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가 다 그들의 숙부의 아들들의 아내가 되니라
민 36:11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시 25:15
슬로브핫의 딸들은 여러모로 교훈을 준다. 하나님은 아들이 없고 딸만 있을 경우에도 저들에게 동일하게 땅을 기업으로 주게 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딸에게 돌릴 것이요(민 27:8).” 그런데 딸들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면 그 기업으로 받은 땅이 서로 간에 뒤섞여 이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기업으로 물려받은 것을 중심으로 이를 보존함으로 순종하였다. 지파의 크기에 따라 땅의 양을 정하고 지형을 제비뽑아 나누는 데 있어 그것이 공평한 결정이 되기 위해서는 순종이 우선이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공평하게 받아들였고 이를 순종함으로 기업으로 받은 땅을 보존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슬로브핫의 딸들 넷이 모두 그것을 귀히 여겨, “그들이 만일 이스라엘 자손의 다른 지파들의 남자들의 아내가 되면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의 기업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들이 속할 그 지파의 기업에 첨가되리니 그러면 우리가 제비 뽑은 기업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요(3).” 하신 말씀에 어긋나지 않으려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10).” 이에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종족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그들의 종족 지파에 그들의 기업이 남아 있었더라(12).”
이는 신앙의 대를 잇고 그 믿음을 지켜 자자손손 살아가는 데 따른 순종으로 이해된다. 이는 민수기 마지막 장에서 전체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앞서 35장의 도피성을 두어 ‘땅의 지키는 의미’로 연결이 된다. 광야 생활의 큰 줄기는 소망이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훈련이다. 이때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마땅히 받을 것을 두고 이를 잃지 않는 데는 온유함, 그 앞에 순결하고 순종함으로 온화하여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과 속박이 아니라 자유다. 참 자유는 바른 질서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민수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돌아볼 수 있다. 그 백성의 숫자와 가는 것과 멈추는 것, 여러 절기와 안식일… 이 모두는 하나님이 장차 주실 땅에서의 삶을 두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킨다는 것,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
이를 위협하는 것 중에 우리의 비겁함이 있다. 어떤 힘든 일이 닥치면 우리는 이에 타협함으로 심지어 자아도취에 빠진다. 실제 미루고 물리는 이유가 직면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은 복잡하게 꼬이고 이에 그 영혼은 경직된다. 뜻하는 바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그 결과는 늘 자신을 배신한다. 이로써 겪는 개인적인 감정소모-외로움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위장하고 꾸며 은폐한다. 그 안에 평안이 없는 것은 자신도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정작 자신의 본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뭘 원하는지, 정작 바라던 게 그것이었는지… 애써 달려온 길 위에서 자주 주춤거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은 생이 고단하여지고, 저마다 작동하는 방어기제는 체념이다.
그럴 때 나타나는 태도나 대답이 ‘잘 모르겠다.’ 더 나아가 ‘알고 싶지 않다.’는 내재된 심리가 지배한다. 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 체념은 자신을 감춘다. 포기한 게 아니지만 열심을 다하지도 않는다. 여러 요인들 가운데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지배하려 드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슬로브핫의 딸들과 고라의 자손들의 예는 주는 교훈이 크다. 조상의 죄와 반역으로 그 눌린 감정이 체념으로 치달을 수 있었는데 저들은 오히려 주를 바랐다. 그리하여 슬로브핫의 딸들은 자기들 몫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었고, 고라의 자손들은 주의 성전에서 찬양하는 자들로 봉사하며 자자손손 이를 이어갔다. 현재의 모호함은 과거의 일을 풀어내지 못한 데서 오는 애매함이다. 그렇게 되면 미래는 막연하여서 체념으로 무마하는 길을 택한다.
경직된 신앙은 교조주의와 같은 결함을 갖게 한다. 교조주의란 알아보기도 전에 스스로 답을 내리는 것이다. 뭐라 이를 때, 저는 다 안다고 여긴다. 자신도 안다고 하는 그 성급한 답은 실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를 알려주어도 자신이 아는 범주 안에서 재구성함으로 같은 길을 맴도는 삶이 된다. 광야 40년의 길이 그런 형태였고, 저들의 생활 역시 반복되고 거듭되는 거역과 그에 따른 형벌로 인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지만 또 다시 거역을 일삼는 일이 거듭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우직하고 바보처럼 꾸준하다는 것은 관습에 매이지 않고 어떤 시류에도 편승하지 않음으로, 노아와 같이 120년을 방주 짓는 일에 꾸준할 수 있다.
이를 우리가 따를 수 있는 것은 십자가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누가 뭐라든지 타협할 수 없는 기준을 분명히 세우는 것은,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19-20).” 하면 참 지혜란 잘못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를 회개하고 돌이켜 자신들의 몫을 굳건히 하고 맡기신 바 그 책무를 다하는 슬로브핫의 딸들과 고라의 아들들 같은 믿음으로가 아닐까?
넘쳐나는 물질주의 세상에서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이를 위해 선을 구하며 그 행실을 바로 하고,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 5:10).” 사랑하여 선에 속하고,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서로 먼저 위하고,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0).” 부지런히 주를 섬기는 것,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1).”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우리로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도-바람-에 항상 힘쓰게 된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서로 대접하여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고,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3).” 오히려 우리는 괴롭게 하는 것으로 축복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 서로가 함께 하는 것,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 이를 위해서는 허튼 데 마음을 두지 않고 스스로의 지혜로 판단하지 않는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6).”
이와 같은 성경의 진리를 찾아 묵상함으로 오늘 내게 두시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도리어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축복이 된다. 고통이 우리로 바른 길을 보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어찌하여 예수님은 그와 같은 나를 대신하여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셨나?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
주께서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으로 인하여 우리는 오히려 주를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다들 이런저런 어려움과 남모를 사정 속에서 살아간다. 누구는 그것으로 주를 기억하고 주께 아뢰며 주를 더욱 의지하고 누구는 자신의 완고함으로 현실에 안주함으로 체념에 빠져버린다. 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이런저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라니! 여기에서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와 같은 사도들의 공통된 주장은 궁극적으로 이 모든 상황을 누구보다 우리 주님이 더 잘 아신다는 확신에서였다. 곧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우리에 주신 약속, 이 성경을 기준으로 주 앞에 굳건하고 온전할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 놀라운 비밀 앞에서 나는 늘 굳건하였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렇고 어제는 저렇고, 날마다 다른 감정의 소요와 몸의 증상과 그때마다 겪는 어려움에 대하여,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7-18).” 문제는 문제만 바라보면 문제다. 이를 통해 주가 행하시는 일을 묵상하고 확신하고 의뢰하면서 묵묵히 앞만 보고 나아가는 길,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내가 스스로 풀어내려는 유혹은 술 취함과 같이 끝도 없다. 이럴 때 성령의 충만함으로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19-21).”
그럴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요즘은 불안으로 인해서인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 어려운 때가 잦다. 평소보다 안정제를 많이 먹고, 그러면서 몸은 이를 이겨내지 못해 이중고를 겪는 셈이다. 모든 것을 주께 맡긴다는 것이 이처럼 어렵고 불가능한 일일까? 나의 연약함이 나로 하여금 좌절하게도 하고 주를 더욱 바라게도 한다. 나는 내가 나를 견딜 수 없어 이처럼 나를 이끌어 주 앞에 앉힌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 25:1).
특히 새벽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처럼 말씀 앞에서 오롯이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으로 충분한데, 몸은 현실로 돌아오면서 나를 뒤틀듯 어렵게 한다. 오늘도 또 잠을 잘못 잤는지 목과 어깨가 결려 가누기조차 어렵다. 안정제를 먹었는데도 가슴은 답답하고 옥죄며 짓눌리는 것 같다. 이런저런 요인을 열거할 수도 있으나 정작 그것이 원인은 아닐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2).
행여 내가 나의 어려움 앞에 굴복할까봐. 그래서 주의 길을 가는 것에서 행여 이탈할까봐서, 마음은 저 혼자 어렵고 몸은 덩달아서 기온이 떨어진 것만큼 경직되는 것 같다. 오직 주를 바란다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즉 어떠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의 이름으로 그를 힘입어 감사함으로 오늘 하루도 살 수 있기를. 고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3).
시편은 내가 취하고 붙들어야 하는 표본을 제시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구할 것을 아뢰게 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4-5).
결국,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9).
온유함이란 주 앞에서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을 좇지 않는 것. 그리하여,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5).
비록,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17-18, 20-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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