽음에 대한 오차범위는 크다. 무모할 정도로, 자신을 예외로 둔다.

 

하여 바울은 일러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16).” 마치 우리는 주도적인 삶을 살고 주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누구, 무언가의 주도 아래에 있다. 문명의 발달은 동시에 유행의 다채로운 자유 안에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실은 ‘남들처럼, 남들 속에’ 있을 때에 안도하는 것이다. 이를 사망의 종으로 사느냐, 순종의 종으로 사느냐의 차이로 바울은 그 구분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이를 분명히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 곧 오늘 나의 정체성은 엄연한 것이다. 이를 때로 알지 못하고 산다 해도, 그러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음은 주를 바람으로 온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가를 아는 일이다. 곧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 전에는 불법에 내어주던 삶이었으나 이제는 의에게 내어줌으로 거룩함을 이루라는 말씀, 노벨이 자신의 죽음을 기사로 읽고 그 오보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알지 못할 때도 자유로웠던 것이 알고 난 뒤에는 부끄러움이 된다.

 

그때의 그 자유가 맺은 것이 무엇인가?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20-21).” 우리가 바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점검하는 길은 자신이 얼마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이를 대비하며 그 너머의 생을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데에서 판가름이 나는 것 같다.

 

이제는 바로 곁에서 난데없이 터지는 전염병의 확산은 두려우면서 동시에 더욱 절제와 그 경계를 바로 하게 한다. 나는 지금의 답답함이 때론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서부터 개인적인 위생과 그 조심성에 이르기까지, 삶을 분별하지 않고 사는 일에 대해 오늘 본문도 이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게 아닐까? 하나님은 절대 무질서한 분이 아니시다. 그 경계가 모호하여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의 접근과 방식을 싫어하신다. 하여 분명히 이르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임하시면’과 ‘되리라’의 그 선과 기준을 묵상하게 한다. 내 임의로 내 뜻에 따라 주의 일을 하고 주를 따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철저하게도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이루어진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그렇게 오늘의 나의 경계는 성령으로다. 우리 믿는 자의 생활반경도 진리 가운데서다. 때론 그 경계가 어디까지일지, 그 반경이 얼마나 되는지 우린 알 수 없으나, 엄연한 사실 하나!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4).” 성령의 하시는 일 또한 엄연하였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5).” 우리가 주를 알고 믿고 이에 순종하며 산다는 일은 그때마다 우왕좌왕 어쩌다 그리 되는 과정으로가 아니다. 나는 종종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떠올린다. 희극인답게 자신의 죽음까지도 희화화하여 위트 있게 적어놓기는 하였으나, 죽음이란 그렇게 ‘우물쭈물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하고 말면 그만일 게 아니다.

 

그 너머의 생을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그게 또한 한계였을 테지만,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우리 주님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것까지도 치밀하셨고 그 목적은 분명하였다. 우리가 단지 성령을 무슨 가상의 힘으로, 이를 느낌이나 감정으로 받을 게 아님을,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내가 주를 사랑함은 주께로 사로잡힌 선물이다.

 

하다못해 우리 중3 아이 누가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 온통 그 마음이 사로잡혀 그 엄마의 성화가 끝도 없다. 그런들, 아이는 아랑곳도 않고 그럼 그럴수록 더욱 그 마음이 강하게 이끌리는 것인데, 하물며 주를 사랑한다면서 그 삶이, 생의 경계가 자기 멋대로 그 감정대로 여전하면 그게 말이 되겠나? 그 문제는 단순하게 자기 문제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나는 누구를 생각하다 이런저런 불쾌한 마음은 뒤로 하고 저의 영혼의 고갈된 소망으로 가슴 아팠다. 고스란히 그 결과는 아이를 더 악화시키고 주변과의 문제를 어지럽게 한다. 뭐라 일러주고 알린다 해도 저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아집이 사로잡힌 데는 자기애이기 때문이다. 만사가 지겹고 귀찮고 누구의 참견도 싫은 것인데, 그 고집의 결과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고 끝내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죽을 텐데… 어쩌자는 것일까?

 

나이 환갑이 지나 일흔이 돼서도 여전히 초등학교 때의 일, 엄마에 대한 서러움 어떤 슬픔을 안고 아직도 씨름하고 있는 사람도 보았다. 문득 누가 그 일을 건드리기만 해도 퍽, 하고 눈물이 솟구치며 억울함이 인다. 그러고 평생을 살았으면서도 여전한 것이다. 우리는 분리와 분별을 구별해야 한다. “그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의 하나님의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1:12)” 이는 분리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이것도 분리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23).” 이것은 분별이다. 이어 설명을 들으면 더욱 확실하다.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하여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딤후 2:6).”

 

곧 분별과 분리가 명확하지 않을 때 그 혼재는 감정을 건드린다. 내가 누구에게 어떤 서운함을 가지는 일, 괘씸하고 답답하고 무력함을 느끼는 것, 이는 분리가 어려워서다. 그래서 가장 다루기 힘든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나’다. 나는 주 없이 살 수 없고,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나 하나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아이 하나가 ‘내일부터’ 오지 않겠다는 문자를 주었다. 토요일에 뭐라 일러 할 거면 바로 하자는 말끝의 결정이다. 기꺼이 나는 저의 의사를 존중한다. 저가 아무리 아이라 해도 스스로의 결정에 스스로는 책임을 느끼고 배워야 한다. 어느 어른은 상대적으로 아무런 대꾸가 없다. 나는 저의 심정을 이해하려 애쓰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생각한 것은 인생의 지혜는 나이순이 아니다. ‘어쩌다 어른’도 많다.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두 개의 카톡을 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그만두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일일이 다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는 것도 오만함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다만 나는, 또 하루 오늘에 허용된 행동반경 안에서 주를 의지한다. 거기에는 엄연히 ‘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다. 고로 저에게도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있을 것을 믿으며,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곧 내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주께서 나를 붙드시고 함께 하시고 누구보다 귀히 여기신다는 증거로 안다. 모세는 모세의 일을 끝까지 수행함으로 모세였다. 나는 가만히 오늘 시편을 암송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편, 전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